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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99개-201화 (201/203)

201화

“여긴 어디지?”

갑자기 바뀐 주위 풍경에 나의 시선이 바쁘게 움직였다.

분명히 게이트 앞에 있었는데.

한번 감았다 뜬 두 눈은 허름한 주택가로 나를 데려다 놓았다.

한데 왜 이렇게 익숙한 걸까.

머릿속 가득한 기시감을 느끼며 나는 좁은 골목을 지나 너른 공터로 나왔다.

그리고 멈춰 섰다.

“저 탑이 왜…….”

너무나 익숙한 조형물이 발길을 붙잡은 까닭이었다.

선명히 남아 있는 기억.

나의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저것이 있어야 할 장소는 시작의 마을이었다.

하면 순간 이동이라도 했다는 건가?

나는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뜬금없는 장소도 이상했지만, 텅 비어 있다는 게 더욱 수상했다.

이곳을 지키는 병력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본래라면 레반도르에서 구출해 온 시민과 병사들로 꽉꽉 들어차 있어야 하는 게 정상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시작의 마을이라 확신한 나는 두리번거리며 인기척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움직이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이상하네.”

마을은 괴이쩍은 분위기만 가득했다.

한데 그 순간.

“아, 오늘은 진짜 위험했어. 죽는 줄 알았다니까?”

갑작스런 음성과 함께 희미한 형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옆과 뒤에서도.

하나둘씩 떠오른 형상들은 마을 전체로 퍼지며 삽시간에 늘어났다.

마치 유령이 나타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충격적인 건.

“맞아. 오늘은 실수가 많았어.”

“진이 한눈팔아서 그런 거라니까. 싸우다 말고 갑자기 사라지더라고.”

모습을 드러낸 사람들이 내 몸을 통과해 지나쳤다는 것이었다.

원래부터 아무것도 없다는 듯.

“어억?!”

연이어 다가오는 사람들은 얼빠진 표정을 짓는 나의 몸을 공기처럼 지나갔다.

내가 뚫린 건가, 아니면 내가 저 사람들을 뚫은 걸까.

갈피를 잡지 못하던 나는 뒤늦게 맴도는 한마디에 얼음장처럼 굳어 버렸다.

결코 흘려들을 수 없는 이름.

‘방금 진이라고…….’

정체 모를 남자의 입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현재진행형으로.

갑작스런 흐름을 따라잡지 못해 나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되어 갔다.

하지만 이건 시작이었을 뿐.

“이게 뭐예요?”

“모르겠어. 어미를 잃었는가. 쫄래쫄래 따라오기에 데려왔지.”

“어떤 짐승인지도 모르고요?”

“귀엽잖아. 불쌍하기도 하고.”

다가오는 한 쌍의 남녀를 보며 생각이란 것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미리암이 잘 보살펴 줘.”

“뭘 먹는 아이인지도 모르는데요?”

“이것저것 주면 알아서 먹겠지. 먹성 좋게 생겼잖아.”

“아직 아기인데 그러다 탈나면 어쩌려고요.”

“에이, 야생동물들이 그렇게 약하지 않다니까?”

미소를 머금은 두 사람의 얼굴이 낯설지 않은 탓이었다.

생각하면 애틋한 그리운 얼굴.

나를 지나치는 한 쌍의 남녀는 기억조차 남아 있지 않은 그림속의 부모님이었다.

‘이게 어떻게…….’

너무나 현실 같은 과거의 장면에 얼떨떨한 정신은 돌아올 줄 몰랐다.

뒤따라오는 앳된 그레이시를 보며 충격은 더욱 커졌고, 곁에서 장난치는 금발의 남자에 나는 헛숨을 내뱉었다.

“아, 아프다고요. 마법사 주제에 힘은 왜 이렇게 센 거예요.”

“흐흐흐, 집에 갈 생각하니 힘이 솟아서 그렇다!”

“쳇, 그런데 진짜 돌아갈 수 있는 것 맞아요?”

“소환됐던 첫날 왕자가 약속했잖냐, 마족들만 막아 내면 돌려보내주겠다고.”

“저는 그 사람 인상이 별로던데, 약속 안 지키게 생겼다고요.”

“에이, 그래도 일국의 왕자가 거짓말을 하겠어?”

밝게 웃으며 답한 카론은 그대로 나를 지나쳐 부모님의 뒤를 따랐다.

나 역시 홀린 듯 그 뒤를 쫓았다.

마을 광장을 벗어난 그들은 주택가 가운데를 지나 커다란 공용 건물로 들어섰다.

‘여기는…….’

식당이다.

너무 넓어서 우리가 방문했을 땐 사용하지 않았던 공용 식당.

안에서 바라보는 광경은 커다란 식탁에 둘러앉은 아홉 명의 사람들이었다.

“모두들 수고했습니다. 덕분에 대륙은 위기를 벗어났군요. 황제 폐하를 대신해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상석에 있던 빅터가 고개를 숙여 감사를 전했다.

선 굵은 얼굴에 강인한 눈빛.

내가 아는 백발은 온데간데없고 갈색 머리의 중년이 그곳에 있었다.

혹시 과거로 돌아온 건가.

하지만 이내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 생각을 부정했다.

내가 겪은 과거가 아니잖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설지 않은 건, 누군가의 기억을 공유했기 때문일 것이다.

저들이 누군지 알겠으니까.

아버지인 진의 곁에 앉은 남자는 브레인이었고, 옆에 있는 턱수염은 세브첸키라는 사람이었다.

시계 방향으로 이어진 그들의 이름은 익숙한 그레이시부터 시작해 루즈와 미나이, 그리고 하멜이라는 남자를 지나 카론으로 이어졌다.

단지 그것뿐이라면 기억 공유 같은 생각을 떠올리지 않았을 것이었다.

대충 보긴 했지만, 어쨌든 나는 저들의 초상화를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사람들은 왜?

왜 내가 저 사람들을 알고 있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었다.

몰리, 데보라. 안나 등등…….

어머니를 도와 음식을 만드는 여인들을 나는 너무도 익숙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자, 주목!”

그런 나의 상념을 깨며 쾌활한 목소리가 식당 안에 울려 퍼졌다.

음성의 주인공은 카론.

“인마대전의 승리 외에도 우리가 축하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카론은 마주 앉은 아버지를 보며 잔잔한 미소를 보냈다.

그러고는.

“진과 미리암의 결혼식이 다음 주 일요일에 진행됩니다!”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으며 두 팔 벌려 환호했다.

흡사 자신의 일인 것처럼 말이다.

“미리암 누나, 왜!”

“아아… 대천사 미리암을 저런 소도둑놈에게 빼앗기다니.”

“말도 안 돼! 저런 무식한 놈이 뭐가 좋아서?!”

순식간에 달아오른 식당 안은 각종 비난과 웃음소리로 떠들썩해졌다.

수줍은 얼굴로 화답하는 어머니와 머쓱해하는 아버지.

흐뭇하게 바라보는 카론의 얼굴은 가식 없는 진실이었다.

그런데 왜…….

일 년 뒤 그는 황제의 편에 섰던 것일까.

풀리지 않는 의문을 뒤로한 채 장면은 소박하게 꾸며진 작은 정원으로 이어졌다.

“신랑 진은 신부 미리암을 아내로 맞아 평생을 사랑…….”

“네! 죽도록 사랑하겠습니다!”

“하하하하하하!”

“신랑 급했네, 급했어!”

“아직 밤 되려면 멀었거든!”

스타티스와 장미로 만든 아치 아래서 아버지는 어머니를 향해 사랑의 맹세를 선언했다.

“크흐흠, 이번엔 신부에게 묻겠습니다. 신부 미리암은 신랑 진을 남편으로 맞아…….”

“저도 사랑할게요. 평생.”

“미리암 누나!”

“야이, 나쁜 놈아! 순진한 미리암을 타락시키고 웃음이 나오냐!”

“난 이 결혼 반댈세!”

“커허험… 하여간 빛의 여신 엘라흐의 가호가 영원토록 함께하시기를.”

요란스런 혼인 서약이 끝나고, 반지를 든 두 남녀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신랑의 반지를 들고 온 남자의 정체는.

“축하해, 진.”

금발을 단정히 빗어 넘긴 젊은 시절의 카론이었다.

행복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따스하고 푸근한.

한데 이 감정은 누구의 것일까.

나는 그저 신기해하고 있을 뿐, 이 감정의 주체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것이다.

그런 나의 의문은 머지않아 해결되었다.

“진이 그런 준비를 해 왔다는 겁니까?”

“그렇다네.”

“그럴 리 없습니다. 진이야 말로 누구보다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졌던 녀석입니다. 그런 녀석이 왜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필요한 사람은 많은데 물건은 하나밖에 없다. 자네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

“진은 본능에 충실했을 뿐이네. 굳이 이유를 따질 필요도 없는 일이지.”

또다시 바뀐 장면에선 황제가 된 데드릭과 카론의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이 모든 게 카론의 기억.’

나는 지금 그의 기억을 공유하며 과거를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진이 좋은 사람인 건 인정하네. 하지만 그는 모두 함께 돌아갈 수 없다는 걸 그대들보다 먼저 알게 되었지. 그게 문제였던 거지.”

무표정한 황제의 말에 카론의 감정이 요동쳤다.

믿을 수 없다는 부정과 그럴지도 모른다는 의심.

거기에 제한된 기회라는 절박함이 그의 마음을 부러뜨렸다.

그리고 마침내.

“미안하다, 진.”

카론은 황제와 남은 기회를 선택했다.

“황제의 말을 믿는 건가.”

“거짓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대가 미리암을 위해 목숨을 포기했듯, 나 역시 아내와 딸에게 가기 위해 못할 짓이 없다.”

“그랬군.”

“그래. 나중에 지옥에서 만나거든, 그때 나에게 복수해라.”

“헛소리하지 말고… 기왕 그렇게 결정했다면 정신 똑바로 차려서 귀환해라. 황제는 절대로 만만한 인간이 아니니까.”

“알겠다.”

“그 대신 미리암을 지켜 줄 수 있겠나.”

“장담할 순 없지만 최선을 다해 보지.”

“그래. 고맙다.”

무겁게 짓누르던 감정의 소용돌이가 분출하듯 터져 나갔다.

꽉 다문 잇새로 흐르는 핏물.

카론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지구에 있는 아내와 딸을 떠올렸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차디찬 감옥과 독약.

죽어 가는 동료들을 보며 카론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했다.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둬.”

“무슨 말씀이십니까! 카론 님이야 말로 기울어 가는 흑마법의 거성! 끝까지 살아남으셔서 무지한 우리를 이끌어 주셔야 합니다!”

심지어 그는 죽을 자유도 없었다.

그를 동경하던 흑마탑주가 탈출을 도왔고, 거절하려던 그는 신음하는 루즈를 보며 마음을 고쳐먹었다.

“언젠간 반드시…….”

복수를 다짐한 카론은 루즈와 함께 죽음의 문턱을 넘어 세상 밖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또다시 장면은 뒤바뀌었다.

숨어 지내던 흑마탑 시절과 나를 찾기 위해 카이 형제를 보냈던 내용까지.

또한 카리프는 어떻게 만났으며, 게이트를 열게 된 모든 경외를 확인할 수 있었다.

모든 기억을 거슬러 장면은 마지막에 이르렀고.

“하… 결국 이렇게 끝나는가.”

메인 게이트 앞에선 카론은 치열한 전장을 보며 짙은 한숨을 내 뱉었다.

그의 시선이 머문 곳은 다름 아닌 나.

마족을 압살하는 나의 모습에 그는 계획이 실패했다는 걸 예감하고 있었다.

“가야 해.”

하지만 포기할 수 없던 카론은 묵묵히 자신의 일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의 소망은 거기까지였다.

“이유가 뭐냐.”

서릿발 같은 나의 눈을 마주하며, 그제야 카론은 모든 것을 체념했다.

그리고 나의 정체를 알았을 땐.

“진…….”

떨리는 음성으로 다음 말을 이어 가지 못했다.

고스란히 전해 오는 죄책감과 회한.

“나의 딸에게 주려던 생일 선물이라네.”

무너지는 게이트를 보던 카론은 나의 손에 낡은 머리끈을 쥐어 주었다.

“진이 죽지 않았다면 미리암의 손에 들어갔겠지. 만삭이었을 때 주려고 했었으니까.”

힘없이 말을 전한 카론은 형체를 잃기 시작한 게이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엠마…….”

30년간 가슴에 묻어왔던 아픈 그 이름.

딸아이의 이름을 부르던 카론은 굵은 눈물을 흘리며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남은 생명을 소진해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이어지는 암전.

칠흑 같던 세상이 다시 밝아졌을 땐… 확연히 늙어 버린 카론의 주검이 나의 발밑에 놓여 있었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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