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목숨 99개-196화 (196/203)

196화

수도로 향하는 빅터의 얼굴엔 불안함이 짙어졌다.

평원에 가득한 흔적들이 가리키는 건 오로지 하나.

눈에 밟히는 모든 증거들이 수도를 향해 이어지는 까닭이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전투 흔적들이 너무 많네요.”

여기저기 구르는 병사들의 사체가 이곳에서 벌어진 일들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브라함 병사들의 시신이 이곳에 있다는 건,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다는 명확한 증거였기 때문이다.

“결국 스벤이 나온 모양입니다.”

“어리석은 것.”

가라앉은 그레이시의 말에 빅터는 씁쓸한 표정으로 탄식했다.

사실 나도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다.

저것이 왜 문제가 되는 건지 말이다.

적이 나타났으니 싸우는 건 군인의 본분일 텐데, 빅터와 그레이시는 그런 스벤의 행동을 마뜩찮게 생각했다.

“외부의 보고를 접했다면 충분히 눈치챘을 텐데 뭐 하러 나왔을까요.”

“욕심이 많은 인간이니 참을 수 없었던 게지.”

두 사람이 말하는 대화의 요지는 이것이었다.

전투를 피할 순 없었겠지만, 굳이 먼저 싸움을 찾아다닐 필요는 없지 않는가.

마족들의 목표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나야 뭐…….’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고 다녔으니 그런 건 몰랐지.

마족들의 행동 패턴 같은 건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느긋하게 쫓을 상황이 아닌 것 같구나. 서둘러야겠다.”

정황을 파악한 빅터는 얼마 남지 않은 레반도르를 향해 박차를 가했다.

* * *

황궁에 들어선 스벤은 순찰 중인 경비병을 불러 세웠다.

“노번 재상은 지금 어디 있는가.”

“폐하의 서재에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재상의 행방을 확인한 스벤은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 아닌가.

황명에 저항한 순간, 스벤에게 남은 선택지는 죽음뿐이었다.

역적이 되어 처형당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하지만 스벤의 선택은 모두가 함께 죽는 공멸이었다.

어차피 이 황궁도 마족의 손에 잿더미가 될 터.

스벤은 마지막 가는 길동무로 재상과 황제를 낙점했다.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서재에 도착한 스벤의 앞을 젊은 경비병이 가로막았다.

“비켜라.”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이셨습니다.”

서걱―

두 번은 없었다.

망설임 없이 휘둘러진 스벤의 검은 경비병의 목을 단번에 베어 버렸다.

그 곁에 있는 경비병 또한 마찬가지.

“커어억…….”

흉갑이 관통된 병사는 피거품을 뿜어내며 힘없이 주저앉았다.

쾅―

서재의 문이 날아갔다.

활짝 열려 버린 문틈으로 놀란 재상의 얼굴이 보였고, 오른편 책상 앞으로 무표정한 황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 순간조차 흐트러지지 않는 저 얼굴이라니.

“이게 뭐하는 짓이오?!”

큰소리로 외치는 재상의 목소리가 스벤의 시선을 불러들였다.

그래. 우선은 네놈이 먼저지.

스벤은 흠칫거리는 재상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허… 폐하의 앞이오! 검을 거두고 썩 물러가시오!”

호기롭게 말하는 노번 재상.

하지만 로브 속에 감춰진 그의 두 다리는 두려움에 떨리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네놈의 그 입.”

눈앞으로 올라온 스벤의 검 끝에 재상은 기겁을 하며 고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검날에 가로막혔고.

“그 잘난 주둥이가 늘 거슬렸었다.”

마른침을 삼키던 재상의 입은 가로로 찢어지며 크게 벌어졌다.

“끄어어어어억!”

벌어진 볼 사이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발작하듯 날뛰며 얼굴을 감싸 쥐어도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피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당신을 볼 때마다 난 늘 이런 생각을 했었지… 나불대는 그 입을 찢고, 저 재수 없는 눈알을 파 버리고 싶다고 말이야.”

“크흐흑…….”

“오늘에서야 그 바람을 이루게 되는군.”

스벤은 손을 내밀어 노번 재상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공포에 질린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쑤욱―

“끄아아아아아아아악!”

날카롭게 버려진 검 끝을 푸른 눈동자에 천천히 밀어 넣었다.

움찔거리던 경련마저 멈춰 버린 순간.

“앞으로 사람을 볼 땐 눈빛을 주의하는 게 좋을 거야.”

스벤은 검을 거두며 황제를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생각했다.

저 얼음장 같은 얼굴이 겁에 질리면 어떤 모습일까.

과연 저 인간에게 그런 감정이 있긴 한 걸까.

흔들림 없던 군주의 모습이 오늘만큼은 역겨웠다.

“왜 그러셨소.”

“무얼 말이냐.”

“귀찮게 말장난하지 맙시다. 어차피 들어줄 기분도 아니니까.”

동요 없는 황제를 보며 스벤은 손을 휘적거렸다.

사실 이제와 이유를 듣게 된들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소? 뭐가 그리 못마땅해서 전시 중에 보직을 해임했느냐 이 말이오.”

“그게 궁금한 건가.”

“조금은?”

“차라리 모르고 죽는 게 나았을 텐데.”

황제는 그조차도 쉽게 얘기할 마음이 없는 듯했다.

무표정한 얼굴에 서린 작은 미소는 분명히 비웃음이었으니까.

“멍청해서 그랬네.”

기다림 끝에 나온 대답은 고작 이런 이유였다.

“재밌군. 아주 재미있어. 반평생을 바친 충성이 이렇게 멍청한 짓이었다니. 이거 너무 재미있는 일 아닌가!”

“재미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 두지.”

“데드릭 폰 케이사르!”

격분한 스벤의 목소리가 떠나갈 듯 서재를 울렸다.

도대체 무슨 대답을 듣고 싶어서 질문을 했던 걸까.

작은 변명이라도 기대했던 스벤은 허탈한 마음에 헛웃음을 흘렸다.

끝내자.

이 빌어먹을 나라도 끝내고, 주인 행세하는 저 개새끼도 여기서 끝내 버리자.

‘그리고 미련한 나도.’

스벤은 회한 서린 검을 들어 황제의 목덜미에 들이댔다.

얇게 맺히는 붉은 피.

오러조차 필요 없는 이 하찮음에 스벤은 허망하게 낭비한 시간을 애타게 그리워했다.

이대로 손을 잡아당기면 모든 것은 끝이 날 터.

끝내기로 마음먹은 스벤은 목을 겨눈 검에 힘을 실어 사선을 그었다.

하지만 황제의 목은 멀쩡하기만 했고.

“쿨럭…….”

오러에 쌓인 얇은 검이 스벤의 목젖을 관통했다.

피싯 거리며 뿜어져 나오는 붉은 선혈.

울대를 부여잡은 스벤은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또 한번 헛웃음을 흘렸다.

황제가 오러 유져였다니.

지나간 30년이 덧없어 스벤은 손에 쥔 검을 집어던졌다.

그와 동시에 스벤의 목은 수평으로 그어진 황제의 검에 힘없이 잘려 나갔다.

초점을 잃은 눈이 바닥으로 처박히던 순간.

“이 인간, 부하를 죽이는 게 습관인가 보네.”

황제 데드릭은 난데없이 등장한 목소리에 눈을 치켜뜨며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체격에 검은 머리… 익숙한 얼굴의 이 남자는 이전에 보았던 빅터의 제자가 분명했다.

이 시점에 그가 왜 이곳에 있는지도 의문이었지만.

“그래서 내 아버지도 죽인 건가. 쓸 만큼 다 써먹어서?”

해머를 들쳐 맨 남자는 알 수 없는 소릴 늘어놓으며 사나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 * *

“묻잖아. 내 아버지도 그래서 죽인 거냐고.”

스벤의 목을 벤 황제는 나의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하기야 내가 누군 줄 알고 대답을 할까.

“28년 전에 말이야. 내 아버지 하나로도 부족해 만삭인 어머니까지 죽이라고 시켰잖아. 기억 안나?”

나는 친절히 설명을 곁들여 황제의 기억을 상기시켰다.

“뭐라는 건가. 내가 너 같은 놈의 아비를 어찌 안다고…….”

짜증스레 반문하던 황제는 하던 말을 멈추고 나의 눈을 마주했다.

이쯤 되면 눈치채야지.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를 말하는 건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설마, 네놈이.”

인정할 수 없어 애써 부정하고 있을 뿐.

“그래, 서자 따위를 황제에 올려 준 훌륭하신 분의 아들이지.”

치부를 드러낼 용기 없는 자에게 나는 과거를 소환해 들이밀었다.

“진… 그리고 미리암. 네놈이 쓰다 버린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이다.”

표정 없던 황제의 얼굴에 감정의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할 말을 찾는 걸까.

굳게 다문 입술이 보일 듯 말 듯 작게 떨리고 있었다.

“그랬었군. 어쩐지 낯설지 않은 느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 다들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고 하던데 용케 알아봤네.”

“진과 같은 인종은 대륙에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어미를 닮았다곤 해도 조금은 남아 있었던 게야.”

세월을 되돌아간 황제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의미를 알 순 없지만.

“반갑단 말은 다음에 하는 걸로 하고…….”

사죄할 생각이 없다는 것쯤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짐에 대한 그대의 건방진 태도를 역심으로 받아들이면 되겠나?”

“좋을 대로.”

“죗값은 사형이네.”

“나와 같은 판결이군.”

황제 데드릭은 검을 바로잡아 오러를 휘감았다.

보이는 오러는 대략 7성.

하지만 그게 끝은 아니었나 보다.

“그대의 재주가 뛰어나다고 하니 짐도 그에 걸맞는 대우를 해 주도록 하지.”

짙푸른 오러는 더욱 예리해져 백광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이런 실력을 감추고 있었네. 8성이나 되는 양반이 왜 이런 방구석에 숨어 있던 거야.”

“이 자리가 본래 그런 자리다. 밑천이 드러나면 모든 걸 잃게 되지.”

“오늘이 그날이겠군.”

“천만에.”

짧게 답한 황제는 검기를 뿌리며 거리를 좁혀 왔다.

나는 광역 강타로 접근을 차단했고.

콰아아아아아앙!

커다란 폭발과 함께 황제는 서재의 벽으로 처박혔다.

물론 그것으로 죽진 않았을 터.

부서진 벽을 밀어내며 황제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왜 그랬나.”

공격을 대신한 나의 질문에 황제는 물끄러미 시선을 보냈다.

한참을 그대로 서 있더니.

“오늘 이유를 묻는 사람들이 많군.”

옷자락에 묻은 먼지를 털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대의 아비가 죽은 이유를 묻는 건가?”

“당신이 살아 있는 이유가 궁금한 건 아니니까.”

“흠… 그거라면 대답은 간단하네. 그들의 운명이 그랬기 때문이지.”

흐트러진 머리칼을 넘긴 황제는 덤덤히 대답을 이어 갔다.

반쯤 열린 창문을 바라보며.

“언제였더라.”

기억을 더듬는 말과 함께 말하지 못했던 얘기를 꺼내 놓았다.

* * *

데드릭 폰 케이사르.

혼외로 들여온 반쪽짜리 혈통에게 왕궁의 사람들은 친절과 멸시를 동시에 선사했다.

앞으로 드러난 왕족의 예우 뒤에는 늘 수군거림이 뒤따랐고.

“세자 저하의 보위를 위해 데드릭 왕자를 없애야 합니다.”

그의 죽음을 바라는 자들로 들끓었다.

아비가 있었으나 자식을 돌보려 하지 않았으니.

데드릭은 바보 흉내를 내며 어린 목숨을 연명했다.

처절한 복수를 꿈꾸며.

아주 천천히 조금씩.

성인으로 성장한 데드릭은 타고난 지략과 언변으로 자신의 편을 늘려 갔다.

특별할 것 없는 세자와 영민한 서자.

데드릭의 본 모습을 알게 된 정치인들은 암암리에 모여들어 새로운 세상을 그렸다.

썩어 빠진 기득권을 밀어내어 국가의 기반을 다시 세우자!

개혁을 바라던 이들을 등에 업고 데드릭은 정치판에 모습을 드러냈다.

지지 기반이 잡힌 데드릭의 성장세는 놀라웠다.

추진하는 모든 일마다 크나 큰 성공을 가져왔고, 선왕의 신임은 더욱더 커져만 갔다.

하지만 빌어먹을 그의 혈통은.

“세자를 바꾸시다니요! 왕가의 적통이 아닐 진데 어찌 가능하겠나이까. 아니 되옵니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네놈들이 그렇다면 바꿀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주마.’

하여 데드릭은 위기에서 기회를 찾았다.

신들의 맹약.

인류의 재앙이 될 인마 대전을 통해 이세계인이란 결정적인 한 수를 손에 넣게 되었다.

그들을 통해 자신의 정적을 해치우고, 제국의 건설이란 패업으로 정당성을 확보했다.

하지만 이 과업에는 커다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으니.

“너무 많은 이들이 소환되었습니다. 소환된 자들을 모두 죽이지 않으면 인마 대전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모든 위업을 완성하기 위해선 그들의 희생이 불가피했다.

* * *

“그래서 모두 죽였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 제국을 위해서니까.”

기억을 풀어낸 황제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마지막 변명을 전했다.

대의를 위한 희생 같은 뭐 그런 것들을 말이다.

“개소리를 더럽게 길게 하네.”

하지만 그 대의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나.

“네가 죽게 생겼으니까 남을 이용한 거잖아. 애초에 이빨을 드러낸 것도 너였고.”

심지어 그는 결말을 알고 있었음에도 소환을 계속해 자신의 야망을 실현시켰다.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그래 봤자 밥그릇 싸움 아니야? 정치 싸움에서 밀린 놈과 혈통에서 밀린 놈이 모여 복수전을 한 거 아니냐고.”

그러니 결론은 유죄.

“너희들끼리 단물 빨아먹고 버린 걸 개혁이라고 말하면 안 되지. 그리고 하나 착각하는 게 있는 것 같은데 말이야.”

“…….”

“최초의 소환자만 남아 있었다면 지금의 사달은 일어나지 않았어. 네놈의 야망이 이 재앙을 만든 거라고.”

나는 움켜쥔 해머에 원기를 넣어 황제를 조준했다.

말없이 검을 들어 올리는 데드릭.

“다시 시작하자. 사라센도 작살났는데, 브라함이라고 못할 것 없잖아.”

말을 마친 나는 황제의 얼굴을 향해 해머를 내리쳤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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