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마지막 관문에 도착해서야 진짜 인마대전이 시작되었다.
개전의 서막은 지상이 아닌 하늘에서.
“전방 상공에 비행 몬스터 출현!”
다급한 부관들의 외침에 따라 마법 총이 불을 뿜었다.
폭발하는 락 버스터의 잔해가 우박처럼 쏟아졌다.
마법에 직격당한 놈들이 곤두박질쳤고, 추락하는 날짐승 아래로 마족의 진군이 이어졌다.
나름 선방한 느낌이지만 실상은 좋지 않다.
마법의 포화를 피한 비행 몬스터들은 아군의 머리 위를 지나며 치명적인 공격을 흩뿌렸다.
어느 놈들은 화염을.
또 다른 놈들은 발톱을 내려 병사들을 낚아채 갔다.
“실드 유지에 집중하라!”
놈들을 쫓는 것은 마법 총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뒤에 선 알브족들은 전장 곳곳의 하늘을 향해 투명한 실드를 쉼 없이 만들었다.
쫓고 쫓기는 자와 공격하고 막는 자.
치열하게 열린 하늘의 싸움은 지상으로 이어져 더욱 심각한 장면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너무 많아.”
몰려드는 마족을 보며 나는 얼굴을 구겼다.
이런 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순수한 마족으로 이루어진 무리들이 이곳을 향해 진격해 오고 있었다.
뭔가 결사대 같은 느낌이려나.
협동을 안 하는 성격은 여전했지만, 숫자가 늘어나니 상황이 달라졌다.
놈들은 협공을 안 했을 뿐.
각자의 무력이 강하니 전선의 곳곳에서 마족과 충돌이 들불처럼 번져 가고 있었다.
전황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나를 포함한 빅터와 반크스.
또한 수많은 용자들의 분전에도 전세는 현격하게 기울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텨 낼 수 있던 건 겨울이 지원해 주는 특별한 마법 때문이었다.
20%가 전하는 경지의 상승은 빅터에겐 9성의 문턱을.
반크스에겐 미완의 경지를 완벽한 8성으로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 일대를 제외한 나머지 전선은 계속해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저 팔랑거리는 마족만 잡아내도 한결 수월해질 텐데.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건 속도에 특화된 마족들이었다.
어찌나 여기저기로 날뛰는지.
때문에 진영은 흐트러지고 피해만 늘어났다.
“그놈 하나가 아닌가 보네.”
일전에 처리한 마족을 떠올리며 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 녀석 하나가 특별한 줄 알았건만 이렇게나 많이 존재했다니.
이 정도라면 일종의 클래스라고 보는 게 옳을 터였다.
나는 초초한 마음을 억누르며 치솟는 숙련도를 바라보았다.
이제 최종 단계까지 남은 수치는 고작해야 한 자리 숫자.
‘조금만 더!’
다가온 반전의 기회를 잡기 위해 나는 발작하듯 해머를 휘둘렀다.
그렇게 몬스터의 사체는 발밑에 쌓여 갔고.
[내려치기 숙련도 10,000/10,000]
드디어 숙련도가 최대치를 달성했다.
[기본 수련 3종이 최대치에 도달하여 둔기 마스터리 레벨이 마스터로 상승합니다.]
[신체 능력이 30% 증가합니다.]
[누적 신체 능력 합계 100%.]
기다렸던 보상의 시간이 바쁘게 지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짜 보상은 이제부터.
[스킬 제작을 시작하시겠습니까?]
속도를 위한 나의 선택은 순간이동이라는 궁극기였다.
더 이상 빠른 속도는 없을 테니까.
희망 사항을 전달한 나는 결과를 기다리며 전투를 이어 나갔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의 육체가 보다 강해졌었다는 사실을.
스킬 제작에 정신을 빼앗겼던 나는 무심코 내지른 광역 강타에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신체 능력 30%…….”
그러고는 무심히 흘려보냈던 보상을 떠올리며 뒤늦은 감탄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자축을 하고 있기엔 상황은 여전히 좋지 못했다.
속도를 앞세우던 놈들은 더욱 늘어났고, 덩달아 위기는 이곳저곳에서 찾아왔다.
문제의 골칫거리는 내 앞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도 아닌 여럿이.
“딱 좋은 타이밍에 와 줬네.”
하지만 나는 피식 웃으며 놈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애써 찾아갈 수고를 덜어 줬으니 반가울 수밖에.
미소를 거둔 나는 때맞춰 완성된 스킬의 내용을 빠르게 훑어 내렸다.
[점멸.]
목표 지점으로 순간이동합니다.
“완벽해!”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스킬은 내가 원하던 그대로 구현됐다.
이동 기술의 정점으로.
표적을 확인한 나는 그 즉시 스킬을 사용해 모습을 감췄다.
슈악―
사라진 내가 나타난 것은 빠르게 움직이던 마족의 등 뒤였다.
등장과 동시에 작렬한 광역 강타.
콰아아아아아앙!
기습을 당한 마족은 피를 토하며 허공을 날았다.
놈이 나뒹군 자리에 연이어 천벌을 떨군 나는, 또다시 모습을 감춰 다른 마족의 등 뒤를 잡았다.
“체크 메이트.”
놈이 반응을 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내지른 첫 타에 스턴이 발동했고, 경직된 마족의 머리 위로 금빛 해머가 내리꽂혔다.
* * *
메인 게이트에 도착한 사마르는 먼발치에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게이트 정면은 이미 전투가 시작된 상황. 마족과 대치 중인 세력은 브라함의 군대였다.
“벌써부터 근질거리는군. 가서 다 쓸어버리면 되는 건가.”
“그래야겠지. 하지만 그쪽이 아니라네.”
난입을 묻는 바스코의 말에 사마르는 반대편을 가리켰다.
“저쪽이 우리의 목표지.”
시선을 돌린 바스코는 눈을 가늘게 뜨며 시력을 키웠다.
멍청히 서 있는 몬스터 사이를 유유히 지나는 금발 남자.
“나랑 비슷한 재주가 있네. 저런 건 내가 전문인데 말이야.”
로이드를 발견한 바스코는 흥미를 보이며 입을 열었다.
몬스터를 무력화시키는 그의 능력이 바스코 자신과 닮은 까닭이었다.
“그럼 직접 가서 확인해 볼까.”
피식거리던 바스코는 피 안개를 소환해 검을 만들었다.
한층 강렬해진 살기를 뿜어내며, 로이드가 있는 곳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길이 갈라졌다.
그리고 조아렸다.
게이트를 넘어온 몬스터들은 압도적인 공포 앞에 삶을 체념했다.
스스스스스스스스…….
걷고 있는 바스코의 주위로 붉은 안개가 넓게 펼쳐졌고, 그 안에 존재하던 생명체들은 생기를 빨리며 죽어 갔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크하하! 좋구나! 좋아!”
상기된 바스코의 얼굴이 쾌락에 물들어 갔다.
이런 난전이야 말로 바스코가 바라던 최적의 상황이었으니.
“오래간만이군.”
단신으로 걸어간 바스코는 금발남자의 앞을 가로막으며 칼끝을 겨누었다.
* * *
기이한 장면이었다.
사위가 몬스터로 가득했거늘, 이들이 머문 자리엔 그 어떤 움직임도 일지 않았다.
한쪽엔 로이드가.
그 맞은편에선 핏빛 안개가 주위를 단절시켰다.
“왜 그랬나, 카론.”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사마르였다.
표정 없는 로이드를 향해.
아니, 한때 동료였던 카론에게 진실을 물었다.
“카론이라……. 참으로 오래간만에 들어 보는 이름이군.”
본명을 듣게 된 카론은 실없는 웃음을 날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떠오른 회환을 갈무리한 채.
“가는 길이 달라서 그랬네. 이해해 주게, 루즈.”
사마르의 실명을 부르며 질문에 대답했다.
“언제부터였나.”
“글쎄? 이 땅에 도착한 그날부터였겠지.”
“그 이후로 쭉 나를 속인 건가?”
“아니네.”
“하면 언제란 말인가.”
시원치 않은 카론의 말에 루즈는 언성을 높이며 재차 물었다.
하지만 돌아온 카론의 대답은.
“시기를 말하는 게 아니네. 대상이 틀렸단 거지.”
“그게 무슨 말인가.”
“난… 자네가 아닌 우리 모두를 속였네.”
생각보다 폭넓은 자백이었다.
그에 루즈의 머리가 왼쪽으로 기울어졌다.
의미 불명인 카론의 말에 가벼운 짜증을 느끼는 것이다.
“진… 그를 쳐낸 이유 자체가 거짓이란 얘길세. 나와 황제가 꾸민 계략이었지.”
“그게 무슨……. 무슨 이유로 그런 짓을 했단 말인가?”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서.”
“그 약속은 우리도 알고 있네. 그래서 다들 협조했던 것 아닌가.”
“그랬었지. 하지만 황제는 귀환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었네. 애초에 우리 모두를 죽일 생각뿐이었지.”
이해할 수 없던 카론의 자백은 미처 몰랐던 비화로 이어지고 있었다.
장장 28년이란 세월을 담아.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귀환하는 방법을 찾아냈네.”
카론은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혹시 그 방법이라는 게 저건가?”
대답하던 루즈는 손을 뻗어 게이트를 가리켰다.
그리고 카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걸로 뭘 어떻게 한다는 건가. 설령 저길 넘어간다 해도 이어진 곳은 마계 아닌가?”
반문하는 루즈의 얼굴이 화를 못 이겨 구겨졌다.
귀환 따위가 뭐라고.
지금 화가 나는 건, 관심조차 없던 이 문제로 인해 자신이 쌓아 올린 모든 게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게이트를 조작해 마계를 이 땅에 완전히 연결시키는 거지. 그러면 시공이 비틀리게 되고, 비틀린 틈으로 연결된 세계선을 찾을 수 있게 되는 거라네.”
그런 루즈의 감정을 어찌 알겠나.
“그럼…….”
“그래, 지구도 당연히 연결돼 있다.”
아랑곳없는 카론은 들뜬 목소리로 자신이 이룬 성과를 자랑했다.
“귀환하고 나면 이곳은 어떻게 되는가.”
“마계로 변하겠지.”
“허허… 그렇다면 곤란한데. 나는 여기가 꽤 마음에 든단 말일세.”
자신의 입장을 설명한 루즈는 정색하며 카론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멈추게.”
단호한 말투로 경고하듯 얘기했다.
하지만 카론은 고개를 저었다.
무겁게 내려앉은 분위기가 차갑게 변해 갔고.
“잡아라.”
짧은 루즈의 명령에 감색로브의 사내는 포박 마법을 실행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주인인 카론에게.
“흠, 괜한 짓을 하는 군, 루즈.”
“미안하네. 나는 이곳에 남을 생각이서 말이야……. 자네가 하는 짓을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네.”
턱짓하는 루즈를 보며 감색로브의 사내는 포박을 강화시켰다.
“정신 분열 마법인가.”
“비슷한 거라고 할 수 있겠지. 자네의 오른팔은 이제 주인의 곁으로 돌아가지 않을 걸세.”
“역시 루즈 자네의 마법은 참으로 흑마법스럽단 말이지. 하지만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군.”
“아니, 그럴 순 없을 것 같네. 자네를 살려 둬선 안 될 것 같거든.”
“진심인가.”
“진심일세.”
“알겠네. 그럼 나도 멈추지 않겠네.”
각오를 전한 카론은 가만히 서서 루즈를 바라보았다.
무얼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루즈는 카론을 무시한 채 바스코에게 신호를 보냈다.
싱글거리며 다가오는 바스코.
핏빛의 검을 뽑아 든 녀석은 카론의 목을 향해 칼날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그 순간.
퍼엉!
곁에 있던 사마르의 머리가 폭죽처럼 터져 버렸다.
“어라? 이 영감이 무슨 짓을 한 거야.”
비산하는 뇌수를 보며 바스코는 의뭉스레 물었다.
“금제다. 워낙 탐욕스러운 놈이라 오래전에 걸어 두었지. 네놈의 머리도 곧 저렇게 될 테니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무슨 개소리를, 네놈이 언제…….”
그러나 바스코는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카론에겐 그럴 기회가 있었으니까.
“이제 생각나는가. 너를 소환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카론은 하찮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바스코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것은 도박일 뿐.
카론은 소환자들에게 금제를 사용한 적이 없었다.
실수로 그들이 죽게 되면 자신의 목표가 그만큼 늦어지기 때문이었다.
“젠장.”
하나 바스코는 보기 좋게 걸려들었고.
“이제부터 시공을 비틀 것이다. 더 많은 마족들이 쏟아져 나올 테니 재주껏 막아라. 그게 네가 살길이다.”
“퉷!”
거칠게 침을 뱉으며 핏빛의 검을 거둬들였다.
“카리프, 그대도 마찬가지다. 사라센을 얻고 싶다면 나부터 지켜라.”
할 말을 마친 카론은 게이트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 * *
“어, 저게 뭐지? 저놈들은 누구야?”
전투 중인 나의 시선에 잡힌 건 게이트로 들어가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었다.
식별 가능한 표시가 없는 병사들.
분명 몬스터 사이를 걷고 있는데, 어쩐지 길이 열리는 느낌이었다.
무슨 술수를 부리는 건지 모르겠지만.
‘기왕 갔으면 틀어막아라.’
게이트만 처리할 수 있다면 정체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뭔가 잘못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저들이 게이트에 다가서는 순간.
기이이이이이잉―
귀를 울리는 굉음과 함께 반짝이던 경계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러났다.
호수 같던 게이트의 입구는 넘실거리는 붉은색으로 가득 채워졌다.
내 눈이 헛것을 보는 게 아니라면.
“마계…….”
거대한 아치 너머로 이어진 건 홍염으로 가득 찬 마계의 땅이었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