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콰가가가각― 콰쾅!
콰아아아앙!
귀를 찢는 폭음이 울릴 때마다 황궁의 벽들이 터져 나갔다.
서재에서 시작된 싸움은 황궁 내부로 번져 갔고, 궁 안 곳곳을 무너뜨리며 과격하게 타올랐다.
마치 공성 마법에 직격당한 듯.
와르르르―
콰드득!
캉! 카강― 쾅!
나와 황제가 지나는 모든 자리가 초토화돼 사라졌다.
도대체 한 나라의 황제가 어느 구석에 숨어 이런 실력을 연마한 걸까.
아무도 몰랐던 황제의 검술은 경지만 높은 전시용 무술이 아니었다.
수많은 실전이 녹아 있는 진검.
닳고 닳은 용병들처럼 황제의 검은 철저히 실리를 추구했다.
상대만 잘 만났다면 빛났을 것을.
“후… 어쩔 도리가 없군.”
거듭되는 스턴으로 인해 황제는 무력하게 쓰러지고 말았다.
아니, 스스로 검을 던져 싸움을 포기했다.
“농락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네. 그만큼 욕보였으면 이제 끝내 주게.”
할 수 있는 게 없었을 테니까.
무방비 상태의 1초가 어떤 의미인지 황제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의 농간에 희생된 이들에게 사죄해라. 그러면 고통 없이 보내 줄 테니까.”
그의 부탁을 쉽게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사죄라… 낯선 얘기로군.”
무너진 잔해에 기댄 황제는 두 눈을 감아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련해 하는 모습이려나.
“그럼 고통을 즐기시든가.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던 존중해 줄게.”
나는 대답 없는 황제를 보며 결정을 재촉했다.
마음속으로 정해 둔 시간이 끝을 향해 갈 때쯤.
“영욕의 세월이었네.”
눈을 뜬 황제는 낮은 목소리로 무언갈 말하기 시작했다.
“갖지 못한 자의 욕망이 만든 지옥이었지. 가끔씩은… 괜히 시작했나 싶어 후회도 하곤 했다네.”
그것은 회한.
부쩍 쇠약해진 그의 눈에선 위엄 뒤에 감춰진 고뇌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더 이상 무얼 말하겠나. 내가 죽어 그들을 만나거든, 그때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하겠네.”
그렇게 황제는 자신의 마지막을 나에게 맡겼다.
부러져 버린 팔을 붙잡은 채.
지쳐 버린 삶에 휴식을 청했다.
“…….”
무슨 말이 필요할까.
이 빌어먹을 인연의 끝을 위해 나는 해머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거기까지.
“어쩔 생각이냐.”
등 뒤로 들려오는 빅터의 음성에 모든 것이 멈춰 버렸다.
“대답하면 말리실 건가요.”
“말린다면 멈출 생각이냐?”
“아니요.”
단호하게 이어진 나의 대답에 빅터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천천히 걸어 황제 앞으로 다가서서는.
“불충을 용서하십시오. 머지않은 시간에 다시 만나게 되면, 그땐 온전히 충심을 바치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말없이 지켜보는 황제 데드릭.
돌아선 빅터는 복도 너머로 사라졌고.
“이제 끝내 주게. 나도 그만 쉬고 싶다네.”
나는 황제에게 마지막 안식을 선사했다.
그런데 왜.
왜 나는 이렇게 후련하지 않은 걸까.
과거의 은원은 끝났건만, 나의 시간은 여전히 멈춰 있는 것만 같았다.
툭툭―
돌아 나오는 나의 어깨에 투박한 빅터의 손이 올라왔다.
다독이듯 전해지는 울림.
“큰 짐을 덜었는데 가벼운 느낌은 아니군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아서일까요?”
곁에 서 있던 그레이시는 먼 곳을 바라보며 심경을 전했다.
그 역시 사건의 당사자인데.
정리할 기회를 주지 못한 것에 내심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복잡한 감정도 잠시.
“이런 말씀드리기 좀 그렇지만, 당장 이곳부터 빠져나가야 할 것 같아요.”
에스카는 베르에게 온 메신저를 내밀며 긴박한 상황을 알렸다.
“무슨 일인데 그러는 게냐.”
“사라센의 마족들이 이쪽으로 남하하고 있다고 하네요.”
“흠,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려나 보구나. 우선은 시작의 마을로 이동해 대책을 마련하도록 하자.”
내용을 확인한 빅터는 철수를 준비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가야 할 장소가 생겼으니.
“메인 게이트라는 게 열렸네요.”
나는 지도를 펼쳐 새로운 표시를 들여다보았다.
* * *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자리.
카리프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 검집에 돌려 넣었다.
달리 눈여겨 볼만한 일도 아니었다.
싸움을 끝낸 검사라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과정이니까.
“매번 그런 불편한 짓을 반복하는군.”
“네놈 일이나 신경 써라.”
“그러고 싶은데 워낙 거슬려서 말이야. 그런 비효율적인 행동을 보니 답답해서 견디기가 힘드네.”
하지만 바스코는 그런 카리프를 보며 비아냥거렸다.
그에게 있어 무기란 휴대가 아닌 분신일 뿐.
스르르 흩어지는 핏빛 검을 바라보며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그만들하고 이리 와 보게.”
으르렁대는 두 사람을 향해 사마르는 작게 고갯짓을 했다.
“바로 이동해야 할 것 같으니 채비를 서둘러 주게.”
“목표가 드러난 건가.”
“그래. 놈이 찾아올 장소가 생성됐네.”
사마르는 굳은 얼굴로 카리프의 질문에 답했다.
“그거 잘됐군. 화풀이 할 곳이 필요했는데 말이야.”
“그래. 로이드를 보거들랑 내 몫까지 대신 부탁하네. 하지만 지금은 출발 준비부터 해야겠군.”
“나야 늘 준비돼 있지. 명령만 내리라고.”
으쓱거리는 바스코에게 사마르는 가벼운 미소를 보내며 돌아섰다.
멀지 않은 거리니 서두르면 내일 중으로 도착할 터.
사마르는 내일 있을 재회를 앞두고 생각을 정리했다.
질문을 추린다고 해야 하나.
이런 재앙을 불러일으킨 이유부터 시작해, 자신을 속여 온 시간들을 묻고 싶었다.
그런 사마르의 생각을 읽기하도 한 듯.
“로이드를 만나면 어쩔 생각인가.”
남아 있던 카리프는 사마르의 계획을 물었다.
“우선 이유를 물어야겠지.”
“그 다음은?”
“괘씸죄를 적용해 처단해야 할 테고.”
“또 그 다음은.”
“수습할 방법이 있다면 상황을 정리하고 미래를 도모해야겠지.”
연이은 질문에 답한 사마르는 흐름을 바꿔 카리프에게 물었다.
“모든 게 끝난다면 자네는 무얼 할 생각인가.”
“사라센을 가질 것이다.”
“흠,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나에게도 나눠 줄 의향이 있는가?”
“허튼 수작만 부리지 않는다면 먹고살 영지는 허락하지. 옛정이 있으니까.”
“그거 고맙군. 노후를 의탁할 영지 정도는 있어야 나도 수지가 맞을 테니까.”
실없는 웃음을 보낸 사마르는 바삐 움직이는 병사들을 보며 또 다른 상념에 빠졌다.
무너진 세상에서 나는 어떤 미래를 찾으려는 걸까.
무시당하지 않는 삶.
손가락질 당하지 않는 삶.
루즈라는 이름으론 불가능했던 평범한 삶.
“일단은 이 난리부터 막아야 뭐든 가능할 것 같군.”
사마르는 씁쓸한 얼굴을 한 채 카리프의 곁을 지나갔다.
* * *
황궁의 전투는 이제 탈출이 목표가 되었다.
지키기에는 이미 마지막 선을 넘어 버린 상황.
수도를 지키던 군대는 괴멸을 향해 가고 있었고, 제국의 심장 레반도르는 화마에 휩싸여 지옥으로 빠져들었다.
“생존한 병사들이 곳곳에서 저항 중입니다. 거둬서 함께 탈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레이시의 한마디로 시작된 구조 작전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나 판단은 냉정하게.
구할 수 있는 병력에만 집중해 흩어진 병사들을 규합해 나갔다.
그렇게 모여 커다란 흐름을 만들고, 그 흐름은 또 다른 병사들을 흡수해 퇴로를 개척했다.
“먼저 나가세요!”
후위에 남은 나는 추격해 오는 마족을 막기 위해 커다란 신전 앞에 멈춰 섰다.
높게 솟은 첨탑을 향해 천벌을 내질렀고, 신전의 벽을 허물어 길가로 무너뜨렸다.
폭발하듯 퍼져 나가는 회색의 먼지구름.
콰르르르르르―
연기 자욱한 붕괴의 현장을 벗어나 일행이 사라진 길을 향해 뒤돌아 달려 나갔다.
길가에 보이는 거대한 건물들을 모조리 쓰러뜨리며.
쿠쿵―
마족의 추격을 늦추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심지어 지나온 모든 길을 뒤집어엎었으니, 나의 등 뒤로 펼쳐진 풍경은 엄청난 잔해로 뒤덮인 폐허의 연속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고.
“이쪽으로 들어가면 네가 말한 장소로 이동하게 된다는 것이냐?”
“네. 방금 메신저로 확인했어요. 같은 색상으로 표시된 게이트가 서로 이어진 거라고 하네요.”
레반도르를 나온 우리는 한적한 평원에 멈춰 다음 행선지를 정했다.
“흠, 그렇다면 내일은 도착할 수 있겠구나.”
“특별한 일이 없다면 그렇게 되겠죠. 대수림에 남아 있는 저의 부대도 그 근처에 있으니 시간 맞춰 합류시킬게요.”
끄덕이는 빅터를 보며 나는 펼쳐진 지도를 접어넣었다.
일련 번호라고 했나?
베르가 전해 준 내용에 따르면 모든 게이트에는 고유의 번호가 있다고 했다.
여러 가지 문자와 숫자가 복잡하게 뒤섞인 형태로, 마지막 문자가 같은 것이 서로 연결된 구조였다.
이런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던 건.
“농장에서 구출한 여인이 큰일 하네요.”
“그러게 말이다.”
로이드와 시스템 창을 공유한다던 이세계 여인의 능력 때문이었다.
참으로 특이한 능력이다 싶긴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빨리 갈 수 있으면 좋은 거지.
경로를 변경한 우리는 해가 질 무렵에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설마 이번에도 사라지는 건 아니겠지.”
“모르는 일이죠.”
일렁이는 게이트를 바라보며 겨울과 나는 혹시 모를 사태를 염려했다.
그냥 몇 사람 훌쩍 넘어가는 거면 상관없겠는데…….
지금 모여 있는 인원은 무려 칠천 명이 넘기 때문이다.
빅터와 함께 처음부터 움직였던 병사가 천 명.
그리고 주인을 잃은 황궁의 병사들이 합류해 이곳은 칠천에 이르는 군인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거기에 탈출에 성공한 수많은 민간인들까지.
“이미 부대를 이끌고 넘어갔었잖아요.”
나는 지금, 소멸될지 모를 게이트에 대해 걱정하는 중이었다.
“그땐 게이트가 사라진다는 걸 생각하지 않았잖아. 그러니 편하게 움직였지.”
어떤 일이 벌어질 줄 알고 그랬겠나.
없어지는 걸 미리 생각했다면 그렇게 느긋하게 이동하진 못했을 것이다.
“어쩌겠어요. 별일 없길 바라야죠.”
그에 겨울은 콧등을 찡긋거리며 털털하게 대답했다.
결론은 일단 넘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고민한들 답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래도 용케 그 지옥을 빠져나왔네요.”
“겨우 이만큼만 빠져나왔지.”
마음 같아서야 겨울의 말에 동조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구하지 못해 버리고 온 병력만 해도 수만에 이를 것이고, 목숨을 잃은 시민은 그 몇 십 배에 이른다.
“자책하지 마세요. 그 많은 마족들 사이에서 이만큼이나 살린 건, 그나마 아저씨와 빅터 할아버지가 있어서 가능했다고 생각해요.”
“…….”
“진짠데. 그러니까 좀 더 자랑스러워하셔도 좋을 것 같아요.”
겨울의 위로를 받으며 마음의 짐을 벗는 나는, 병사들을 모아 다음 계획을 진행했다.
“따로 추려 낸 이천 명의 병사들은 살아남은 시민들과 함께 시작의 마을로 이동한다.”
“저희들끼리 무사히 도착할 수 있겠습니까? 중간에 마족이라도 또 만나게 된다면…….”
“시작의 마을 방향은 마족이 없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이미 빠져나왔잖은가. 레반도르에 모여든 마족들이 이 일대에 있던 놈들이다. 그러니 토착 몬스터들만 경계하면서 이동하면 문제없을 것이다.”
반신반의하는 병사에게 나는 확신 가득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게이트가 사라져 분단될 경우에도 시작의 마을로 이동한다.”
혹시 모를 사태까지 정리한 뒤 게이트를 넘기 시작했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