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마을 서쪽으로 나온 빅터의 일행은 이반에게 얘기했던 밀밭으로 걸음을 옮겼다.
걸어온 거리만 해도 대강 1㎞.
이제 저 언덕을 넘어가면 목적지인 농가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스승님은 얼굴이 알려졌으니 제가 먼저 갈게요.”
언덕을 오르던 에스카는 빅터를 돌아보며 작전을 말했다.
감금된 사람들의 상태를 모르니 무작정 쳐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근처에 계시다가 제가 신호하면 들어오세요.”
“신호의 종류는?”
“뭐가 됐건 알 수 있도록 할게요.”
짧은 문답을 마친 에스카는 언덕 위에 올라 펼쳐진 밀밭을 바라보았다.
황금빛으로 물든 벌판 위에 덩그러니 서 있는 농가.
에스카는 주저 없이 걸음을 때어 밀밭 중앙으로 향했다.
머지않아 대문 앞에 도착했고.
똑똑―
짙은 갈색 문을 두들기곤 이어질 인기척을 기다렸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조용한 침묵뿐.
에스카는 문 너머를 주시하며 반응을 기다렸다.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농장 주인을 만나러 왔습니다.”
문 뒤로 오가는 인적을 느끼며 에스카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잠시 후.
끼이익―
낡은 문이 열리며 중년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겉으로 보이는 남자의 무장 상태는 맨몸. 하지만 투시를 사용하자 소매 속으로 감춰진 대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뒤에 있던 남자는 완드를 들고 있었고, 심지어 완드에선 마력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요?”
“파킨슨의 농장을 찾고 있는데요. 혹시 여기가 맞나 해서요.”
사람을 찾는 에스카의 말에 남자는 눈썹을 끌어올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일단 들어오쇼. 바로 찾아오신 모양이니까.”
시선을 되돌린 남자는 입구를 활짝 열어 한 걸음 물러섰다.
“다행이네요. 여기를 찾는다고 다우롱 전부를 헤집고 다녔어요.”
“저런, 이 근방의 농가들이 죄다 띄엄띄엄 있어서 그럴 거요.”
“맞아요. 전부 멀리 떨어져 있더라고요.”
푸념을 내뱉은 에스카는 안으로 들어서며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이 공간 안에 있는 적은 모두 합해 다섯 명.
거실 벽 너머로 한 사람이 있었고, 좌측 방 안에 숨어 있는 두 명의 형체가 미미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파킨슨 씨가 어느 분이시죠?”
에스카는 좌측으로 향하며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접니다. 어쩐 용무로 찾아오셨나요.”
돌아온 남자의 대답에 에스카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바로 찾아온 것 같으니까.
파킨슨이란 이름은 그저 적당히 둘러댄 핑계에 불과했다.
“이 농장에서 생산되는 밀을 전매하려고요.”
“흠, 굳이 저희 농장을 선택하신 이유가… 그보다 이쪽으로 와서 앉으시지요. 거기는 빈방입니다.”
대거를 감춘 남자는 의뭉스러운 눈길로 에스카를 바라보았다.
“아, 그런가요? 문짝의 모양이 특이해서 그만.”
고개를 돌린 에스카는 내민 손을 움직여 문을 매만졌다.
“저도 모르게 실례했네요, 죄송합니다.”
에스카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사과의 말을 전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걸어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저희는 밀을 팔 생각이 없습니다. 이미 거래처도 있고요.”
“그렇군요.”
“미안하게 됐습니다.”
“아니에요. 무작정 찾아온 제 잘못이죠.”
덤덤히 대답한 에스카는 남자를 지나쳐 소파로 향했다.
덩달아 움직이는 남자의 시선.
대거를 감춘 남자의 눈이 에스카를 몸을 훑기 시작했다.
“먼 길 오셨는데 그냥 돌려보내기도 그렇고… 혹시 술 좋아하시면 한잔하고 가시죠?”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요.”
“마침 좋은 술이 들어왔는데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네.”
남자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찬장으로 다가갔다.
이윽고 호리호리한 병과 잔을 들고 돌아와서는.
“드시죠.”
에스카를 향해 술잔을 내밀었다.
쪼르르 흘러내리는 선홍색 와인.
술을 따르던 남자는 미끄러지듯 다가와 에스카의 곁에 앉았다.
두 사람의 거리는 급격하게 좁아졌고.
“드시죠.”
남자의 투박한 손이 에스카의 허벅지로 올라왔다.
끈적한 남자의 눈길이 은밀한 곳으로 향하던 그 순간.
“커헉!”
뻗어 나온 에스카의 암기가 남자의 목을 꿰뚫고 지나갔다.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붉은 피…….
목을 부여잡은 남자는 눈알을 뒤집으며 고꾸라졌다.
때마침 들려오는 짧은 장치 소리.
찰칵―
좌측 방문이 열리며 설치된 마법구가 작동했다.
콰아아아앙!
커다란 폭발과 함께 두 남자의 몸이 날아갔고, 붉은 화염이 솟구치며 문 앞을 집어삼켰다.
이제 남은 사람은 두 명.
울대를 갈라 낸 에스카의 곡도가 완드를 쥔 남자를 향해 날카롭게 날아들었다.
“크윽!”
황급히 막아 보지만 소용없다.
에스카의 곡도는 이미 목표를 지나쳤으니까.
완드를 쥔 남자의 손이 허공을 돌아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남자는.
“어어?”
바닥을 구르는 자신의 손을 보며 멍청한 소리를 중얼거렸다.
이어지는 에스카의 곡도가 남자의 목덜미를 가르던 찰나.
슈악―
남은 손에서 날아간 암기가 또 다른 남자의 미간을 뚫어 버렸다.
쿵.
거실로 달려 나오던 남자는 맥없이 쓰러졌다.
상황은 그렇게 종료되었고.
“7성이 좋긴 좋네.”
머리를 쓸어 넘긴 에스카는 승급의 소감을 짧게 내뱉었다.
* * *
지하에 내려온 빅터는 얼굴을 구기며 철창을 살폈다.
좁은 공간에 모여 있는 수십 명의 사람들.
자물쇠를 부순 에스카는 그레이시와 함께 사람들을 풀어줬다.
잠시 후.
소환자를 대신해 철창에 남은 건 살아남은 로이드의 졸개들과 빅터였다.
“로이드는 어디에 있나.”
“모른다.”
“금제가 걸렸을 테니 말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차라리 말하고 편하게 죽는 게 나을 게다. 버티면 괴롭게 죽을 테니까.”
빅터는 얼음장 같은 눈빛으로 로이드의 행방을 물었다.
손속을 두지 않는 고문은 빅터의 또 다른 특기.
조용히 시작된 빅터의 추궁은 사라진 두 명의 목숨과 함께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진짜로 모른다고!”
“어디 있는지 알아야 말할 것 아니요!”
“우리도 로이드와 연락이 끊긴지 오래입니다. 버려진 것이 아닐까 의심되는 상황이란 말입니다!”
두려움에 빠진 로이드의 부하들은 제각각 소리치며 아우성쳤다.
빅터의 질문이 자신에게로 향하면 죽음에 이르러야 끝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짐작 가는 곳을 다 말해 봐라.”
그런 놈들을 보며 빅터는 잔잔히 말을 이었다.
불안한 마음을 달래 주듯, 느슨한 표정을 지으며 녀석들을 바라보았다.
반응은 있었다.
공포에 잠식된 놈들은 달라진 빅터의 분위기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정확하진 않지만 아리안으로 간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퍽!
하지만 남자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터져 버린 머리는 더 이상 말을 이어 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
“시바아아아아알!”
“로이드, 이 개새끼야아아아아!”
퍽―
퍽―
욕설을 퍼붓던 다른 녀석들도 수박이 터지듯 뇌수를 흩뿌렸다.
작은 거역도 용서치 않는 지독한 금제.
“심하네. 로이드 성격이 원래 이랬었나요?”
그레이시는 고개를 저으며 참혹한 광경을 외면했다.
“30년이면 적은 시간이 아니지. 사람이 바뀌기엔 충분할 게다.”
“그렇기야 하지만 이건 좀 과하네요.”
불편한 감정을 드러낸 그레이시는 투덜거리듯 빅터의 말을 받았다.
애초에 순한 인간도 아니었고.
생각해 보면 가장 먼저 진을 배신했던 게 다름 아닌 카론이었다.
로이드라는 이름을 쓴 배신자.
그런 남자의 금제이니 이런 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로이드의 행방을 또 어디서 찾죠? 부하들이 다 죽었으니 꼼짝없이 놓치게 되는 거잖아요.”
에스카는 지키고 있던 소환자들을 떠나 빅터에게 다가왔다.
이번엔 쉽게 풀리나 싶었건만.
사건의 실마리를 쥔 남자는 이곳에 없었고, 연결 고리마저 사라졌다.
남은 이들은 피해자일 뿐.
로이드와의 연관성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쩌실 생각입니까.”
“일단 시작의 마을로 데려가야지.”
그레이시의 질문에 답하며 빅터는 철창을 나섰다.
이 귀중한 시간에 헛걸음이라니.
씁쓸한 기분을 달래며 빅터는 계단으로 향했다.
한데 그 순간.
“저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사람들 틈에 있던 한 여인이 쭈뼛거리며 손을 들었다.
“로이드의 위치를 말하는 건가.”
“네…….”
30대 후반에 가까운 여인은 말끝을 흐리며 대답했다.
그녀의 능력은 링크.
이어진 설명에 따르자면, 타인의 시스템 창을 들여다볼 수 있는 미묘한 능력이었다.
쓸 만한 듯 쓸모없는 기능이랄까.
“처음 소환됐을 때 로이드와 링크했었어요.”
그냥 들여다보는 것이 전부였던 그녀의 능력은 안타깝게도 로이드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하여 이렇게 쓰레기장에 처박힌 신세가 된 것.
“지금 바로 찾을 수 있나?”
“지금은 아무 반응이 없지만 얼마 전에는 있었어요.”
용도가 불분명했던 여인의 능력은 사라질 뻔했던 로이드와의 접점을 다시금 되살리고 있었다.
“며칠 전만 해도 게이트라는 정보가 우르르 떠올랐거든요.”
“그게 무얼 말하는 건가.”
“음… 보통은 출입구를 뜻하죠. 다른 차원과 이어 주는 통로의 개념으로도 쓰이기도 하고요.”
빅터를 앞에 둔 여인은 긴장된 얼굴로 차분히 설명했다.
차원을 잇는 통로라.
그레이시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마계의 입구를 말하는 것 같네요.”
“그럴 수도 있겠군. 계속해 보게.”
그리고 빅터는 그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그중에 유난히 튀는 좌표가 하나 있었는데, 지금은 비활성화라 확인이 안 돼요. 하지만 활성화되면 바로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게이트 좌표가 다시 뜬다고 해도 로이드가 거기로 갔을 거라는 보장이 없지 않는가.”
“아, 그게……. 지난번에 게이트 목록이 활성화됐을 때 로이드가 그곳 좌표를 추적하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거죠.”
세 사람을 사이에 둔 여인은 또박또박 자신의 경험을 설명했다.
* * *
경계석 탓인지 모르겠지만, 지난밤은 조용히 지나갔다.
덕분에 숙면을 취해 컨디션은 최상.
느긋하게 시작한 탐색은 여전히 안정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래서야 산책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상황이 아닌가.
흩어지는 긴장감을 유지하며 숙련도를 확인했다.
승급까지 남은 숫자는 고작해야 한 자리.
‘오늘은 승급했으면 좋겠는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수련 단계는 아직 레벨 10을 넘지 못했다.
성장 가속이 900%를 육박하니 사실상 빈둥거려도 이미 10레벨은 넘었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련도가 멈춘 건, 조금 남은 숫자를 대충 올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손맛이라고 해야 하나.
실전 중에 상승하는 쾌감을 느끼고 싶어서였다.
[둔기 마스터리가 상승합니다.]
전투 중에 떠오르는 시스템 문자는 어둠속의 빛처럼 극적인 반전을 준다.
이 감각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이 맛을 아는 이상, 허공을 가르며 레벨을 올리는 건 용납하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꾹꾹 참고 있었는데.
‘몬스터가 왜 없냐고.’
당최 휘두를 놈들이 없으니 얼마 남지 않은 숙련도가 채워지질 않고 있었다.
토끼라도 한 마리 나타나면 좋겠는데 말이다.
그런 나의 바람이 통한 것일까.
“몬스터다!”
겨울은 기다렸다는 듯 소리치며 어딘가로 총구를 겨눴다.
하지만 나의 몸은 이미 날기 시작했으니.
“어딜 감히 새치기를!”
치켜든 나의 해머는 기척을 향해 내리꽂히고 있었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