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반크스의 롱 소드가 허공을 내리그었다.
이런 걸 격의 차이라고 하는 걸까.
빠르다고 할 수 없는 잔잔한 움직임으로 마주하는 모든 걸 쓸어버렸다.
마치 해일처럼.
“이게 8성…….”
유려하지만 파괴적인 그 모습에 지켜보던 듀란은 말끝을 흐렸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처음 목격한 8성의 경지는 자신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엄청나다.”
“슬슬 하는 것 같은데 장난 아니군.”
경외감마저 드는 반크스의 검술은 보는 이들의 감정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혀를 내둘러도 모자랄 절기 앞에서 한 무리의 병사들은 덤덤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저 색다름을 감상하고 있을 뿐.
“우리 대장과는 정반대네.”
대륙에 두 명뿐인 8성을 앞에 두고 그들은 누군가를 비교 대상으로 삼았다.
이 자리에 나타나도 부족하지 않을 것 같은 남자.
“이반 대장이 시원시원한 맛이 있지.”
강함에 익숙한 이들의 정체는 반크스를 위해 파견된 이반의 부대원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침착할 수밖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금빛 해머를 보고나면 어지간해선 놀라지도 않을 터였다.
빅터처럼 대지를 뒤집어 놓으면 모를까.
섬세하고 부드러운 반크스의 검은 어딘가 모르게 아쉽게 느껴졌다.
하지만 8성이란 명칭이 괜히 존경받겠는가.
부드러움 속에 감춰진 포악함은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들을 남김없이 도륙해 냈다.
그 모습에 고무된 병사들은 넓어진 포위망을 좁히며 전진했다.
한걸음씩 천천히.
위급했던 상황이 정리되고 아치 주변은 다시 함정으로 변하는가 싶었다.
하나 그 순간.
촤앙―
맑게 퍼져 가는 쇳소리와 함께 반크스의 검이 허공으로 튕겨 나왔다.
‘지금 공격을 되받아 친 건가?’
반크스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마족을 노려보았다.
머리에 자란 두툼한 뿔.
이반의 경험에 따르면 뿔의 크기가 클수록 강함은 비례한다고 말했다.
“이제야 나타나셨군.”
짧게 주억거린 반크스는 분위기를 바꿔 공격을 이어 갔다.
그리고 가로막혔다.
마계를 벗어난 저 마족은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반크스의 검을 모조리 틀어막고 있었다.
이렇게 시간을 허비했다간 또다시 포위망이 무너질 터.
반크스는 공격을 지속하며 협공을 지시했다.
이것은 전쟁이니까.
의미 없는 명예를 지키느니 생존과 임무에 집중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슈아악―
길게 뻗은 반크스의 오러가 마족의 머리를 내리그었다.
부딪친 두 개의 검이 불꽃을 뿜어 댔고.
쿠아아아아앙!
연이어 날아드는 마법 총의 공격에 마족은 크게 물러섰다.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진 못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팽팽한 균형은 무너졌고, 그 틈을 노린 반크스의 검기가 놈을 향해 날아들었다.
카가각―
가까스로 막아 내는 마족의 검사.
격돌한 반크스의 검기는 주변 몬스터의 살점을 가르며 흩어졌다.
“질긴 놈이로군.”
반크스는 쓰게 혀를 차며 검을 거두었다.
이런 상대를 만나다니.
오랜만에 참여한 실전에서 그는 생에 처음으로 비등한 수준의 적을 마주하게 되었다.
낮선 긴장감이 전신을 타고 흐른다.
오감은 더욱 예민해지고, 투지는 거세져 간다.
짜릿하게 퍼져 나가는 쾌감.
그 순간 반크스는 자신의 모든 걸 해방했다.
쿠우웅―
심장을 두드리는 울림과 함께 백색의 오러가 소용돌이쳤다.
전신을 휘감은 오러의 폭풍은 단단한 두 팔을 타고 검으로 전해졌다.
내리 긋는다.
그리고 막는다.
단순한 두 개의 동작이 지근거리에서 이루어졌다.
콰가각―
굉음을 일으키던 오러와 마기의 충돌은 팽팽한 접전 끝에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그런 대결의 승자는.
“우와아아아!”
칼날 같은 안광을 빛내는 반크스에게 돌아갔다.
심지어 그의 공격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콰르릉!
뻗어 나간 검기의 파동은 주위를 몰살하며 마계의 입구로 향했다.
이대로 모든 게 끝이 나는가 싶던 순간.
쩌어엉―
지축을 흔들며 떨어진 금빛 해머가 반크스의 검기를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죄송합니다! 이 문짝은 나중에 부술게요!”
거대한 늑대의 머리 위로 이반의 몸이 날아올랐다.
* * *
토끼몰이 같던 마족과의 전투는 나의 합류로 인해 급변했다.
좌우로 늘어선 반크스와 나는 서로의 절기를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두툼한 뿔이 자란 마족?
힘든 기억으로 남은 녀석들도 기습 공격 앞엔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을 가로막는 인간들이 어디 보통 사람이었던가.
“스트랭스, 프로텍션, 헤이스트.”
겨울의 마법을 지원받은 사람들은 극강의 공격을 내질렀다.
나야 말할 것도 없고.
이미 8성인 반크스를 비롯해 7성인 듀란은 신세계를 맛보며 광란의 질주를 이어 가고 있었다.
거기에 빠지면 섭섭할 펜리르까지.
아우우우―
길게 뽑아내는 하울링에 마족마저 주춤거리며 전투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것이 결정타였다.
끝없이 들이밀던 마족의 행렬은 어느 시점에 이르러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벌써 끝난 건가? 이전보다 빨리 멈춘 것 같은데.”
“글쎄요.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얼마나 진행되고 있었는지가 관건이겠죠.”
움직임이 멈춘 입구를 보며 나와 겨울은 무심이 중얼거렸다.
이곳에 도착해 보낸 시간은 길지 않다.
기껏해야 20분 정도 됐을까.
우리가 없던 상황을 따진다면 이곳으로 향한 이동 시간을 제하면 된다.
지도에 표시가 올라온 직후 이곳으로 달려온 탓이다.
“우리도 한 시간이 채 안 지났네.”
그런 나의 생각에 동의하듯 반크스는 검을 거두며 대답했다.
“그렇죠? 확실히 앞에서 본 것보다 일찍 정리됐어요.”
“자네가 있던 곳은 이보다 길었나 보군.”
“네. 조금 더 길게 나왔던 것 같아요.”
반크스의 말에 답하는 사이 겨울은 아치로 향했다.
“이렇게 치워가면서 싸우는 것도 재주네요.”
주위를 가득 메운 사체를 바라보며 겨울은 생각보다 깔끔한 마계 입구에 대해 감탄을 표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세 사람이 보여 준 연계로 인해 몬스터와 마족들은 사망과 동시에 입구 근처로 날아갔다.
단체 공격 이후 나의 마무리.
광역 폭발로 걷어 낸 사체들은 시원하게 날아가 초원 곳곳에 흩어졌다.
“이렇게 지속 시간이 다른 걸 보면 각 입구마다 나오는 숫자가 다른가 봐요.”
“그렇겠지. 그쪽도 나름 군대일 텐데 모두 똑같진 않을 거야. 어쩌면 나오다 포기했을 수도 있고.”
협공에 관한 대화는 어느덧 놈들의 군세로 이어졌다.
“하기야 바보가 아닌 이상 경계 너머가 수상하다는 걸 알았겠죠. 아니, 몰랐을까?”
아무렴 어떤가.
무사히 목표 달성을 했으면 그만이지.
갸웃거리는 겨울을 두고 나는 반크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희는 이 입구를 타고 다른 곳으로 갈 거예요. 그러니 제가 사라지고 나면 조금 있다가 모조리 때려 부수세요.”
“흠, 알겠네.”
“네. 그럼 먼저 가 볼 테니 몸조심하세요.”
그렇게 간단한 작전을 설명하곤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한데 그 순간.
“잠깐, 지금 어딜 간다고? 설마 마족들이 나온 입구를 거슬러 간다는 건 아니겠지?”
“맞는데요.”
“그게 무슨 소린가?! 저 뒤에 무엇이 나올 줄 알고 거길 간단 말인가. 그만두게. 마계가 어떤 곳인지 알려진 바 없어 너무 위험하네.”
반크스는 정색을 하며 가는 길을 붙잡았다.
“아, 괜찮아요.”
“괜찮을 리가 없잖은가! 만용 부리지 말고 이대로 있게.”
“그게 아니라 어차피 들어가도 마계는 못 가서 그래요.”
“그건 또 무슨 말인가.”
“들어가는 순간 다시 인간계로 쫓겨나거든요.”
“한데 굳이 왜… 혹시 다른 곳으로 나온다는 건가?”
“맞아요. 저기로 들어가면 이곳과 연결된 다른 입구로 나가게 되요.”
설명을 접한 반크스는 눈을 키우며 아치로 다가갔다.
일렁이는 거울을 보며 손을 뻗는 반크스.
“안 돼요!”
“왜! 무슨 일이냐?! 뭐가 잘못된 게냐?!”
갑작스런 나의 고함에 반크스는 기겁을 하며 손을 물렸다.
“빨려 들어가요.”
“허허…….”
“넘어갔다 바로 못 돌아오시면 이곳에 문제가 생기잖아요. 저희 일행이 넘어가고 나면 입구만 부숴 주세요.”
“알겠네.”
설명을 접한 반크스는 턱 끝을 매만지며 아치를 바라보았다.
그의 짙은 호기심이 한없이 커지는 게 보였지만.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겨울을 들어 올린 나는 펜리르와 함께 마계의 입구로 향했다.
* * *
“아직은 없어요.”
“지난번엔 보였다고 하지 않았나.”
“물론 그랬죠. 한데 이번엔 아직 표시가 따로 뜨지 않았어요.”
주눅 든 표정의 여인은 그레이시의 말에 조심스레 대답했다.
“흐음, 아예 뜨지 않을 확률도 있다는 거군.”
“그럴 수도 있겠죠…….”
말끝을 뭉개던 여인은 시선을 들어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머문 곳은 시스템 창.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로이드의 시스템을 바라보며 그의 위치를 찾는 중이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이번엔 지난번과 여러모로 다르거든요. 그러니 기다려 보면 무슨 소식이 올 거예요.”
초조해하는 여인을 보며 그레이시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안쓰러워 보였다고 할까.
살기 위해 여인이 택한 행동은 자신의 필요성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원해서 시작한 삶이 아닌데.
죄인처럼 행동하는 저 여인은 자신의 사정과 상관없이 소환된 피해자에 불과했다.
“조급해할 것 없네. 그를 찾는 것 말고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많으니까.”
곁을 지나던 빅터는 무심한 듯 여인을 챙겼다.
그러고는 여인이 알려 준 방향으로 말을 몰아갔다.
목적지는 새로 생성된 마계의 입구.
게이트라고 명명된 이 출입구는 처음보다 더욱 숫자가 늘어 형성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빅터는 그중 하나를 봉인하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는 중이었다.
“아, 지금 또 하나가 파손됐어요.”
“이번에도 북쪽인가.”
“네. 아까 부서진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네요.”
빅터의 질문에 답하며 여인은 게이트 목록에 시선을 고정했다.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는 ‘파손’이라는 표기.
달리 설명이 필요 없는 이 말은 타력에 의해 기능을 상실했다는 의미였다.
“이반 녀석이 신나서 날뛰는 모양이네요.”
“그 피가 어디 가겠냐.”
“하기야 진 역시 전장에서 가장 빛났으니까요. 부전자전이라는 건 딱 이럴 때 쓰는 말인가 봅니다.”
그레이시는 이반의 이름을 대며 과거를 추억했다.
대수림을 휩쓸던 진과 동료들의 모습을, 두렵지만 흥분으로 가득했던 설레던 나날들을…….
“이반이 진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요.”
“이미 꽤 따라갔으니 조만간 그리 될 거라고 생각한다. 이젠 그냥 힘만 센 녀석이 아니지. 지금 당장으로도 8성의 경지는 충분할 게다.”
“기대되네요. 녀석이 어떻게 성장할지.”
그레이시는 먼 곳을 바라보며 복잡한 표정을 떠올렸다.
준비 없이 내던져진 낮선 이세계의 삶.
절망에 빠진 어린 그레이시에게 진은 유일한 희망이 되어 반짝거렸었다.
밤하늘을 밝혀 주는 북극성처럼.
길을 잃은 어린 소년에게 진은 등대와 같은 남자로 남아 있었다.
“지금도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을 게다.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그런 범위가 아니지.”
“그렇죠. 자질만 따진다면 제 아비보다 더 뛰어난 것 같습니다.”
끄덕거리며 답하는 그레이시의 말에 빅터는 말없이 먼 산을 바라보았다.
대를 이어 전해지는 특별한 능력과 재능이라…….
“이른 생각일지 모르지만, 이번 인마대전은 녀석의 손에 의해 정리될 것 같구나.”
한층 성장했을 제자를 떠올리며 빅터는 조용히 읊조렸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