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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99개-194화 (194/203)

194화

“게이트가 열리게 된 배경이 그 맹약이라는 것 때문이다?”

“네. 인과율이라는 법칙이 있는데, 그것이 인간계에 더 많이 누적돼서 마족이 침입할 권리를 얻은 거죠.”

“흠, 꽤나 복잡한 이면이 있었군그래.”

“신들이 맺은 약속이니 평범하진 않겠죠. 아무튼 그런 이유로 인간은 마계로 넘어갈 수 없는 거예요.”

그제야 반크스는 의문을 거두며 개운한 표정을 지었다.

궁금했던 것이다.

어째서 마족은 이 땅에 들어오고 우리는 넘어갈 수 없는 건지.

그리고 왜 다른 공간으로 튀어나오는지 말이다.

“같은 자리로 되돌아가지 않는 건 일방통행 구조라 그런 것 같아요. 일단 들어왔으니 이어진 다른 공간으로 쭉 직진해 버리는 거죠.”

나는 겨울과 나누었던 추론을 바탕으로 마지막 질문까지 깔끔하게 정리했다.

“그걸 알아냈다는 게 더 신기하군요. 도대체 그곳에 들어갈 생각을 어찌 한 거요?”

“우연히 알게 됐어요.”

“그래도 그렇지… 아휴, 저 너머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면 오금이 저리는군요.”

함께 듣던 듀란은 고개를 저으며 진저릴 쳤다.

왜 아니겠나.

나라고 좋아서 들어간 게 아니었으니 저 기분이 어떤 건지 잘 알고 있다.

겨울이 빨려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시도조차 해 보지 않았을 테니까.

하여간 나는 쏟아지는 질문에 답하며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게이트의 숨겨진 기능을 처음 알게 된 장소.

겨울이 빨려 들어갔던 마계의 입구가 우리의 새로운 목표였다.

“저기 뭐가 날아오는데요?”

순탄했던 부대의 이동은 겨울의 손끝을 따라 멈추게 되었다.

흰색과 잿빛이 섞인 거대한 새.

창공을 맴돌던 녀석은 우리를 향해 하강을 시작했다.

철컥―

듀란의 방패를 선두로 주변에 있던 마법 총이 조준을 마쳤다.

반사적인 그 움직임에 감탄이 나올 법 하지만.

“무기 거두세요.”

나는 듀란의 앞으로 나서 상황을 진정시켰다.

배달부라고 해야 하나.

유려한 선을 그으며 활강하는 저 새는 베르가 보낸 알바트로스라는 녀석이었다.

아니, 새의 눈을 공유한 베르라고 봐도 될 것이다.

어쨌거나.

낮게 스쳐간 알바트로스는 작은 가죽 꾸러미를 바닥에 떨궜다.

근처에 있던 병사가 주워 빠르게 가져왔고, 짐을 넘겨받은 나는 묶어 둔 포장을 풀어 내용물을 살펴보았다.

“지도인가.”

꾸러미 속에 들어 있던 건 여분의 메신저와 새로운 지도였다.

그리고 간단히 적혀 있는 편지도 함께 동봉되어 있었다.

내용은 말 그대로 간단했는데.

[게이트 출몰 위치입니다.

새로 나타날 때마다 바로 알려 드릴 테니 감지기 설치는 중단하세요.]

펼쳐본 지도에는 아치 모양의 그림이 여러 위치에 표시돼 있었다.

발견하지도 않은 게이트를 어떻게 찾아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향하고 있는 목적지의 위치마저도 정확하게 그려져 있었다.

“이런 건 또 어떻게 만들었대.”

나는 신통한 베르의 능력에 감탄하며 지도를 접어 넣었다.

무슨 재주를 부렸는지 몰라도 덕분에 해야 할 일이 크게 줄어들었다.

이제 표기된 장소로 이동하기만 하면 될 뿐.

행군을 재개한 나는 속도를 올려 대수림을 가로질렀다.

* * *

“전방 1㎞ 지점에서 몬스터 무리 발견, 규모는 2,000마리! 구성은 전원 짐승형 몬스터라고 합니다!”

“진행 방향은?”

“목적지는 아직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정찰 결과를 접한 스벤은 부관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역시나 불특정 다수를 향한 공격인 것 같습니다.”

“특별한 목표가 없다는 말인가?”

“그렇게 보입니다. 사라센에서 마주했던 놈들과 달리 이번에 나타난 녀석들은 이동 방향에 일관성이 없습니다.”

“흠, 내 생각과 일치하는군.”

“네. 이렇게 흩어졌을 때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매끄럽게 이어지는 부관의 답에 스벤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원하던 말만 골라서 하니 곁에 두길 잘했다 싶은 것이다.

“역시 시국을 읽는 눈이 출중하군. 나가서 출병 준비시키게.”

“신속하게 마치겠습니다!”

큰 소리로 답한 부관은 잰걸음으로 농가를 나섰다.

홀로 남은 스벤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모두 피난을 가고 텅 비어 버린 마을.

사라진 주민을 대신해 병사들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번에 확실하게 자리매김해야 한다.’

오가는 병사들을 보며 스벤은 다짐했다.

이번 작전을 통해 빅터의 그림자를 벗어나리라.

허울 좋은 총사령관의 자리를 반석 위에 올리고픈 스벤이었다.

그 역시 듣는 귀가 있기 때문이었다.

규모는 거대하지만 강력한 한방이 없는 부대.

스벤이 이끄는 제국군은 빅터와 같은 거물이 없다는 것이 커다란 약점이었다.

이제껏 그가 한일이라곤 차려진 식탁에 앉아 포크와 나이프를 쥐는 것뿐.

사방으로 흩어진 마족의 부대는 그런 갈망을 채우기에 최적의 상황을 제공하고 있었다.

‘보여 주지. 내가 어떤 인간인지.’

돌아선 스벤은 장비를 챙겨 농가를 벗어났다.

* * *

느리다.

답답하다.

행군을 유지하는 동안 내가 느낀 감정은 단 두 가지였다.

이렇게 먼 거리가 아니었는데.

다음 목적지로 향하는 경로는 생각보다 더디고 느리게 느껴졌다.

“펜리르가 심심하겠어요.”

오죽하면 겨울마저 이런 소릴 꺼내겠나.

함께 이동해야 할 병사들로 인해 행군 속도는 대폭 줄어들었다.

그들 역시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펜리르의 기동력을 따라오는 건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하지만 전면전을 선택한 이상 부대와 함께 이동하는 건 당연할 터.

조급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대형을 이끌었다.

그렇게 인고의 시간이 흐르고 흘러.

“저기 오네요.”

풀숲을 가르며 달려오는 풍 형제의 모습이 나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오는 길에 특이점은?”

“없었다.”

“게이트는 잘 처리했지?”

“처리랄 게 뭐있나. 그냥 가루를 만들어 버리고 왔다.”

도착한 부족장은 간단히 상황을 전했고, 목적지인 게이트로 모두 함께 이동했다.

이곳에 출몰한 마족의 병력은 대략 2만 명 이상.

하지만 우리는 놈들과 마주치지 못했다.

“이미 다른 곳으로 갔나 보네요.”

지난 회 차와 마찬가지로 이곳의 게이트가 조금 더 빨리 개방된 까닭이다.

“이제 어쩔 생각인가?”

“모두들 게이트를 통해 다음 장소로 이동할 겁니다. 이곳은 제가 부수고 따라갈게요.”

“자네 혼자?”

“네. 다음 게이트까지 거리가 멀지 않아서 저 혼자 이동하는 게 훨씬 빠를 겁니다.”

넘어가는 게이트에도 마족의 무리는 없을 테니 굳이 큰 부대를 남길 이유는 없는 것이다.

하여 게이트를 통한 대규모 이동이 다시 시작되었고.

“영 내키지 않는군.”

“사악한 마기로 가득 찬 곳이 아닌가! 들어가면 영혼을 빼앗길 지도 모른다!”

자신들의 순서가 다가온 부족장과 술은 고개를 저으며 완강히 거절했다.

하기야 마기라면 질색을 하는 녀석들이니까.

“하찮은 네놈의 영혼 따위 마족도 관심 없을 게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별은 미간을 찌푸렸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술을 향해 말했고.

“무슨 헛소릴 지껄이는가! 숭고한 반투족의 영혼을 욕되게…….”

“그놈의 전통 타령 지겹지도 않나. 세상과 사람이 매일 변해 가는데 언제까지 미신 같은 소리에 매달려 있을 건가.”

별은 온갖 전통을 들먹이며 스스로를 속박하는 부족의 관습을 비판했다.

“미신이라니!”

“그게 아니면 뭐란 말인가. 먼저 저곳을 지나온 이반은 영혼이 없어서 이렇게 멀쩡하냔 말이다.”

“그건 저 녀석이 이상한 놈이라 멀쩡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상한 건 너와 우리 반투족이다. 늘 그렇게 작은 세상에 갇혀 바깥을 볼 생각을 안 하지.”

부족원을 둘러본 별은 시선을 돌려 게이트로 향했다.

그대로 걸어 일렁이는 아치 앞에 다가서더니.

“나는 앞으로 나갈 것이다. 변화가 두려운 놈들은 이곳에 남아 이반의 발목이나 잡아라.”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게이트 너머로 사라졌다.

무거운 침묵이 주위를 잠식했다.

자조적인 별의 행동을 원망하는 이도 없었고, 쉽사리 움직여 동참하는 이도 없었다.

이도저도 아닌 어색한 공기가 짙어져 가던 그때.

“별의 말이 옳다.”

부족장은 창대를 고쳐 쥐며 게이트 앞으로 다가섰다.

“변화에 적응하는 것은 수치도 아니고, 배신도 아니다. 그저 진화하는 것뿐, 우리는 변화를 받아들여 앞으로 나갈 것이다.”

결연한 표정으로 말을 마치곤 게이트를 지나 모습을 감추었다.

머리를 긁적이던 술도 마찬가지.

“젠장.”

녀석은 거친 푸념을 내뱉으며 게이트로 들어갔다.

그렇게 시작된 반투족의 이동은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이곳을 정리하고 뒤를 쫓아가는 것뿐.

콰아아아아아앙!

먼지로 변한 마계의 입구 앞에서 갱신된 문자를 바라보았다.

[긴급 성장 시스템 가동.]

맹약에 도전하는 자.

몬스터 사살 6,451/10,000.

게이트 파괴 3/3.

보상 : 모든 레벨 1증가.

이제 남은 것은 몬스터 처치 3,549마리.

게이트를 박살 낸 나는 펜리르에 올라 다음 장소로 달리기 시작했다.

“꺄하하하!”

박력 있는 펜리르의 질주에 겨울은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에비오는.

“끄어어어어어…….”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주위의 풍경이 뭉개지며 선으로 변해 가기 시작했고.

“아니 벌써?!”

나와 펜리르는 이제 막 대형을 갖춘 부대 앞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냈다.

* * *

“총사령관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또 뭐가 문제라는 거냐?!”

연이어 올라오는 전령의 보고에 스벤의 눈초리가 사납게 올라갔다.

분명히 완벽하게 적들을 소탕했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오히려 마족에게 둘러싸여 고립된 상황이 되고 말았다.

“놈들이 유인책이라도 썼단 말인가!”

하나둘씩 나타나던 소규모의 적들은 어느새 덩치를 불려 거대한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래서야 스스로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든 판.

그제야 스벤은 마족의 행선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애초에 목적지가 없었어…….”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놈들 말이다! 어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덤벼드는 모든 것이 목표였다는 게다!”

야전 테이블을 걷어찬 스벤은 분에 겨워 노성을 질렀다.

이 얼마나 오만한 작전이란 말인가.

다시 시작된 마족의 침공은 마주하는 모든 생명이 그들의 작전 대상이었다.

다시 말해 대륙 전체가 작전 목표인 셈이고, 그 모든 장소에서 작전이 시작됐다는 뜻이기도 했다.

동시 다발적으로.

아니, 동시 전역으로.

도대체 얼마나 강력한 군세가 있기에 이런 작전을 펼칠 수 있단 말인가.

짐작조차 되지 않는 적들의 규모에 스벤은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 일대만 해도 벌써 이 정도라니.”

대륙 전역에 나타난 마족이 모인다면 그 숫자가 얼마나 될 것인가.

사라센으로 모여든 마족까지 되돌아온다면 손쓸 수 있는 범위를 아득히 넘게 된다.

어쩌면 이미 끝나 버렸을지도…….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스벤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 갔다.

이곳에서 전선을 유지해야 할까.

아니면 적들을 유인해 수도와 먼 곳으로 끌고 가야 하나.

그 어떤 고민을 해 봐도 결국 같은 결론에 도착했다.

어딘가에서 싸늘한 시체가 될 거라는 결론으로 말이다.

초초해진 스벤은 막사 안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마치 정신 나간 사람처럼 한참을 헤매던 그가 생각을 멈췄을 땐.

“북쪽 숲에서 대량의 마족이 출현했습니다!”

“동쪽 평원의 적들도 근거리에 진입했습니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이 목전에 도착한 후였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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