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우였다.
게이트는 소멸되지 않았고, 오천의 병사들은 모두 안전하게 반대편으로 넘어왔다.
오히려 이쪽으로 건너와서 더 소란스러워졌지.
인근의 몬스터들이 모여들면서 이곳은 때아닌 전투로 한바탕 난리를 피워야 했다.
거기에 해마저 떨어져 버렸으니, 두 배로 강해진 대수림의 몬스터들은 다수의 희생자를 만든 뒤에야 소탕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오래간만입니다, 반크스 경.”
“여기서 또 뵙게 되는군요. 반갑습니다, 빅터 공.”
인근에 있던 나의 부대는 정오에 이르러서야 이곳에 합류했다.
야영지는 사람으로 넘쳐 났고.
이제 부대 전체의 규모는 만 명으로 늘어 주력부대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거 부대의 면면이 예사롭지 않네요. 빅터 공에다 이반 공, 거기에 듀란 경까지 있으니 과히 대륙 최강의 군대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하하하!”
“반크스 경도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알브족과 반투족까지 있으니 이제 제대로 한판 붙어 볼 수 있을 것 같아 든든합니다.”
마주한 대륙의 두 전설은 일대를 가득 매운 병력을 보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왜 아니겠나.
“말하자면 올스타전 같은 거네요.”
겨울의 말을 빌리자면 각국의 최강들이 한자리에 뭉쳤다는 얘기였다.
물론 사라센과 카잔은 빠졌지만.
대륙 최강이 모여 있다는 사실만큼은 과장 없는 진실이었다.
“클레어 스승님까지 계셨으면 완벽했을 텐데요.”
아쉬워하는 테오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그 양반까지 왔다면 정말 끝내줬을 텐데.
그녀는 시작의 마을을 지키는 중책을 맡아 함께하지 못했다.
그곳의 안전 역시 중요하니까.
“당신이 고모님을 대신하면 되겠네.”
“아휴, 제가 어딜 감히.”
손사래를 치는 테오의 뒤로 정렬을 시작하는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곧 출정을 시작할 터.
“우리도 슬슬 준비하자고.”
나는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는 술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겨울에게 얘기 들었다. 그대의 복수를 끝냈다고.”
“어, 끝냈지.”
“기분이 어떤가.”
“잘 모르겠어. 뭔가 시원할 거라 생각했었는데… 막상 저지르고 나니까 개운하지가 않네.”
“죄책감인가.”
“아니. 그냥 허무한 느낌인 거야.
모든 점검을 마친 나는 쓰러진 고목에 앉아 별의 물음에 답했다.
과거를 찾던 여정을 함께하지 않았나.
누구보다 가까이 나를 지켜봐 온 별은 이해한다는 듯 침묵했다.
그 대신.
“큰 사건인데 뒤탈은 없는 건가.”
화제를 돌려 나의 안부를 걱정했다.
“괜찮아. 스벤이 먼저 날뛰어서 다 뒤집어썼거든. 마지막엔 목격자도 없었고.”
“다행이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지.”
우연에 우연이 겹친 결과를 떠올리며 나는 발치에 자란 풀을 잡아 뜯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이름 모를 들풀.
“이 싸움이 끝나고 나면 세상이 어떻게 변할 거라고 생각하나.”
별은 변화될 미래를 언급하며 그에 대한 나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글쎄, 일단 사라센은 사라지겠지.”
딱히 생각한 적 없던 주제에 나는 깊은 고민 없이 대답했다.
이유야 빤하지 않겠나.
가장 먼저 초토화됐으니, 인마 대전이 끝난 뒤 깃발만 꽂으면 되는 상황이었다.
“브라함도 큰 변화가 있을 거야. 아마 후계 문제로 꽤 시끄러울걸.”
브라함의 형편도 다르지 않았다.
황제는 비참한 죽음과 함께 쓸쓸히 사라졌고, 세자가 없는 브라함은 사라센과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그 말이 사실이었나 보군.”
“뭐가?”
“황제가 남색을 밝혔다는 것 말이야.”
“그런 소문이 있었어?”
“그러니 후세가 없는 것 아니겠나. 황후가 죽은 지 10년이나 됐는데 홀로 있는 걸 보면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고 할 수 있지.”
“흠, 그건 좀 이상하긴 해.”
“이치에 맞지 않는다. 남녀가 함께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가 아닌가.”
그럴듯한 별의 얘기에 어느덧 나는 끄덕거리고 있었다.
황제는 왜 홀로 지냈던 것일까.
후계가 없다는 건 꽤나 불안한 상황일 텐데 말이다.
“그대는 어쩔 생각인가.”
황제에게 향해 있던 별의 관심사는 갑자기 나에게로 넘어왔다.
“뭘 어째.”
“결혼 말이다. 설마 안 할 생각은 아니겠지.”
“뭐, 때가 되면 하지 않을까.”
뜬금없이 별의 질문에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결혼이라는 게 하고 싶다고 막 할 수 있는 그런 일이 아니잖나.
“카슈타르의 그 여인과?”
그제야 별은 정말 궁금했던 속내를 꺼내 놓았다.
“세속인들은 그런 여인을 좋아하더군.”
“보통은 그렇지.”
“그대도 그렇게 생각하나.”
“글쎄.”
그리고 나는 그에 대한 답을 명확하게 말할 수 없었다.
두근거렸던 순간이 있었음을 부정할 순 없었으니까.
단지 주어진 사건의 흐름이 상황과 맞지 않았을 뿐.
만약 평범한 시간의 연속이었다면…….
어쩌면 나는 지금의 질문에 명쾌한 답을 내렸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
“여자로서의 별은 어떠냐는 얘기다.”
녀석은 남녀의 입장으로 자신의 의미를 묻고 있었다.
당황스러운 얘기였지만.
이 질문에는 지금 바로 대답할 수 있었다.
나에게 있어 별의 존재란.
“등 뒤를 맡길 수 있는 사람이지.”
마주보는 것이 아닌, 같은 곳을 바라보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신뢰하는 동료이자 친구라 할 수 있는.
“그런 건가.”
별은 덤덤한 얼굴로 그런 나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런 말도 없이.
한참을 지켜보던 별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러고는.
“목숨을 맡기는 사이라… 그것도 나쁘지 않군.”
주먹 쥔 손을 뻗어 내 앞에 내밀었다.
툭―
두 사람의 주먹이 가볍게 맞닿는 순간.
“나의 등도 부탁한다.”
표정을 바꾼 별은 털털히 말하며 대검을 챙겼다.
그렇게 천천히 돌아 고개를 숙인 별은.
“납작한 걸 좋아했군.”
작게 홀로 중얼거리며 부족을 향해 걸어갔다.
* * *
아무리 봐도 신기했다.
오늘만 해도 수십 번을 넘게 봤지만, 로이드의 저런 모습은 볼 때마다 탄성이 절로 나왔다.
딱히 뭔가를 한 것도 아닌데.
털썩.
로이드에게 덤비던 몬스터들은 갑자기 주저앉아 잠이 들어 버렸다.
때로는 멍청히 서 있기도 했고, 아무렇게나 달리다 바위에 처박기도 했다.
마치 시력을 잃은 것처럼.
그렇게 로이드는 손쉽게 몬스터를 무력화시키며 목적지를 향해 다가갔다.
‘저게 도대체 뭐야.’
감색 로브의 사내는 마른침을 삼키며 로이드의 뒤를 따라 걸었다.
평범하지 않으니 흑마법이겠지만, 로이드의 저 마법은 신비로울 뿐이었다.
‘비폭력을 기반으로 한 절대 제압이라고?’
언젠가 했던 그의 말을 떠올라 사내는 또다시 감탄을 내뱉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표현이 아닌가.
손끝 하나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로이드의 적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쉬운 하나는 직접 끝내지 못했다는 것.
함께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가 걷는 모든 길에 죽음이 내려앉을 터였다.
“이제 멀지 않은 것 같구나.”
부쩍 늘어나는 몬스터를 지나며 로이드는 기분 좋게 말을 꺼냈다.
아니나 다를까.
멀리보이는 수풀 너머로 또 다른 무리가 밀려 나오고 있었다.
이렇게 개체수가 늘었다는 건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증거.
“저놈들만 넘어가면 메인 게이트다. 오래 걸어서 피곤하겠지만 조금 서두르는 게 좋겠구나.”
“네, 그렇게 하시지요.”
로이드는 발걸음을 재촉해 몬스터 무리 가운데로 들어섰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는 아찔한 광경이었지만.
“많기도 하구나.”
태연한 로이드는 산책이라도 나서는 듯 즐거워 보였다.
그사이 거리는 좁혀져 지척으로 다가왔고.
“슬리핑 필드.”
짧은 로이드의 음성과 함께 일대의 몬스터들은 선 채로 잠들어 버렸다.
* * *
새롭게 편성된 부대의 힘은 실로 막강했다.
최전방을 이끄는 빅터와 반크스, 그리고 나.
1이 3개가 모였지만, 결과는 3이 아니었다.
무게 중심이 넘어 버린 느낌이 있잖은가.
협력을 하지 않는 마족의 특성상, 띄엄띄엄 마주치는 놈들과의 전투는 우리의 압승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동시에 덤벼들면 될 것을.
희한하게도 마족들은 순서를 기다리듯 여유를 부렸다.
“자존심 같은 건가.”
곧 죽어도 놈들은 협공을 하지 않았다.
우리야 고맙지.
뿔 달린 마족을 제외하면 나머지 몬스터야 문제될 것 없었다.
듀란을 중심으로 한 용병이 반크스의 뒤를 따르고, 아케른의 주력들이 빅터와 함께 전장을 누볐다.
그런 전장의 중심에 나와 반투족이 있었으니.
아우우우우우우우―
광전사로 돌변한 반투족은 몬스터보다 더한 투기를 뿜어 대며 피를 찾아 날뛰고 있었다.
가뜩이나 호전적인 부족이 아니었나. 그런 그들의 특징이 펜리르의 하울링에 공명하며 극대화된 것이다.
어디 그것뿐일까.
반투족의 뒤를 따르는 알브족은 속도감 있는 공격 마법으로 원거리를 장악했다.
거기에 테오가 이끄는 마법 총 부대까지.
순수한 마족 부대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놈들이 우리 부대를 막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너무 잘 풀리는 거 아니에요?”
“그게 어때서. 잘 풀리면 좋지.”
괜한 걱정을 하는 겨울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대답했다.
오죽하면 이렇게 말하겠나.
인마대전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현 상황은 완벽하게 인간의 승리로 이어지고 있었다.
마치 이대로 끝날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런 장밋빛 환상은 마주한 게이트를 보며 퇴색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저 말도 안 되는 이상한 구조물.
“이게 다 뭐야?”
출입구라고 하기엔 그 높이와 넓이가 너무도 거대했기 때문이다.
몇 개의 성문을 이어 놓은 크기일까.
메인 게이트라는 마계의 입구는 거짓말 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최종 목적지라 이건가.”
그 장대한 크기에 압도된 것도 잠시.
크기를 살피던 나의 시선은 그 아래에 펼쳐진 또 다른 풍경에 할 말을 잊고 말았다.
그래.
이래서 인마대전이라고 했던 것이다.
인간과 마족이 엄청난 규모로 전쟁을 벌였기 때문에.
“우리 망한 것 같은데요…….”
겨울은 새까맣게 몰려나오는 놈들을 보며 말끝을 흐렸다.
잡스러운 몬스터는 더 이상 보이지도 않는다.
강한 축에 속했던 염소 머리 여인과 외눈 거인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고, 이제껏 보지 못한 대형 몬스터들이 게이트를 넘어오고 있었다.
심지어 와이번을 능가하는 각종 날아다니는 것들까지.
농담이 아니라 이제 드래곤이 튀어나와도 놀라지 않을 만큼, 메인 게이트 주변엔 기괴한 생명체들로 넘쳐 났다.
비관적으로 말하자면.
솔직히 해답이 보이지 않았다.
놈들의 규모도 놀라웠고, 처음 보는 녀석들의 크기도 엄청났다.
하지만 그 모든 걸 압도하는 절망적인 장면은 따로 있었는데.
“저게 다 마족이라고?”
게이트를 넘어온 놈들의 무리엔 수십이 넘는 마족들이 대형을 갖춰 모여들고 있었다.
말이 씨가 된다고.
마족으로만 구성된 부대가 눈앞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망했다고 한 거다.
우리 편에 있는 빅터와 반크스는 둘뿐이지만, 놈들에게는 바글바글 모여 있는 모두가 빅터이고 반스크인 까닭이다.
“지금이라도 후퇴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각 나오잖아요! 이대로 싸우면 몰살이라고요!”
비명 섞인 겨울의 외침에 나 역시 후퇴를 외치려 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이미 늦었어.”
날아오는 몬스터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