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어리둥절함도 잠시.
새로운 전장에 들어선 반크스는 이내 정신을 다잡고 전투에 임했다.
그 곁에는 나와 듀란이 있었고, 겨울과 에비오는 펜리르 위에 올라타 뒤를 지키고 있었다.
전후방 모두가 든든하니 도망칠 필요도 없다.
날아오는 와이번도 마찬가지.
늘어선 마력 총이 뿜어내는 마법에 놈들은 곤두박질치며 요란하게 나뒹굴었다.
그중에 유독 눈에 띄는 놈이 하나 있었으니.
끼에에에엑―
남다른 체격을 가진 녀석은 겨울을 뜯어먹던 마지막 그놈이었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주둥이를 벌리며 날아오는 와이번을 향해 움켜쥔 해머를 내질렀다.
퍼어어어어엉!
날아오는 힘과 쳐내는 힘이 마주치며, 놈은 그 자리에서 폭발해 버렸다.
이렇게 간단한 걸 해치우지 못해서…….
겨울은 놈의 아가리에 조각조각 씹혀 넘어갔다.
그 게걸스럽던 와이번을 해치우지 못했던 건, 앞길을 막아서던 또 다른 놈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워지듯 다가오는 빠른 움직임의 마족.
그놈이다.
나의 목을 갈라냈던 검의 주인.
쫓을 수 없는 속도의 마족은 휘두른 해머를 피해 가볍게 등 뒤로 향했다.
나무랄 데 없는 훌륭한 움직임이었지만.
“천벌.”
나의 스킬은 이름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완벽하게 발동된다.
“크어어억!”
거대한 금빛 해머는 그 어떤 기척도 없이 놈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날은 내가 정신 줄을 놔서 당했지만, 오늘은 사정이 다르지.”
서늘한 냉소를 띄운 나는 다리를 저는 마족을 향해 느긋하게 다가갔다.
놈은 사나운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고, 나는 그런 놈을 겨냥해 천천히 해머를 들어 올렸다.
이어지는 삼신기 난타.
힘이 실리지 않은 가벼운 공격을 놈은 기회라고 생각했나 보다.
반격을 통해 활로를 개척하려 했던 모양이지만.
쩌엉―
놈은 눈을 부릅뜬 채 석상처럼 굳어 버리고 말았다.
몇 차례 이어진 공방 중에 다시 한번 정지.
그리고 또다시 정지.
[스턴 : 레벨 2.]
패시브 스킬.
둔기에 공격당한 대상은 20%의 확률로 행동 불능 상태가 됩니다.
유지 시간 1.2초.
레벨이 증가할 때마다 발동 확률과 시간 증가.
20%라는 건.
열 번에 두 번을 말하는 게 아니다.
말 그대로 확률일 뿐.
열개 중에 두 개라는 건 가장 처음과 그 다음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크헉?!”
콰앙―
“커헉!”
이렇게 말이다.
게다가 1.2초라는 경직의 시간은.
콰드득―
결정타를 터트리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적당히 화풀이를 끝낸 나는 또 다른 목표를 향해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시간의 흐름조차 잊은 채, 마주하는 모든 것들에게 평등한 죽음을 선사했다.
광기 가득한 벌판에 마침내 고요가 찾아왔고.
[긴급 성장 시스템 가동.]
맹약에 도전하는 자.
몬스터 사살 6,451/10,000.
게이트 파괴 2/3.
보상 : 모든 레벨 1증가.
게이트를 박살 낸 나는 다른 장소를 찾아 행군을 이어 갔다.
* * *
황제의 도시 레반도르.
브라함 제국의 상징인 황궁 카일룸은 변함없이 찬연한 모습으로 오후의 햇볕을 받아 내고 있었다.
기울어 가는 태양이 긴 그림자를 만들고, 커다란 창을 통해 들어오는 투명한 빛이 황궁의 회의실을 밝혔다.
“브라함 깃발을 꽂았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게 참 가시처럼 걸리는군요.”
“어차피 우리의 손에 멸망했을 나라가 아닙니까. 상황이 수습되고 나면 자연스레 저희 땅이 될 겁니다.”
재상과 마주앉은 스벤은 애써 태연하게 대답했다.
속이야 부글부글 끓지만 어쩔 수 없다.
눈앞에 있는 능구렁이 영감은 정치판의 일인자니까. 이제 막 군권을 잡은 스벤으로선 상대하기 껄끄러운 정적이었다.
“그래서 찜찜하다는 겁니다.”
“뭐가 그리 불편한 겁니까?”
“마족이 어떻게 행동할지도 모르니 이러는 것 아닙니까. 이길 수 있다는 확신도 없고요.”
“그 말은 꽤나 거북하군요.”
“거북할 게 뭐가 있겠소. 그게 사실인 것을. 과거와 지금의 형편이 다르니 현실을 직시하는 건 스벤 공의 역할이라는 거요.”
결국 스벤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달리 할 말이 없다.
배알이 꼴리지만 저 영감이 하는 말을 반박할 수가 없었다.
마족의 군세를 상대하는 건 쉽지 않았고, 그나마 가능했던 빅터와 그의 제자는 수습을 위해 대수림으로 향했다.
그러니 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기다림뿐.
스벤은 황궁 수비라는 명목하에 모든 병력을 레반도르에 집결시켰다.
쓴맛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사라센에서 복귀하던 스벤은 빅터가 없는 현실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상대 못할 건 아니었지만, 놈들의 군세가 약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마족들은 이미 사라센의 수도로 넘어간 상태였고, 남아 있는 마계의 생명체들은 염소 머리의 여인이나 외눈 거인이 전부였다.
잔당 수준이라 할까.
‘놈들의 숫자가 많았다면…….’
결과는 지금과 사뭇 달랐을 것이다.
좋지 못한 기억을 떠올리며 스벤은 얼굴을 구겼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제는 고개를 기울여 손끝에 이마를 기댔다.
‘물색없는 놈.’
저러니 빅터의 그늘을 넘지 못하지.
지그시 눈을 감은 황제는 어리석은 대화를 뒤로한 채 작금의 상황을 고민했다.
카론과 루즈.
정말 놈들 때문에 마계가 열린 걸까.
황제 데드릭은 빅터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미간을 문질렀다.
― 이세계인들은 지금도 소환되고 있습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빅터의 말에 거짓이 없다면.
뒤집힌 세상의 이유는 그들에게 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양측의 기울기가 어긋났을 때 인마대전이 시작되는 것이니까.
하면 침공한 마족은 누가 처단한단 말인가.
빅터와 그의 제자가?
거기에 클레어까지 보탠다고 해도 과거의 전력을 따라잡을 수 없다.
애초에 인원수 자체가 다르잖나.
연합군이라도 만들면 희망이 보일까 싶지만 그 또한 요원하다.
사라센은 이미 무너졌고, 다른 국가완 달리 교류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특사를 보내야 하는 걸까.
“쯧…….”
엉킨 실타래 같은 현실에 황제는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마족들의 목표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사라센 다음이 어디가 될지는 이제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돼 버렸다.
그 빌어먹을 땅에 머물러 주면 차라리 고맙겠는데.
“어쨌건 수도에 마족의 그림자가 들어오는 일을 없을 겁니다. 그러니 폐하께서는 마음 푹 놓으셔도 됩니다.”
근거 없는 스벤의 자신감에 황제는 짙은 한숨을 쉬며 감은 눈을 떴다.
저런 반푼이가 마족을 막을 리 없고.
결국 현실은 빅터와 그의 제자에게 기대를 걸어야 하는 상황이다.
한데 인마대전이 그리 호락호락 했던가.
그의 기억에 남은 마족과의 전투는 두 사람이 어쩔 수 있는 수준의 전쟁이 아니었다.
만약 그때와 비슷하다면…….
대륙의 멸망은 불 보듯 빤하다고 할 수 있을 터였다.
황제의 근심이 더욱 깊어지고 있는 그때.
“함부룩에 마족이 들이닥쳤다고 합니다!”
다급한 전령의 목소리가 회의실 가득 울려 퍼졌다.
비보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으니.
“또한 슈탈렌 인근에도 마계의 입구가 열렸다고 합니다!”
전령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황궁 바깥의 상황을 전했다.
“놈들의 진행 방향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말인가?”
“그런 건 아니지만 딱히 정해진 방향이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목적지가 없다?”
“네. 어느 마을은 그냥 지나치고, 어느 곳은 공격하고……. 대형도 여러 갈래로 나눠진 터라 아직 놈들의 동선이 파악되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흠…….”
전령의 보고를 받은 스벤은 침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런 스벤을 두고 재상이 입을 열었다.
“어쩌실 생각이오. 제 생각으론 놈들의 행선지가 드러날 때까지 기다려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그사이 백성들의 피해가 너무 크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무턱대고 덤벼들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무턱대고라뇨! 재상께서는 계속 제국군을 무시하시는군요. 비록 빅터 공이 없다고는 하나, 대륙을 대표하는 강군임은 분명합니다!”
“누가 약하다고 했습니까? 신중하게 결정해서 제국군의 피해를 최소화하자는 것이지요.”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 재상을 보며 스벤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런 식으로 언쟁해 봐야 돌아오는 건 비웃음뿐.
논쟁으로 재상을 이길 수 없다는 건 스벤 스스로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재수 없는 놈.’
분을 삼킴 스벤은 감정을 추스르며 말을 이어 갔다.
“재상의 말씀도 일리가 있으나 백성의 피해를 간과해서도 안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놈들의 군세가 나눠지고 있다면 오히려 기회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뭉치기 전에 각계 격파를 해야 합니다.”
“흐음, 저의 의견은 다르지만, 총사령관의 생각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말씀드렸다시피 수도에 마족이 들어오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스벤은 황제에게 예를 표하며 회의실을 나섰다.
물끄러미 지켜보던 황제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잠시 그대로 침묵을 유지하더니.
“마족을 없애야만 끝날 거라고 보는가.”
홀로 남은 재상에게 원론적인 질문을 던졌다.
“공생할 것이 아니라면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방법이라면 인류가 사라지는 방법도 있겠습니다만… 그것은 내키지 않으니 어쩔 도리가 없는 것 같습니다.”
돌아온 재상의 대답은 그야말로 정론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는 본질은 따로 있는 까닭이었다.
그것은 바로 인과율의 추.
인과율의 추가 기울어진 탓에 마계가 이어진 것이고, 기울게 된 이유는 소환자들 때문이다.
그러니 완벽한 해결책은 오직 하나.
“원인을 제거해야지.”
소환자들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해법이라고 생각했다.
과거의 영웅들이 그랬으니까.
황제 데드릭은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 이세계인을 계속 소환하면 안 됩니다. 자칫하면 인과율의 추가 역으로 기울 수도 있습니다!
바다 건너 넘어온 현자들은 필요 이상의 소환자를 경고했었다.
하지만 황제 데드릭은 소환 의식을 강제로 진행하였고, 7명을 추가로 소환해 신탁의 기사 8인을 구성했다.
덕분에 시작된 것이 본격적인 인마대전.
그만큼 소환된 이들의 면면은 특별했다.
국지전에 불과했던 마족과의 싸움은 이로 인해서 대륙 전체로 확전되어 갔다.
하여 계획한 모든 걸 이루었을 때, 데드릭은 마지막 남은 과제를 실행했다.
이세계인을 제거해 인과율의 추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 귀환을 빌미로 회유한 카론을 통해 소환자들을 일거에 소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몬스터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
황제가 된 데드릭은 그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모든 것을 끝냈다고 생각했지만, 세상은 계속해서 변해 가고 있었다.
이세계인이 사라졌음에도.
대수림은 이전과 다른 생태계를 만들며 마경으로 진화했다.
그 이유가 카론과 루즈였다니.
그들의 존재가 있었기에 맹약의 구현이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의 땅에 마계의 몬스터를 자생시키게 만든 원인.
빅터의 고변을 듣고 나서야 황제는 모든 걸 납득할 수 있었다.
그래서 사라센 출정을 허락했고, 카론과 루즈를 처단하라 명했다.
그들이 소환했다는 이세계인들 까지 모두.
“재상도 그만 나가 보시오.”
의자에 몸을 기댄 황제는 피곤한 표정을 지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