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별의 주도로 게이트가 부서지는 사이, 나는 다음 목적지를 확인하기 위해 지도를 펼쳐 들었다.
하지만 나의 계획은 시작부터 틀어졌으니.
“역시 없어졌네.”
“뭐가?”
“게이트. 시간이 많이 지나면 자동으로 사라지나 봐.”
목표로 했던 게이트는 이미 사라졌고, 그 대신 다른 게이트가 새롭게 표시돼 있었다.
“거리가 제법 되네. 부지런히 가야 오후 중에 도착하겠어.”
위치를 확인한 나는 다음 목적지를 향해 이동을 서둘렀다.
다섯 시간쯤 달렸을까.
쉬지 않고 이동한 부대는 다음 장소에 도착했다.
중간에 한차례 전투를 치렀지만, 별다른 피해 없이 여정을 계속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여유 있네요. 위험한 상황도 없는 것 같고.”
긴장감 없는 전투에 겨울은 편안한 분위기로 소감을 전했다.
물론 실제로도 그렇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적의 구성이 수월했던 탓이었다.
“마족이 없어서 그래. 진짜 마족 섞여 있으면 그때부터가 큰일이지.”
각자 노는 느낌이랄까.
마족이 나타났던 전장에서도 놈들은 큰 시간차를 두고 등장해 집중 공격을 받았다.
협력을 해 왔다면 상황이 크게 달라졌을 텐데 말이다.
어쨌거나 덕분에 우리는 수월하게 작전을 진행했고, 게이트가 소멸되기 전에 이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행이 아직 멀쩡하네.”
건제한 게이트를 확인한 나는 상황을 정리하며 다음 과정을 준비했다.
“제가 먼저 들어갈 테니 반크스 님과 듀란 님은 바로 따라오세요.”
“알겠네.”
“그렇게 하죠.”
“건너편 상황이 어떻지 전혀 알 수 없으니 바로 전투에 투입된다고 생각하셔야 할 겁니다.”
“걱정 말게. 단단히 준비시켜 넘어갈 테니까.”
거듭된 나의 당부에 반크스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느긋하게 대답했다.
곁에 있던 듀란 역시 슬쩍 웃어보였고.
“부족장은 남아서 게이트를 파괴하고, 지도에 내 위치가 표시되면 거기로 와.”
“알겠다.
“만약 오는 길에 다른 게이트가 있다면 상황 보고 알아서 처리해.”
“의논이 필요하면 메신저를 보내도록 하지.”
뒤처리까지 맡긴 나는 겨울과 에비오를 데리고 게이트를 넘었다.
한데 뭔가 이상하다.
이쯤 되면 떠올라야 할 익숙한 문자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 대신 다른 의미를 품은 글이 나의 눈앞을 어지럽혔는데.
[게이트 유지 시간이 다되어 비활성 상태에 들어갑니다.]
떠오른 시스템 문자는 결과를 예측하기 힘든 내용을 전하며 조금씩 흐려지고 있었다.
비활성 상태라니.
그러면 어떻게 된다는 거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이에 밝게 빛나던 통로가 좁아지기 시작했다.
사라져 간다는 얘기다.
“젠장!”
다급한 마음에 몸을 써 보지만 소용없었다.
이대로 있다간 공간에 갇혀 오가지도 못하게 될 터.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흔들며 어떻게든 방법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바깥세상과 이어진 통로는 이제 닫히기 직전에 이르렀고.
[맹약에 따라 마계 진입이 거부되었습니다. 인간계로 추방됩니다.]
실낱같은 빛마저 사라질 때쯤, 기다렸던 문자와 함께 공간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내동댕이치듯 빨려 나간 자리.
“하…….”
“우와…….”
“허억!”
뒤를 돌아본 세 사람은 사라지는 게이트를 보며 각자의 감정을 표현했다.
바꿔 말하자면 죽을 뻔했네.
뭐, 그 정도로 이해하면 맞지 싶다.
어쨌거나.
간발의 차이로 빠져나온 나는 시선을 돌려 주위를 살폈다.
일단은 허허벌판인데… 느낌이 뭔가 이상했다. 대수림 분위기가 아니다.
평범한 시골길 같다고 해야 하나.
지도를 펼쳐 본 나는 멍청한 표정으로 두 눈을 깜빡일 수밖에 없었다.
내 눈이 정상이라면.
“여기 브라함인데?”
우리는 수도 인근에 위치한 슈테른에 와 있었기 때문이다.
대수림 북부 게이트에 들어섰는데, 나와 보니 브라함 남서부였다.
순간 맑은 종소리가 울려왔고.
[게이트가 닫혔는데 무사한 건가?]
메신저엔 안위를 묻는 부족장의 글이 적혀 있었다.
그에 나는 간단하게 우리의 상황을 전했다.
[괜찮아. 그런데 여기 브라함이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정말 브라함으로 표시되는군. 우린 어떻게 해야 하나?]
[반크스 님과 함께 가까운 곳부터 하나씩 정리해.]
[알겠다.]
메신저를 통해 해야 할 일들을 전달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지도를 펼쳐 인근 게이트 현황을 확인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 하나.
인근에 생성된 게이트는 없으나, 범위를 넓히면 이미 몇 개가 열려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의 시선을 잡은 건 따로 있었다.
“어, 스승님도 이 근처에 계신 것 같은데.”
시작의 마을로 향했을 빅터의 표시가 나와 같은 지역에 겹쳐 있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표식이 이상하더라니.
목을 길게 빼고 주위를 둘러본 나는 머지않아 익숙한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과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
그 곁을 달리는 여인의 모습은 내가 알고 있는 그들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빅터와 그레이시, 그리고 에스카.
뒤로는 천 명 규모의 병사들이 대형을 갖춰 따라오고 있었다.
“네 녀석이 어찌 여기에 있는 게냐?”
“그러게 말이에요. 스승님이야 말로 왜 이쪽에 계세요? 시작의 마을에 가셨잖아요.”
빅터와의 재회는 서로의 위치를 탓하는 걸로 시작됐다.
그렇게 자조지종을 주고받은 결과.
“게이트에 직접 들어갔다는 얘기냐?”
황당해하는 빅터의 얼굴을 보며 또 다시 설명을 이어 가야 했다.
인간은 마계에 넘어갈 수 없고, 게이트끼리 서로 연결된 공간이 있다는 것을.
그 모든 내용을 설명한 후에야 비로소 빅터는 주변의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어진 흔적을 보니 서쪽으로 향한 것 같구나.”
“그쪽이면 수도가 있는 방향 아닙니까. 설마 그쪽으로 갔을까요?”
“글쎄다. 일단 따라가 봐야 알 것 같구나.”
대화를 나눈 빅터와 그레이시는 주변을 정리하고 말 위에 올랐다.
목표는 어지러운 흔적을 쫒아 놈들의 행방을 알아내는 것.
“서두르자.”
우리는 기울어 가는 해를 마주보며 넓은 평원을 달려 나갔다.
* * *
“좌측 방어선이 무너졌습니다!”
심장을 옭죄는 소식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더 이상 결정을 망설였다간 퇴로마저 장담할 수 없는 상황.
이토록 절망적인 형태의 전투가 된 것은 단지 병력 차이에서 오는 압박이 아니었다.
‘마족이 너무 많아.’
무리에 한두 명만 있어도 난전으로 치닫거늘, 사방에서 모여든 적의 군세만큼 등장한 마족의 숫자도 많았다.
아니, 유달리 많다고 하는 게 옳겠다.
굳이 이유를 분석하자면.
크고 작은 무리가 합쳐진 탓일 수도 있고, 이번 침공 자체에 마족의 참여가 늘어난 까닭일 수도 있다.
이유야 무엇이 됐건 중요한 것은 하나.
“퇴각한다!”
이제는 정말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치욕스런 뒷수습 따위 지금은 잊을 수밖에 없었다.
이 많은 대군의 목숨을 헛되이 낭비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결사 항전을 하기엔 때와 장소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전방에 또 다른 적이 나타났습니다!”
“우측으로 우회한다.”
“측면은 공간이 없습니다! 유일한 활로는 정면뿐입니다!”
“제길…….”
결단을 내린 스벤은 선두로 나섰다.
일이 이 지경이 된 것은 강력한 장수가 없던 탓이 아니었나.
비록 빅터와 비견할 순 없다 해도 그 역시 7성의 무인이었다.
“일점으로 돌파한다!”
명령을 내린 스벤은 최전방에 서서 적진으로 내달렸다.
짙푸른 오러를 전신에 두르고 마주하는 적들을 향해 몸을 던졌다.
콰가가가각!
예기가 서린 스벤의 검기에 몬스터들의 몸이 양단되어 날았다.
뚫린다.
이 앞에 있는 적의 무리엔 다행스럽게도 마족이 보이지 않는다.
“더욱 속도를 높여라!”
희망을 발견한 스벤은 병사들을 독려하며 활로를 열었다.
끈질기게 가로막던 적의 공세를 밀어내고, 마침내 스벤의 군대는 마족의 군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총사령관님, 이대로 계속 가면 수도입니다. 자칫하다간 황궁마저 위험에 처할 수 있습니다!”
“하면 어디로 간단 말이냐!”
스벤은 목적지를 변경하지 않았다.
이 시국에 가장 중요한 거점이라면 당연히 수도일 터.
“제국군의 중추인 우리가 있어야 수도의 전력을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다!”
스벤은 행군의 당위성을 주장하며 수도를 향해 말을 달렸다.
그렇게 퇴각하길 수 시간.
수도에 도착한 스벤은 그대로 말을 몰아 외성문을 넘었다.
그러고는 성벽 위로 뛰어올라 행렬의 후미를 살폈다.
상황이야 말해 뭐 하겠나.
“세상에…….”
성벽 위에 늘어선 병사들은 겁에 질린 탄식을 내뱉고 있었다.
밀물에 쫓기는 것 같은 아군의 뒤에는 마족의 군세가 파도처럼 이어져 있었다.
성문을 닫는 시기를 놓치면 수도의 방어마저 위태로워질 만큼.
“성문을 닫아라.”
결국 스벤은 남은 병사들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드드드드드드득―
거대한 도르래가 움직이며 묵직한 소리를 토해 냈다.
“이게 뭐야! 아직 못 들어온 병사들이 많단 말이다!”
사정을 모르는 병사들은 아우성을 치며 앞선 병사를 밀어 댔다.
이대로 가다간 몰살이다.
어떻게든 저 문을 넘지 않으면 의미 없는 개죽음으로 까마귀 밥이 되어 사라질 게 빤하다.
죽음을 목전에 둔 병사들은 광기 가득한 눈으로 앞사람을 잡아채기 시작했다.
“나와! 길 막지 말고 나오라고!”
밀려 넘어지는 병사들이 속출했고, 남은 병사들은 그들을 짓밟으며 앞으로 나갔다.
처절한 아비규환의 현장.
쿠우웅―
두꺼운 철문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무심히 나눠 버렸다.
“오늘 성문 경계 더크 맞지? 나야! 나 루크라고! 나만 좀 들여보내 줘!”
쪽문 앞에 선 루크라는 병사는 작은 틈에 얼굴을 대고 처절하게 소리쳤다.
“너 뒤에 있는 거 다 알거든! 너희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내가 장례 다 해 드렸잖아. 기억 안 나?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다며! 지금 갚으라고 개새끼야!”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고.
드드드드드드드득―
성문을 보호하는 겹문이 또다시 내려오고 있었다.
* * *
“저 무능한 인간을 그대로 놔두실 생각입니까.”
보고를 접한 재상은 무감정한 말투로 황제에게 물었다.
이 사달을 염려해 출정을 반대했건만, 기어코 고집을 꺾지 않더니 엄청난 재앙을 몰고 와 버렸다.
애초에 그릇이 부족했던 인사가 아니던가.
황궁에 속하길 거부한 빅터가 아니었다면 총사령관이란 자리는 꿈조차 꿀 수 없던 그였다.
이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 때.
“빅터 공이 돌아올 때까지 스벤을 보직 해임하시고 렌달 경을 임시 사령관에 올리소서.”
재상은 덤덤하게 스벤의 처우를 청했다.
그에 황제는 천천히 끄덕이며 시선을 돌렸다.
* * *
성벽을 지휘하던 스벤의 뒤로 한 무리의 군인들이 험악하게 다가왔다.
“바쁜데 무슨 용무인가?”
“황명입니다.”
“황명이라니? 무슨 내용인가.”
짜증을 내던 스벤은 감정을 거두고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총사령관 스벤 자우어는 지위에 걸맞지 않는 중대한 실수로 제국을 위기에 빠뜨린 바, 보직을 해임하고 추후 통첩이 있을 때까지 대기를 명한다.”
한데 이건 무슨 소리란 말인가.
황명을 접한 스벤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손끝을 치켜들었다.
“뭐라? 지금 뭐라고 지껄인 것이냐? 보직 해임이라니. 네놈이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어딜 황명을 사칭해 개소릴 지껄이는가!”
스벤은 노성을 지르며 황제의 칙서를 빼앗아 들었다.
“이런 개 같은 일이…….”
떨리는 손으로 펼쳐 든 칙서에는 황제의 옥쇄가 선명히 찍혀 있었다.
패전의 대가가 경질이라고?
고작 한 번인데?
치밀어 오는 허탈함에 스벤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껴야 했다.
이제껏 사라센을 정벌했던 공로는 다 어디로 가고, 한 번의 패배로 모든 걸 앗아갈 수 있단 말인가.
머릿속을 채우던 허탈함은 어느새 배신감과 분노로 바뀌어 천 갈래로 날뛰기 시작했다.
도저히 통제할 수 없을 만큼 위태롭게.
“그래서 후임은 누구에게 맡기기로 한 건가.”
“접니다.”
“하, 렌달 자네가? 네까짓 게 감히?”
“그 점은 스벤 공이 걱정할 사항이 아닌 것 같군요. 협조하지 않으면 체포할 수밖에 없으니 험한 꼴 당하지 말고 순순히 돌아가시지요.”
“험한 꼴이라…….”
말끝을 흐린 스벤은 검을 뽑아 들었다.
이 시점에 내쳐졌다면 미래야 불 보듯 빤한 것 아니겠나.
“그럴 재주가 있다면 해 봐라.”
오러를 발산한 스벤은 검을 휘둘러 전령의 목을 베어 냈다.
“황명을 거역하다니! 뭣들 하느냐! 대역 죄인을 당장 채포하라!”
황급히 외치는 렌달의 명에 성벽은 아수라장으로 돌변해 버렸다.
하지만 렌달은 한 가지 큰 사실을 간과했다.
스벤 역시 7성의 무인이라는 것.
빅터의 그늘에 가려졌을 뿐, 그의 실력이 출중하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누구의 짓이냐.”
“재, 재상님께서… 커억!”
원흉을 확인한 스벤은 곧장 렌달의 목을 뚫어 버렸다.
그 능구렁이가 기어코 이빨을.
재상의 이름을 되뇐 스벤은 성벽을 내려와 성문 개방 장치를 작동시켰다.
드드드드드드득―
묵직한 기계음이 성문 주위로 퍼져 나갔고.
“오냐, 오늘 다 같이 죽자.”
분노에 잠식당한 스벤은 황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