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수풀을 헤치고 나온 사람은 겁에 질린 에비오였다.
녀석의 마지막을 기억하는 나로선 이렇게 마주한 모습이 반갑게 느껴지기도 했다.
“사, 살려 주세요!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궁금하신 건 다 말씀드릴 테니 제발 목숨만 살려 주세요!”
물론 웃기기도 했고.
하여 나는 다른 방식으로 녀석을 대하기로 했다.
“에비오.”
“…네?! 제 이름을 어떻게.”
“지구에서 소환돼 로이드에게 버림받았고.”
“그, 그걸…….”
“뒤늦게 발탁돼 레이 형제와 날 죽이러 왔지.”
“하지만 그건……. 자, 잘못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눈치 빠른 에비오는 변명하길 포기했다.
녀석에게 있어 나는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상대가 아닌가.
하찮은 거짓말이 초래하는 결과를 에비오는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 죽어야지.”
“어억!”
“그렇게 버둥대다 빗맞으면 아프게 죽는다. 얌전히 있으면 금방 끝날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씁, 그러면 아프다니까.”
“제발… 아욱! 살려 주세요! 시키는 건 다 할게요! 제발! 우아아아아아아아악!”
털썩.
결국 에비오는 눈을 까뒤집고 기절해 버렸다.
조금 과하단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내가 이렇게까지 몰아붙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래야 뒤를 맞기지.”
이번 생에선 녀석에게도 마법 총을 넘길까 싶어서였다.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겠냐마는 적어도 무력한 죽음만은 피할 수 있기를 원했다.
“회귀할 때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보네요.”
“좋은 일로 죽진 않을 테니까.”
“하긴…….”
씁쓸히 말을 거둔 겨울은 기절한 에비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혹시 저 사람과 우리가 친해졌나요?”
“아니, 알아 가는 사이였다고 보는 게 맞을 거야.”
“그랬구나.”
가라앉는 분위기를 추스르며 나와 겨울은 에비오가 깨어나길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은 깨어났고.
“어어어어어어억!”
나의 뒤에 앉은 에비오는 비명을 지르며 매달렸다.
* * *
마력 감지기의 설치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어디에 설치했는지도 대강 알고 있으니, 두리번거릴 것 없이 전속력으로 대수림을 누볐다.
탐색을 시작한 지 반나절 만에 반크스가 전담했던 구간을 끝냈고, 미친 듯이 달린 삼일 째 날에는 대수림 동쪽 끝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 거리를 삼일 만에 주파하다니.”
말도 안 되는 펜리르의 속도에 나는 감탄을 넘어서 경악했다.
심지어 녀석은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이 기록을 달성했다.
이만큼 빠른 육상 생물체가 존재할까?
안 그래도 빠른 녀석의 질주는 겨울의 헤이스트 마법을 만나 한계를 넘어 버렸다.
“아직도 생생하네. 얘는 지치지도 않나 봐요.”
거기에 지치지 않는 체력까지.
휴식을 위해 멈춘 것은 녀석이 아닌 겨울과 에비오 때문이었다.
“오히려 앉아 있는 우리가 더 힘들어 하는 것 같네.”
“그러게 말이에요. 저는 아직도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아요.”
샐쭉한 겨울의 푸념에 에비오가 맞장구쳤다.
아닌 게 아니라, 나 역시 엉덩이가 얼얼할 지경이니 두 사람의 하소연이 엄살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저런 사정을 모두 받아 줄 수도 없었다.
이제 리베에 있던 인원들도 출발했을 터.
서둘러 달려가야 늦지 않게 약속 장소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먹어 둬. 이번에 출발하면 해 떨어질 때까진 계속 달릴 거니까.”
노릇하게 익어 가는 고기를 보며 협박하듯 말을 건넸다.
“하아…….”
그에 겨울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고, 에비오는 향신료가 섞인 소금을 고깃덩이에 정성껏 뿌리고 있었다.
대략 삼십분쯤 지났을까.
나는 완성된 바비큐를 뜯어 각자의 손에 하나씩 건네줬다.
남은 건 모두 펜리르의 차지.
익은 고기 아니면 쳐다보지도 안는다더니.
녀석은 편안하게 엎드려 느긋하게 고기를 뜯었다.
우리는 재잘대는 겨울의 수다를 반찬 삼아 식사를 모두 마쳤고, 어둠이 내릴 때까지 탐색을 이어 갔다.
다음 날.
예정보다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한 나는 기다리지 않고 다음 행동을 이어 갔다.
반투족이야 들어오기 싫어도 들어오게 될 테니까.
낮은 절벽에 다가선 나는 굵은 덩굴을 헤치고 동굴에 들어섰다.
결계석 매장지이자 거대한 지하 도시.
이곳은 소문만 무성하던 드워븐의 도시였다.
거기에 풍 형제들이 환장하는 얌얌이라는 뿌리식물의 경작지도 있고.
“뭐 하는 놈들이냐!”
안으로 들어온 나는 족장 욜란드의 환대를 받으며 말없이 해머를 치켜들었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
“오호라, 수십 년 만에 마주하는 하룻강아지군. 좋아, 상대해 주지.”
나는 으르렁대며 달려든 욜란드를 한방에 날려 버렸다.
“커헉?! 다, 다시!”
어떻게 졌는지 눈치챌 틈도 없게 말이다.
다시라는 외침이 세 번을 넘어 다섯 번에 이른 직후.
“내가 졌네. 드워븐의 이름으로 그대를 손님으로 예우하겠네.”
족장 욜란드는 왼쪽 가슴을 두들기며 정중하게 예를 갖췄다.
이후로 반투족과 함께한 반크스가 모습을 드러냈고, 그때처럼 욜란드는 나에게 마력 총을 넘겨 주었다.
이렇게 모든 준비는 끝났다.
딱히 달라질 것 없는 이곳에서의 일정은 지난 회 차와 마찬가지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반크스의 원망이랄까.
“돌아서는 모습이 어찌나 눈에 밟히던지……. 로제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네.”
지난번과 달리, 만나지 못하고 돌아간 로제의 소식을 이곳에서 듣게 되었다.
나 역시 아쉬운 건 마찬가지였지만.
“덕분에 우리 일이 꽤 많이 줄었다더군. 아무튼 나중에 녀석을 보거들랑 살갑게 부탁하네.”
우리의 계획은 빈틈없이 다음 단계로 이어지고 있었다.
* * *
변화된 이반의 행동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와 함께한 부대야 말할 것도 없지만, 먼 곳에 떨어져 있는 빅터도 이반으로 인해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것.
“저 여인은 좌표를 볼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빅터는 이미 농장에 감금된 소환자들을 구출해 온 상태였다.
“그 좌표라는 게 있어도 우리는 찾기 힘들 겁니다.”
“이유는?”
“좌표를 찾아가려면 현 위치를 알아야 하는데, 우리의 좌표를 모르니까요. 단순한 숫자만 가지고 찾아가는 건 어려울 겁니다.”
“흐음…….”
난색을 표하는 그레이시의 말에 빅터는 길게 침음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실마리다.
농장에서 구출한 여인을 통해 게이트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지만, 지도에 표시할 방법이 없다는 게 이들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해법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저… 제 생각이 맞는지 모르겠는데요. 게이트가 활성화되면 지도가 생기는 것 같았어요.”
대화를 지켜보던 여인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지도가 생겼다?”
“네, 하지만 그레이시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제가 있는 자리는 표시되지 않았어요.”
“흠, 그야 로이드의 시스템을 엿보는 것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겠군.”
턱 끝을 매만지던 그레이시는 베르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여인이 알려 준 위치를 이반에게 전해 줄 수 있겠나?”
“가능하긴 한데, 지도를 새로 만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 실시간으로 변경되는 내용을 적용할 수 있거든요.”
“흠, 나중에 전달하는 게 성가시겠군.”
“그거야 알바트로스를 이용하면 되니까요. 그것보단 저 여인이 보는 지도와 우리가 가진 지도가 일치하는지가… 이게 더 큰 변수일 것 같습니다.”
대답을 마친 베르는 새로운 지도를 꺼내 테이블 위에 펼쳤다.
주름진 부분을 팽팽히 잡아당기고는.
“이 지도라는 게 만드는 놈 마음이거든요.”
어깨를 으쓱이며 헛웃음을 지었다.
* * *
지하 도시를 나온 나는 반크스가 담당했던 북쪽으로 향했다.
그곳에 출몰한 마족을 소탕한 뒤 입구를 통과해 다른 장소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회귀 전에 머물렀던 마지막 장소.
겨울과 에비오에게 끔찍한 죽음을 선사한 그곳으로 다시 한번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물론 내 개인적 복수도 포함해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첫 번째 목적지는 한 사람에게만 기억된 비탄의 장소였다.
“본래 계획과는 다른 것 같은데? 세 부대로 나눠 움직이는 걸로 기억하네만.”
“지금 지나는 구간은 내가 이미 다 끝냈잖아. 첫 지점에 도착하면 나눠지게 될 거야.”
부족장의 의문을 해결해 준 나는 마계가 열릴 지점을 찾아 주위를 살폈다.
죄다 비슷한 평원이라 긴가민가했지만.
“저기다.”
일그러지는 공간을 보며 입구가 생성될 위치를 찾아낼 수 있었다.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던 공기가 아치로 굳어지는 사이, 부대는 커다란 포위망을 구축해 놈들의 출현을 기다렸다.
마침내 갈라지는 거울 같은 피막.
콰아아아아앙!
떨어지는 금빛 해머를 신호로 나의 인마 대전은 다시 시작됐다.
충분한 적이 모일 때를 기다려 아군의 공성 마법이 포위망 가운데를 직격했다.
흩어지는 놈들에겐 마법 총이 불을 뿜었고, 그마저 뚫고 나온 놈에겐 서슬파란 날붙이가 무자비하게 날아들었다.
그사이 입구엔 또 다른 무리가 넘실거린다.
준비를 마친 아군의 두 번째 마법 부대는 모여든 놈들을 가만 두지 않았다.
그 다음은 세 번째 마법 부대가.
하나로 뭉친 부대의 화력은 소수의 마족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막강했다.
반복되고.
또다시 반복된다.
일방적인 살육의 향연은 흐르는 땀조차 인색하게 만들었다.
“할 게 없네.”
머리를 긁적이던 술은 모호한 표정으로 전장을 바라봤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녀석이 활약할 만한 상황이 좀처럼 만들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 마족이 등장하면 달라질까 싶었지만.
쿠아아아아아앙―
콰가가가각!
나와 반크스의 협공 앞에 기회는 넘어오지 않고 있었다.
그만큼 전황은 순조로웠고, 단 한 번의 위기도 없이 완벽하게 침입을 저지했다.
하지만 진짜는 이제부터.
“나와 반크스님 부대가 이 입구를 통과할 거야. 모두 이동하고 나면 부족장은 이곳에 남아서 입구를 파괴해.”
“흠, 알겠… 잠깐?! 지금 저길 들어간다고 한 건가?”
“어. 아무 문제없으니까 다 때려 부수고 내가 알려 준 지점으로 최대한 빨리 합류하면 돼.”
“그게 무슨…….”
부족장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여전히 갸웃거렸다.
그런 반응이 어디 저 녀석뿐이었겠나.
“정말 저곳을 들어가려는 겐가?”
반크스를 비롯한 모든 병사들이 모두 같은 표정으로 내 얼굴만 바라보았다.
뭔 개소리야?!
같은 분위기를 뿜어내면서.
하지만 세상이란 게 그렇다.
아는 일만 하고 살 수도 없고, 모른다고 피할 수도 없다.
그러니까.
“일단 가시죠.”
“아니 이 사람이! 잠… 이보게 잠시만!”
칭얼대는 반크스를 잡아 마계의 입구로 밀어 넣었다.
이제 물은 엎질러졌으니.
“다들 신속하게 이동!”
크게 소리친 나는 일렁이는 거울을 향해 거침없이 뛰어들었다.
묘하게 느껴지는 익숙한 부유감.
다시 밝아진 세상으로 돌아온 나는 해머를 치켜들며 경계를 넘어섰다.
“허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먼저 도착한 반크스가 휘둥그레 탄성을 내뱉었고.
“본래 이런 용도로 만들어진 거잖아요. 우리도 이용해 먹어야죠.”
나는 해머를 들어 올려 천벌을 내리쳤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