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목숨 99개-191화 (191/203)

191화

무거운 어둠이 걷히며 한 줄기 빛이 내려왔다.

마치 물감이 번지듯.

점으로 시작된 밝음은 감각이 닿는 곳곳을 환히 비췄다.

이게 얼마 만에 다시 보는 숫자인 건지…….

92번 남았다는 시스템의 표시에 문득 아리송한 감정이 떠올랐다.

남아 있는 목숨이 많아서 좋아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7번이나 죽었다는 것에 화를 내야 하는 걸까.

회귀와 함께 떠오른 생각은 착잡한 심정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무슨 생각 하는 거예요. 빨리 가야 한다면서요?”

의뭉스레 바라보는 겨울을 보며 나는 저도 모르게 피식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엥, 생뚱맞게 갑자기 왜 웃어요.”

“그냥.”

“그냥이라고요? 방금 전까지 그 조바심을 내놓고? 이거 분위기 흐름이 전혀 맞지 않는데…….”

겨울은 새초롬한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이런 밝고 귀여운 아이가.

고작 일주일 뒤에 찢겨 죽게 된다.

“어, 또 어두워진다. 진짜 수상하네요.”

감추지 못한 나의 분위기에 녀석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그대로 고민을 하는가 싶더니.

“아저씨, 회귀했구나.”

이제야 알겠다는 얼굴로 얌전히 머릴 끄덕였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녀석의 죽음은 없던 것이 되었으니까.

지금 내가 해야 하는 건, 재잘거리는 겨울의 목소리를 사라지지 않게 지키는 것이다.

“알겠어요. 더 이상 묻지 않을 게요.”

겨울은 눈치껏 물러서며 나의 입장을 헤아렸다.

그에 나는 시선을 돌려 주변 상황을 확인했다.

일주일 전에 내가 있었던 장소라면…….

역시나 지금은 알브족과 함께 리베로 돌아온 직후인 것 같았다.

출정까지 남은 시간은 3일.

“숙소에 들어가서 짐 챙겨 와.”

“왜요?”

“출발하게.”

“벌써요? 아리안에서 아직 사람이 안 왔잖아요.”

“아직 안 왔으니까 먼저 가는 거야.”

이번 회 차에선 로제와 반크스가 도착하기 전에 사전 작업을 끝낼 생각이었다.

어차피 생성된 마계의 입구는 모두 파악돼 있고, 대수림 안에 몬스터가 없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니 이곳에서 시간을 낭비할 이유는 없을 터.

“으음… 알겠어요.”

겨울은 질문을 생략한 채 짐을 챙기러 숙소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시스템을 띄워 갱신된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복수의 거울.]

술자의 상태가 죽음을 목전에 뒀을 때 누적된 대미지를 상대에게 되돌려 줍니다.

대미지 축적 범위 : 스킬 발동 시점에서 10분 사이.

재사용 기간 100일.

“너 죽고 나 살자 이건가.”

살벌한 발동 조건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조건을 만족할 때까지의 과정이 선하게 그려지니 움찔할 수밖에.

하지만 비장의 한 수로 손색없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잘 이용한다면 대어를 낚을지도 모르겠고.

새로운 기술을 확인한 나는 목덜미를 문지르며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 * *

“재미있군…….”

대수림을 걷던 로이드는 뜬금없이 홀로 중얼거렸다.

그의 혼잣말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었다만.

“네? 무얼 말씀하시는 겁니까.”

쓴 웃음까지 짓는 로이드를 보며 감색 로브의 사내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에 보기 드문 모습이 아니던가.

저렇게 하는 걸 보면 분명 뭔가 다른 연유가 있을 터였다.

“그놈이 죽은 것 같구나.”

“그놈이라고 하시면…….”

“리의 능력을 가져간 녀석 말이다. 조금 전에 시간이 되돌아갔다.”

감색 로브의 사내는 뒤늦은 탄성을 뱉으며 이어질 로이드의 말을 기다렸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녀석이니 남다른 지침이 내려올 거라 예상했다.

“서두르자. 오늘 중에 도착하려면 빠듯할 것 같으니까.”

하지만 로이드는 아무런 언급도 없이 가던 걸음을 재촉했다.

“그 녀석은요?”

“이젠 필요 없다.”

심지어 무관심을 넘어 필요 없다는 말까지.

저런 모습을 보고 있자면, 로이드의 달라진 분위기를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다 상관없다는 느낌이랄까.

길을 떠날 때부터 예감했지만, 로이드에게 있어 능력자들은 더 이상 존재 가치가 없는 집단이었다.

그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건 오직 메인 게이트로 향하는 것뿐.

‘설마 나조차 버리는 건 아니겠지.’

감색 로브의 사내는 앞서 걷는 로이드를 보며 불안한 속을 삼켰다.

인간이라면 최소한의 도리는 있을 테니까.

그렇게 믿을 수 있는 건

죽음에 내몰린 카론을 구해 로이드란 신분을 만들어 준 것이 다름 아닌 자신의 아비인 까닭이었다.

그 모든 건 흑마탑의 부흥을 위함이었으니.

이세계에서 소환된 카론은 저평가된 흑마법에 희망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런 기대를 품고 가문의 모든 걸 바쳤는데.

로이드라는 사람의 목적은 시간이 흐를수록 결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 가게 되었다.

그가 추구했던 건 단 하나.

차원 이동이라는 놀라운 마법이었다.

감색 로브의 사내는 그런 로이드의 꿈이 허황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차원이 실존한다는 건 이미 소환자들을 통해 증명되었고, 인마 대전 또한 그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명백한 역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무엇을 탐구하느냐가 아니었다.

그것으로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로이드는 그가 살던 세계로 돌아가길 원했다.

그리고 함께할 자리를 약속했다.

― 나를 도와준다면 자네 역시 지구로 데려가 주겠네. 물론 자네가 원한다면 말일세.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로이드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들이 사는 세상의 문명은 이곳과 차원이 다른 까닭이었다.

하늘을 나는 마차와 화살처럼 달리는 이동 수단들.

로이드를 통해 접한 지구라는 세상은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던 고도의 문명이었다.

지식을 탐구하는 자로서 호기심은 당연한 것 아닐까.

사내는 로이드가 약속한 세상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그의 행적을 도왔다.

그런 노력의 결실이 이제 코앞에 다가온 것이다.

한데 때가 이르러 오자, 이 남자는 주위의 모든 것을 잘라 내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기대되고, 한편으론 점점 불안했다.

그의 성공을 의심치 않지만, 믿을 수 있는가는 또 다른 문제였다.

‘설마…….’

감색 로브의 사내는 고개를 저으며 잡념을 지워 냈다.

두 사람이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했으니까.

차원의 문을 여는 건, 한 사람의 힘으로 불가능하다 말했었다.

그러니 지금은 끝까지 믿고 따르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배신을 한다면…….

감색 로브의 사내는 넓은 후드를 당겨 자신의 표정을 감췄다.

* * *

차비를 마친 나는 부족장을 찾아 이후의 계획을 설명했다.

“이쪽으로 오라는 얘긴가?”

“어. 내가 먼저 가서 대충 준비해 둘 거야.”

“굳이 혼자 나설 필요가 있는가. 함께 이동하는 게 여러 면에서 안전하지 않을까 싶네만.”

“괜찮아. 지금부터 일주일간 대수림은 조용할 테니까. 그리고 나 혼자 가는 게 몇 배는 빠를 거야.”

“흠, 그야 그렇겠지만.”

힐끔 펜리르를 바라본 부족장은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풍 형제가 암만 빠른들 비교가 되겠나.

펜리르가 작정하고 달리면 대수림 횡단은 일주일 내 끝날 게 확실하다.

어쩌면 그보다 더 빨릴 끝날지도 모르고.

“그거 알아?”

“뭘 말하는 건가.”

“저 녀석, 이제까지 한 번도 전력 질주한 적이 없어.”

그늘에 누운 펜리르를 보며 나는 의미심장하게 말을 건넸다.

녀석은 언제나 참아 왔다.

늘 주위와 속도를 맞추며 달려왔고, 특정한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자신의 속력을 제어하며 걸음을 맞췄다.

그래서 이번엔 그 제한을 풀어 볼 생각이다.

녀석이 더 이상 달릴 수 없을 때까지 말이다.

“아무튼 대수림 북쪽은 내가 먼저 정리해 놓을 테니까 너희는 지도에 표시된 곳으로 와.”

“알겠다.”

설명을 마친 나는 손짓으로 겨울을 불렀다.

걸 크러쉬라나.

녀석은 별의 곁에 붙어 동경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나중에 봐요, 언니!”

손바닥을 흔들며 돌아선 겨울은 쪼르르 달려 펜리르 위에 올라탔다.

다시 도전하는 인마 대전.

해머를 짊어진 나는 계획을 정리하며 안장 위에 올랐다.

* * *

“으으으으윽…….”

짓눌리는 풍압에 겨울은 얼굴을 찡그리며 신음했다.

이것이 펜리르의 전력 질주인 건가.

겉으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놀랍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제껏 알고 있던 녀석의 속도는 거짓이었다.

짧은 구간이나마 맛은 봤다고 생각했는데… 제한이 풀린 펜리르의 속도는 전혀 다른 수준의 질주를 선보였다.

이래서야 첫 번째 계획부터 틀어지게 생겼다.

“멈춰!”

결국 나는 녀석의 질주를 막을 수밖에 없었다.

이 속도로 달리다간 만나야 할 사람을 놓치지 때문이다.

“와, 유체 이탈 하는 줄…….”

겨울은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잠깐 달려온 게 벌써 대수림 초입을 지나 버렸다.

하여 나는 펜리르의 방향을 되돌려 가볍게 달리기 시작했다.

“어, 왜 다시 돌아가요?”

“기다리기 싫어서.”

“뭘 기다리는데요?”

“이상한 놈.”

뜻 모를 말을 남긴 나는 절반가량을 되돌아간 뒤에야 펜리르를 멈췄다.

그러고는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며 녀석을 기다렸다.

사람 좋은 얼굴로 다가올 그놈.

시원한 바람에 땀이 말라 갈 무렵, 짙푸른 숲을 헤치며 기다렸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 신이시여! 이런 곳에서 사람을 만나게 해 주시다니!”

그날과 똑같은 대사를 지껄이면서 말이다.

만신창이가 된 남자는 풀숲을 헤치며 짐승처럼 튀어나왔다.

그렇게 가쁜 숨을 몰아쉬며.

“멈추세요! 지금 저 앞으로 가면 큰일 납니다. 몬스터들이 바글바글해요!”

털썩 주저앉아 두 손을 힘껏 저었다.

유난히 힘들어 하는 걸 보니 우리를 따라잡느라 애먹은 모양이다.

― 리베에서부터 쭉 따라 갔죠. 군대가 움직여서 포기했는데, 마침 혼자 갈라지셔서 레이가 엄청 기뻐했었어요.

에비오의 자백을 떠올린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이번에도 기뻐했겠네.”

혼잣말 같은 얘기를 녀석의 눈을 맞추며 중얼거렸다.

시작부터 혼자 나섰으니 얼마나 신났겠냐는 얘기다.

하지만 녀석은 뜬금없는 내 얘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 눈을 깜빡거리더니.

“하, 이 새끼… 회귀했나 보네.”

표정을 바꾸며 거칠게 혀를 찼다.

지난 회 차와 마찬가지로 상황을 판단하는 눈치 하나는 여전히 뛰어났다.

“너 그놈 능력을 이어받은 거냐? 어쩐지 로이드가 집착하더라니.”

이제 시독이라는 검은 맹독을 뿜어낼 터.

치이이익―

말 끝나기가 무섭게 레이의 손끝에서 검은 액체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나는.

그때와 똑같이 손을 뻗어 놈의 시독을 가로막았다.

검푸른 색으로 변해 가는 나의 오른 손.

피어오르는 옅은 연기 사이로, 레이는 고통에 겨운 나의 얼굴을 잔뜩 기대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눈앞엔 새로운 문자가 떠오르고 있었으니.

[맹독 내성으로 인해 독성이 차단되었습니다.]

녀석이 기대하는 효과는 애초에 시작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무효화된 시독이 증발되어 사라지고.

“동생은 어딨냐.”

나는 놈의 턱을 잡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역시나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더니.

“어디긴 시발… 네 맘속에 있지…….”

버둥거리는 와중에도 레이는 욕설을 내뱉으며 눈알을 번뜩였다.

순간 날아드는 그림자.

손에 쥔 레이의 턱을 부수며 광역 강타를 내질렀다.

“커어어어어억!”

공격 방향을 다 알고 있는데 기습이 될 리가 있나.

피를 토하며 날아간 로우의 머리 위로 금빛을 두른 천벌이 요란하게 떨어졌다.

그대로 고개를 돌린 나는.

“거기 숨어 있는 쥐새끼. 지금 나오면 살려 준다.”

짙은 숲을 향해 서늘한 목소리로 같은 말을 내뱉었다.

내 목숨 99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