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나타난 몬스터는 무리지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래간만에 마주하는 추억의 몬스터.
놈들은 잊을 수 없는 고기 맛을 가진 붉은 오크였다.
“이러면 고맙지.”
사악한 미소를 날린 나는 그러쥔 해머를 가볍게 내리쳤다.
놈들의 수준이야 5성급 정도니까 지금의 나에겐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러니 결과야 말해 뭐 하겠나.
치솟은 숙련도가 마지막 숫자를 채우며 둔기 마스터리 레벨은 10이 되었다.
보상으로 주어진 것은 대미지 20% 상승. 누적된 증가량의 총합은 이제 100%에 이르렀다.
하지만 기대되는 건 따로 있었으니.
[고유 스킬 제작.]
마스터리 레벨이 증가하며 새로운 스킬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고민할 필요도 없다.
이 순간을 기다렸던 건 오직 하나.
‘스턴.’
대상을 기절시키는 특별한 상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사실 진즉에 구현하고 싶었지만, 시스템이 설정한 발동 기준이 나의 선택을 가로막았다.
고작 10%의 확률이라니.
스킬의 효과를 보려면 저 하찮은 확률에 모든 걸 걸어야 했다.
목숨이 달린 상황에서 말이다.
그런 이유로 스턴은 광역 강타와 천벌에게 우선순위를 내줘야 했다.
‘다 좋았는데.’
그 하나가 아쉬웠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으니까.
[원하는 내용을 떠올리세요.]
지난 시도와 마찬가지로, 나는 대상을 기절시킬 방법을 원했다.
[원하는 스킬의 형태를 떠올리세요.]
내가 행하는 모든 공격에 적용되는 방식으로.
[스턴, 레벨 1.]
패시브 스킬.
둔기에 공격당한 대상은 10%의 확률로 행동 불능 상태가 됩니다.
유지 시간 1초.
레벨이 증가할 때마다 발동 확률과 시간 증가.
그렇게 만들어진 스킬은 해머만 휘두르면 발동되는 상시 적용 스킬로 탄생했다.
심지어 성장이 가능한.
당장은 아쉽지만 미래가 기대되는 녀석임엔 틀림없어 보였다.
“이걸 써먹어 봐야겠는데.”
몬스터가 없으니 시험할 대상이 없다.
이럴 때 술이 있어야 하는데.
에비오를 쳐다보자 녀석은 실없이 웃기만 했다.
좋아 당첨.
“우리 재미있는 놀이 좀 해 볼까?”
나는 붉은 오크의 몽둥이를 주워, 흠칫하는 에비오에게 건넸다.
“이걸로 뭘…….”
“그냥 잘 들고 있으면 돼.”
미소로 대답한 나는 해머를 들어 녀석을 향해 휘둘렀다.
“어어어어억!”
툭.
비명이 무색한 가벼운 공격.
느릿한 해머는 에비오의 몽둥이를 가볍게 두들겼다.
그저 확률을 알아볼 생각이니 세게 때릴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툭.
툭.
툭.
“흠, 반응이 없네.”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
낮은 확률 탓인지 모르겠지만 역시나 스킬은 발동되지 않았다.
어쩌면 약하게 휘두른 탓일지도 모르고.
“조금 더 세게 칠 거야. 힘 꽉 주고 버텨.”
“그, 그건… 우와아아아악!”
기겁하는 에비오를 향해 힘을 실은 해머가 연이어 날아들었다.
말이 좋아 힘을 실었다는 거지.
사실상 못질하는 기분으로 두들겼을 뿐이다.
하지만 녀석에겐 버거웠나 보다.
“헉!”
“크억!”
“우아악!”
새된 비명을 질러대던 에비오는 어느 순간 갑자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흡?!”
이렇게 말이다.
지레 비명을 지르던 녀석은 나오던 소리를 멈추고 눈을 부릅떴다.
“커헉! 이거 뭐죠?!”
그러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다시금 요란을 떨기 시작했다.
“왜? 뭐 이상한 느낌이 있었어?”
“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더라고요.”
“호오, 그래?”
스킬은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만약 이것이 실전이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치열한 공방 중에 발동했다면?
목숨을 거두는 데 필요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찰나의 빈틈.
1초의 시간이라면 충분하고도 남는다.
길어지면 더할 나위 없고.
“그럼 진지하게 가 볼까.”
하여 나는 에비오의 몽둥이를 향해 끝없는 망치질을 이어 갔다.
콰직!
못 견딘 몽둥이가 부러지길 수차례.
“살려 주세요!”
더 이상 버티지 못한 에비오는 무릎을 꿇으며 애원했다.
“벌써?”
“벌써라니요?! 박살 난 몽둥이가 몇 갠데 그런 말씀을 하세요!”
아쉬워하는 나를 보며 에비오는 정색했다.
내가 조금 과했나.
“쉬엄쉬엄해요. 아저씨야 적당이지만, 당하는 사람은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고요.”
곁에 있던 겨울마저 녀석의 편을 들며 손가락을 저었다.
하기야 많이 휘두르긴 했지.
얼마나 두들겼는지 그사이 스턴은 레벨 2로 성장해 버렸다.
발동 확률 20%에 지속 시간은 1.2초.
성장률 900%의 위력은 이렇게나 무서웠다.
그사이 삼신기의 숙련도마저 쭉쭉 오르고 있었으니까.
“좋아. 그럼 다음 휴식지에서 다시 하자.”
나는 들끓는 의욕을 달래며 수련을 중지했다.
그런 나의 모습이 이상했을까.
“굳이 에비오와 함께해야 해요? 어차피 연습은 혼자해도 상관없잖아요.”
겨울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나를 보며 물었다.
“숙련도만 올리는 거면 그래도 되지. 그거 말고 확인할 게 있어서 그래.”
사실 수련이야 대련 상대가 없어도 가능하다.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차라리 그게 더 편하고 빠르다.
하지만 굳이 에비오와 함께한 것은 스턴의 발동 확률을 체감하고 싶어서였다.
“실험 같은 건가요?”
“그렇지. 느낌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실전에서 차이가 크거든.”
그제야 겨울은 고개를 끄덕이며 에비오의 어깨를 두드렸다.
녀석도 이해한 것이다.
허공이나 통나무는 기절해 주지 않는다는 걸.
“그나저나 이젠 숙련도 오르는 속도가 어마어마하네요.”
“맞아. 장난 없게 오르고 있지.”
“광역 강타나 천벌도 연습하지 그래요. 요즘 따로 수련하지 않는 것 같던데.”
“그놈들은 요란하잖아. 그런 걸 계속 휘둘러 대면 탐색하기 힘들걸.”
그 외에 다른 이유를 대자면.
“원기 또한 무한한 게 아니거든. 언제 싸울지 모르는데 준비는 해 놔야지”
“그렇겠네요.”
끄덕이던 겨울은 엉금엉금 기어 펜리르 위로 올라갔다.
* * *
대수림 어딘가의 동굴 속.
마족을 피해 숨어 있던 로이드는 눅눅한 암벽에 기대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다음 목적지는 정해진 겁니까?”
모닥불을 뒤적이던 감색 로브의 사내는 이어질 행선지를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번에는 늦었잖습니까.”
죽을 위기 끝에 도착했건만 목표로 했던 게이트는 닫혀 버린 뒤였다.
덕분에 이곳에 머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으니, 남자의 입장에선 현 상황이 답답할 법도 했다.
“그랬지.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새로운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하지만 그것도 쉽진 않은 것 같은데요. 운이 많이 따라 줘야 할 것 같습니다.”
로이드가 원하는 곳이 어디에서 나타날지, 그날이 돼 봐야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할 수 있는 건 이렇게 버티며 행운을 기원하는 것뿐.
“그래도 기회는 올 것이다.”
로이드는 덤덤한 얼굴로 남자의 말에 대답했다.
“게이트를 찾게 되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말씀하신 대로 다른 차원이 열리는 겁니까?”
“일단은 마계와 이어져 있지. 하지만 그 통로를 비틀어 다른 차원에 연결시키는 것이 핵심이다.”
“흐음, 저희 두 사람만으로 가능한 일일까요? 저야 로이드 님을 믿지만 워낙 신기한 현상이다 보니 걱정만 앞서게 되네요.”
하지만 감색 로브의 사내는 여전히 불안해했다.
갑자기 열려 버린 마계와 그 안에서 나타난 마족들.
상상해 보지 못한 미증유의 사건들 앞에서 남자의 생각은 로이드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걱정 마라. 과거의 현자들에게 이미 모든 방법을 전수받았으니까.”
그런 부하를 보며 로이드는 잔잔하게 대답했다.
[게이트 활성까지 남은 시간 00:09.]
이제 남은 시작은 고작 9분.
줄어드는 시간을 보며 로이드는 손에 쥔 완드를 문질렀다.
* * *
“펜리르의 털은 왜 때가 안 탈까요?”
“그게 무슨 말이야.”
“그렇잖아요. 이렇게 숲을 누비고 다니는데 이 아이의 털은 늘 뽀송뽀송하거든요. 냄새도 안 나고.”
생각해 보니 겨울의 말이 맞다.
심지어 펜리르의 털은 흰색 바탕에 회색이 살짝 섞여 있다.
이 정도 활동량이라면 흰색은 진즉에 사라졌어야 했을 텐데.
“이거 봐요. 펜리르는 털 냄새도 좋다고요.”
겨울은 희고 풍성한 갈기에 코를 들이대고 킁킁거렸다.
정말로 신수가 되어 가는 걸까.
최근 들어 펜리르는 한층 더 성장한 느낌이었다.
단단해진 체격은 물론이요, 이따금 내뱉는 하울링은 장엄할 정도로 깊은 울림을 자아냈다.
“이러다 막 말하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요? 지구의 판타지에선 말하는 신수들도 많거든요.”
“호오, 그렇게 되면 재밌겠는 걸.”
그에 대답하듯 펜리르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기가 막힌 타이밍에 대해 뭐라고 한마디 하려던 순간.
딸랑―
허리춤에 맨 주머니에서 맑은 종소리가 들려왔다.
메신저가 아니라면 지도일 터.
“나타났다.”
소리의 정체는 지도에 표시한 마력 감지기가 신호를 보낸 것이었다.
위치는 마지막으로 감지기를 설치했던 장소.
“지나온 지 얼마나 됐지?”
“한 시간쯤 됐을 거예요.”
겨울의 답을 들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펜리르를 돌렸다.
시간은 충분하니 되돌아가면 마계의 입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자, 펜리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펜리르는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언젠간 진짜로 인간의 말을 할지 모르겠다고.
알아서 달리는 펜리르를 보며 실없는 망상을 펼쳤다.
* * *
되돌아간 시간은 30분도 채 안 걸렸다.
탐색할 필요가 없으니 마음 놓고 달려온 탓이었다.
문제는 도착한 이후였는데.
“징그럽게 쏟아져 나오네.”
멀리 보이는 마계의 입구에선 처음 보는 몬스터들이 끊임없이 밀려 나오고 있었다.
긴 코를 가진 네발 몬스터를 시작으로, 다리가 세 개인 거인.
게다가 이번엔 날아다니는 비행 몬스터까지 새롭게 모습을 드러냈다.
“드래곤이 저렇게 작을 리는 없고, 날도마뱀인가?”
“엥, 그게 뭐예요, 촌스럽게. 와이번이잖아요.”
“와이번?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제 꿈이 뭐라고 했죠? 웹툰 작가라고 했잖아요. 다양한 장르의 판타지와 게임을 통한 인풋은 기본이거든요. 여자라고 해서 로맨스 같은 연예물만 좋아하는 건 아니란 거죠.”
아무튼 결론은 그거다.
겨울이 사는 세상에서는 저런 형태의 몬스터를 와이번이라고 부른다는 것.
“다른 말로는 비룡이라고도 해요. 드래곤의 아종이라 전투력은 부족하지만, 비행 능력은 탁월하다는 설정이죠. 여기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요.”
어찌됐건 골치 아픈 적이 늘어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건 그렇고.
“신기하네. 어디서 저렇게 기어 나오는 거지.”
딱히 통로랄 게 없는데 말이다.
마계의 입구라는 건 그저 일렁거리는 커다란 거울과 비슷했다.
“저 투명한 면에서 나오는 거죠. 차원 이동 같은 거니까, 열고 들어갈 문 같은 건 필요 없는 거예요.”
“그래?”
“뭐, 보통 설정이 그렇다는 거예요. 그냥 경계를 넘으면 되는 거죠.”
가늘어진 눈으로 바라보던 겨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홀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진짜 비슷하네……. 기성작가들은 이런 걸 본 적이 있는 건가.”
그렇게 겨울은 내가 모르는 세상에 대해 홀로 감탄하며 비교하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끝없이 나오던 몬스터의 행렬은 어느새 끝을 보이며 사라졌다.
“얼추 한 시간 정도 몰려나왔나?”
“그보단 더 되는 것 같네요.”
“다른 입구들도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 거겠지?”
“비슷하지 않을까요? 보통 이런 건 특정한 패턴이 있는 법이거든요.”
처음으로 확인한 마족의 침입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놈들의 방식은 알아냈으니 이제 남은 건 열려 있는 입구를 닫는 것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놔둬도 사라진다면서요.”
“그랬지.”
“그런데 뭐 하러 없애요?”
“없애지 않으면 계속 열리니까 봉인하겠지.”
“그렇군요.”
설명 듣던 겨울은 일렁거리는 마계의 입구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이건 어떤 질감일까요. 느낌이 있는 물체인가.”
거울 같은 표면을 향해 작은 손을 내밀었다.
한데 그 순간.
“꺄아아악!”
물결처럼 흔들리던 마계의 입구는 호기심 어린 소녀의 몸을 빨아들이듯 집어삼켜 버렸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