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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99개-190화 (190/203)

190화

시원한 바람이 부는 너른 들판.

긴 행렬을 이끌던 빅터는 고개를 돌려 따라오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예상보다 느리다.

농가에서 구한 소환자들은 다양한 군상을 이루며 가는 걸음을 붙잡고 있었다.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까요? 이건 아무리 봐도 무리인 것 같네요.”

곁을 지키던 에스카는 걱정스런 말투로 말을 건넸다.

이건 확실히 문제가 있다.

저렇게 터덜터덜 뒤를 따르는 사람이 무려 서른 명이 넘는다.

그러니 계속해서 느려질 수밖에.

그들을 태울 말도 없을뿐더러, 있다고 한들 승마가 가능한 사람도 없었다.

“어차피 직접 싸울 게 아니니 너무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시기를 놓치면 봉인하기도 전에 사라지잖아요.”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니 괜찮을 게다. 그보단 수도로 향할 놈들을 스벤이 어떻게 처리할지 더 걱정이구나.”

에스카의 걱정을 달래며 빅터는 더딘 걸음을 이어 갔다.

그러나 정작 스스로의 마음속엔 불안이 가득했다.

당장의 목표는 인근에 형성된 게이트였으나, 이미 말했듯 몬스터의 이동 경로가 신경 쓰인 탓이었다.

너무 가까웠으니까.

이들이 향하는 게이트 자리는 황궁에서 불과 하루거리에 위치한 이름 모를 벌판이었다.

“그나저나 대수림 바깥에 마계가 열리다니, 정말 예전과 많이 달라졌구나.”

“좋지 못한 징조일까요.”

“글쎄다. 어찌 될지 모르겠다만 스벤이 무리하지 않았음 싶구나.”

“그러게요. 괜히 잘못 건드렸다간 벌집을 쑤신 꼴이 될 테니까요.”

대화에 끼어든 그레이시가 덤덤하게 말을 보탰다.

사실 어찌 됐건 상관없지만 말이다.

스벤이나 황제 따위, 그레이시에겐 원수와 다름없는 사람들이었다.

아니, 원수였다.

이 빌어먹을 브라함도, 지랄 맞은 크루시아 대륙도.

바래진 기억을 붙들고 이어 가는 억지스런 환영에 불과했다.

이렇듯 움직일 수 있는 것 또한 빅터와의 인연이 전부일 뿐.

“늦지 않게 도착한다면 게이트를 부수고, 이미 사라졌다면 황궁의 상황을 살펴야겠구나.”

그레이시는 빅터의 그림자를 따라 걸으며 살아 있는 이유를 찾으려 했다.

그것이 뭐가 됐건.

어디로 향하든 간에.

“지금 위치를 확인할 수 있겠나.”

“좌표를 보니 저 고개만 넘어가면 나올 것 같네요. 이제 멀지 않은 듯해요.”

여인의 답을 확인한 그레이시는 휑한 가슴을 달래며 눈앞의 언덕을 향해 나갔다.

* * *

마계의 입구를 지나는 느낌은 복잡했다.

시각적인 측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머리가 느끼고 판단하는 걸 말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건 평면적인 어둠뿐.

검은 공간에 떠 있던 나의 육체는 쏟아지는 상념을 품고 빛이 머문 세상에 뱉어지듯 쫓겨났다.

그게 전부였다.

같지만 다른 세상으로 향하던 나의 본능은 촉각을 곤두세우며 다가올 위협에 대비했다.

쓸데없이 촉이 좋다고 해야 하나.

그런 나의 불길한 감각은 여지없이 들어맞았다.

그것도 아주 심각하게.

“젠장.”

첫걸음을 내딛은 나의 시선은 까마득히 펼쳐진 몬스터들로 가득 채워졌다.

하필 이런 타이밍이라니.

후방의 작은 소란을 느낀 놈들의 머리가 천천히 우릴 향해 돌아서기 시작했다.

서늘한 숨을 내쉬며.

크르르르…….

진득한 살의를 담아 검은 눈을 번뜩였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늦었다고 판단한 나는 지체 없이 천벌을 내리꽂았다.

자욱한 연기 사이로 붉은 육편이 비산하고.

아우우우우우우우―

펜리르의 하울링이 너른 벌판을 가득 채웠다.

덕분에 얻게 된 짧은 여유의 시간.

“달려!”

나는 펜리르의 등에 에비오와 겨울을 태워 이곳을 벗어나도록 지시했다.

이런 난전의 상황에서 두 사람을 어떻게 지키겠나.

성공 여부도 불투명할 뿐더러 나와 펜리르의 역량마저 심각하게 저하시킬 게 자명했다.

하여 홀로 남길 자처한 나는.

콰앙!

쿠아앙― 콰쾅! 콰아아아아앙!

광역 강타와 천벌을 퍼부으며 움츠러든 몬스터를 부숴 나갔다.

어느새 주위는 놈들로 가득 찼고.

“이렇게 찾아와 주면 나야 고맙지.”

달려드는 놈들을 향해 금빛 해머를 날렸다.

썩은 고기에 모여든 구더기 같은 모습이랄까.

끊임없이 몰려드는 놈들로 인해 사체의 산은 크기를 키워 갔다.

한눈팔 틈이 없다.

시체를 정리하며 싸울 생각 따윈 상상조차 할 수 없고.

이미 이동을 마친 이곳의 상황은 반크스와 함께했던 전장과는 모든 것이 달랐다.

밀려오는 해일에 맞서 나의 공간을 지키는 게 이 싸움의 본질이었다.

그래서 더욱 몰입된다.

모래사장의 작은 조개처럼, 나의 존재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작고 보잘 것 없다.

하지만 그런 작은 존재는.

크워어어억―

키에에에에에엑!

강자를 몰라보는 무지한 놈들에게 참된 교육을 시전하고 있었다.

얼마나 몰려오건 상관없다.

이런 놈들의 존재 가치는 숙련도를 위한 좋은 재료일 뿐.

[내려치기 숙련도 9,540/10,000]

[휘두르기 숙련도 9,610/10,000]

[올려치기 숙련도 9,409/10,000]

상승하는 숙련도를 보며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최대치에 도달할 터.

그와 비슷한 시기에 긴급 성장 시스템도 완료될 것이다.

‘마지막 스킬 제작에 보너스 레벨이라…….’

이어질 완벽한 결과물을 떠올리며 휘두르는 해머를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그렇게 앞으로.

이제 나타날 때가 된 마족을 기다리며 놈들의 중심으로 계속해서 파고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수상한 반응을 느낀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먼 곳을 응시했다.

와이번이라고 했었나.

수 마리의 비룡이 낮은 높이로 날아들고 있었다.

할 수 있는 수단은 다 동원해 보고 싶은 모양인데.

쿠우우우우우웅―

타이밍 좋게 떨어진 천벌은 눈앞에 다가온 와이번을 땅바닥에 처박아 버렸다.

드래곤의 아종인지 뭔지 알게 뭐냐 이거다.

등 뒤로 날아간 놈들을 두고 나는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마족과 시선을 마주했다.

두껍고 길게 자란 검은색의 뿔.

푸른 갑옷을 장착한 녀석의 모습은 이전에 마주했던 놈들보다 한층 강한 녀석이란 걸 암시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바래왔던 상황이니까.

나는 최대의 속도로 달려 놈의 간격에 파고들었다.

하지만 녀석은 유유히 빠져나갔고.

콰아아아아앙!

도주 경로에 작렬한 천벌마저 놈은 가볍게 피해 냈다.

“속도가 특기인가.”

빠른 거라면 아쉽지 않건만, 이 마족의 속도는 한 차원 높았다.

마치 그 방면에 특화된 것처럼 말이다.

요리조리 피하는 놈을 쫓아 천벌과 광역 강타가 들이쳤다.

물론 놈은 모조리 피해 나갔다.

그러나 상관없다.

대신 다른 몬스터들 갈려 나가고 있었으니, 내 입장에서야 어느 쪽이든 나쁘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나의 성장이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러나 저 녀석은.

“새끼… 더럽게 빠르네.”

얄미울 만큼 빨라 슬슬 오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잡아 족치고 싶다.

피식거리는 저 면상에 해머를 때려 박고 싶다.

놈을 향한 격한 충동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며 올라왔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여전히 달려드는 몬스터를 쓸어버리며 눈으론 놈의 뒤를 쫓아다녔다.

“쯧…….”

결국 나는 쓰게 혀를 차며 추적을 중단했다.

내 속도는 놈을 잡을 수 없었고, 이렇게 해서는 방법이 없다.

하면 놈이 나에게 오도록 만드는 수밖에.

마족에게 시선을 거둔 나는 목표를 바꿔 세 발 거인에게 해머를 휘둘렀다.

호쾌하게 날아가 존재를 지워 버리는 광역 강타.

“뭐야 저게…….”

그러나 나는 하늘을 가르는 와이번을 보며 휘둘러진 해머를 거두지 못했다.

지금 보여서는 안 되는 존재가.

저런 모습이어선 안 되는 녀석이…….

와이번의 다리에 거꾸로 매달려 힘없이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겨울아아아아아아아아!”

정체를 확인한 나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와이번을 따라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성이 날아간다.

심장이 펄떡거리며 뛰기 시작했고, 눈앞이 붉게 물들며 주변 소리가 지워지기 시작했다.

“꺼지란 말이다!”

피를 토하듯 고함치며 가로막는 모든 걸 날려 버렸다.

이쯤 되니 보이지 않았던 마족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무시한다.

그런 나를 놈들은 뒤쫓는다.

쫓고 쫓기는 기묘한 추격전은 평원을 가득 매운 몬스터들 틈에서 괴이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콰아아아아아앙!

해머를 떠난 광역 강타가 깊은 고랑을 만들며 무리를 갈라냈다.

고갈되는 원기 따위 이제 안중에도 없다.

그저 미친 듯이 해머를 휘둘러 길을 만들어 낼 뿐.

멀어지는 와이번을 따라 폭주하며 달려 나갔다.

한데 펜리르는 뭘 하고 있었던 걸까.

에비오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을 품은 채 나는 계속해서 달려야 했다.

하나 그런 나의 의문은.

끼아아아아아아악―

또 다른 와이번에 의해 간단히 해결되었다.

연이어 날아가는 놈의 주둥이에는 채 삼키지 못한 에비오의 다리가 이쑤시개처럼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이 개새끼들이!”

이미 날아가 버린 나의 이성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넘어버렸다.

카아아앙!

앞을 막아서는 마족의 칼을 거칠게 쳐 내며 달려갔다.

적으로 만난 에비오의 죽음도 이리 마음이 쓰린데.

힘없이 흔들리던 겨울의 몸뚱이는 뇌리에 각인되어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손 쓸 수 없는 죽음에 대한 무력감.

그리고 분노.

솟구치는 감정의 폭풍은 무저갱의 끝으로 나를 잡아당겼다.

저항하지 않는다.

잡아끌면 끄는 대로, 내 안에 숨은 또 다른 나에게 이 분노를 그대로 떠넘겼다.

그런 나의 앞으로 대여섯의 마족이 길을 가로막았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개의치 않는 해머는 놈들의 머리위로 천벌을 내리 꽂았다.

하지만 놈들은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이어지는 마족의 반격에 순식간에 고립되고 말았다.

동시에 이어지는 난타전.

방어를 포기한 나는 눈앞에 있는 한 점을 향해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그러나 놈은 태연히 버텨 냈고.

“크으으으윽.”

무방비였던 나의 등 뒤는 무수한 칼자국을 남기며 붉은 피로 물들어 갔다.

찰나의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나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다.

이렇게 끝나는 건가.

바닥을 내려앉는 와이번을 보며 나는 치미는 분노에 주먹을 떨었다.

더 이상 어쩔 방법이 없다고 느껴지던 그 순간.

아우우우우우우우―

웅장한 하울링과 함께 피로 물든 펜리르가 마족들 사이로 날아들었다.

거대한 녀석의 앞발이 마족들의 얼굴을 노리며 정신없이 날뛰기 시작했다.

이미 심하게 당한 걸까.

거칠게 요동치는 펜리르의 몸은 한눈에 봐도 온전치 못해 보였다.

“바보 같은 놈…….”

주인을 따라 사지에 몸을 던진 녀석을 보며 나는 말끝을 흐린 채 고개를 돌렸다.

그게 너의 뜻이라면.

나는 반듯이 겨울을 찾아내마.

광란에 가까운 펜리르로 인해 마족의 포위망이 느슨해졌다.

틈을 찾아낸 나는 해머를 움켜쥐고 겨울에게 달려갔다.

이제 남은 거린 고작 스무 발자국 내외.

가로막는 한 무리를 날리자 텅 빈 공간에 앉아 무언가를 쪼아 대는 와이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 피를 흘리며 찢겨져 가는 작은 소녀의 몸뚱어리.

“…….”

백지장이 돼 버린 나의 머리는 생각하는 기능을 잃은 것처럼 무심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걸어갔다.

참혹히 파헤쳐진 소녀의 주검 앞으로.

울대를 꿀렁이며 께륵 거리는 와이번을 향해 나는 터덜터덜 무거운 걸음을 내딛었다.

그러나 놈들은 소녀를 향한 나의 걸음을 가로막았다.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들이 내 몸 곳곳을 파고들었고, 그런 놈들을 질질 잡아끌며 와이번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너무 늦어 버린 재회.

형체조차 알아 볼 수 없는 죽음에 나는 조용히 해머를 들어 올렸다.

그 사이 다가온 마족이 내 곁으로 파고들었고.

“일주일 후에 다시 보자.”

낮게 읊조리며 천벌을 내리쳤다.

동시에 파고는 서늘한 칼날의 느낌.

마족의 칼을 움켜잡은 나는 그대로 잡아당겨 나의 목을 갈라 버렸다.

피싯 거리며 뿜어지는 붉은 분수.

내려친 천벌에 와이번이 터져나가며 눈앞에 새로운 문자가 떠올랐다.

[죽음보다 짙은 복수의 감정에 시스템이 반응합니다.]

[죽음을 자행하는 결단에 시스템이 반응합니다.]

그리고 나는.

빙그르 도는 세상을 느끼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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