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허허, 소인족을 실제로 보게 되다니… 이거야 말로 놀랄 일이군.”
가장 늦게 도착한 반크스는 지하 도시를 바라보며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그러게 말입니다. 말로만 듣던 소인족의 기술들이 모두 다 사실이었던 모양입니다.”
반크스와 함께 온 듀란 역시 호기심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설렘도 잠시.
“드워븐이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소인족이 아니라 드워븐이라고 하셔야 해요.”
들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나는 조용히 주의 사항을 전했다.
굳이 작다는 걸 강조할 필요가 없잖은가.
“민감한 것 같더라고요.”
“아, 이해했습니다.”
끄덕거리며 답한 듀란은 이내 의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이 안 보입니다. 여기도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흐음, 그러고 보니 경의 말이 맞는 것 같군요. 이방인이 온 것치곤 과하게 차분한 것 같습니다.”
듀란의 의문에 수긍한 반크스는 들뜬 기분을 가라앉혀 침착하게 상황을 주시했다.
그제야 보이기 시작하는 낯선 도시의 풍경들.
차분한 눈으로 바라본 지하 도시는 어딘가 모르게 부자연스러웠다.
텅 비어 버린 느낌이랄까.
구경 나온 사람은 둘째 치고, 경계하는 군인조차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바깥 문제야 우리도 알지만 그 때문은 아니라네.”
그에 대해 욜란드는 착잡한 얼굴로 대답했다.
내부의 속사정을 굳이 말해 줄 필요는 없겠지만.
“본래 드워븐은 자손이 귀했지. 게다가 심각한 성비율 문제로 인해 결혼 제도 자체가 무너지고 말았네.”
족장 욜란드는 거리낌 없이 부족의 얘길 꺼냈다.
마치 신세 한탄을 하듯 말이다.
“결혼 제도가 무너졌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사람들이 혼인을 안 한다는 건가요.”
“그 반대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됐지. 남자가 턱없이 부족했거든.”
욜란드는 고개를 저으며 듀란의 말에 대답했다.
비정상적인 남녀의 구조.
어쩔 수 없이 부족엔 일부다처제가 자연스럽게 정착됐다.
보통 5∼10명의 부인을 두었고, 많은 경우 20명이나 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부럽군요…….”
“부러울 것 없네. 그것은 저주였으니까.”
하지만 출산율은 계속 줄어들었고, 결국은 근친혼까지 이뤄지게 됐다.
“자녀 중에 아들이 태어나면 시집 못 간 누이들과 그냥 함께 사는 거지.”
그렇게 상황은 더욱 나빠지며 대가 끊어지기 시작했다.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유전병 같은 거 아닌가요?”
듣고 있던 겨울은 눈썹을 찡그리며 반문했다. 그러고는 진지한 얼굴로 자신의 생각을 이어 갔다.
“부계 혈통이 같은 사람들이 늘어나 그 사람들끼리 또 근친혼을 한다라……. 이러면 몇 세대 만에 심각한 유전병에 시달리게 돼요.”
“혈통 질환을 말하는 건가?”
“그런 개념이죠. 지구에도 그렇게 사라진 왕족이 있었어요.”
“우리도 뒤늦게 그런 문제를 알아차렸지만 이미 늦어 버린 상태였다네.”
똑 부러지는 겨울의 말에 욜란드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유전병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모르겠지만.
“마지막 아이를 본 것이 벌써 20년이 넘었네.”
자손이 귀한 상황이라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에게 전해 들은 드워븐족의 인구는 고작해야 백여 명 정도.
그나마 남아 있는 사람들은 최대한 근친혼을 피했던 가문이었다.
“외부와 고립된 부족의 고질적인 문제에요. 직계 근친을 피한다고 해도 결국 어느 시점에선 섞이게 되거든요.”
소규모 집단의 외모가 비슷해 보이는 건 모두가 이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사촌간의 결혼도 금지하고 있지. 가끔 도시로 나가 배우자를 만나는 경우도 있다.”
설명을 듣던 부족장은 겨울의 말에 동조하며 나와 별을 바라보았다.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저렇게 눈을 빛내는지 모르겠지만.
“두 사람이 결혼하면 부족 혈통에 큰 도움이 되겠군.”
부족장은 뜬금없이 중매쟁이 역할을 자처하며 나섰다.
그에 별은 무심한 듯 입을 열었고.
“흥,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
입매를 살짝 올리며 돌아섰다.
갑자기 야릇해지는 이 분위기라니.
“그건 그렇고 지금 바깥 상황은 알고 계신 건가요?”
무안해진 나는 대화의 흐름을 바꿔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전했다.
변해 버린 대수림의 생태와 초토화된 사라센까지.
“그래서 지금 마계의 입구를 찾아다니는 중이죠.”
“역시 그랬었군. 어쩐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네.”
길게 이어진 나의 설명에 욜란드는 무거운 말투로 대답했다.
“원래 바깥출입을 안 해 왔지만, 이번엔 아예 숨어 버렸지. 예감이 좋지 않았거든.”
“뭔가 아시는 게 있나요?”
“28년 전 지옥이 떠오르더군. 그때와 같은 느낌이 들어 은둔을 결정했네.”
질문에 답하는 욜란드의 말은 다름 아닌 인마대전이었다.
“그게 또 시작됐어요.”
“흐음.”
“우리는 마족과 싸울 건데 드워븐은 어쩌실 생각인가요.”
사실을 전한 나는 계획을 물으며 욜란드를 바라보았다.
길게 이어지는 침묵.
나름 깊은 고민에 잠긴 듯 했지만, 기대는 하지 않았다.
고작 백 명의 인구가 아닌가.
무언가를 결단하고 움직이기엔 부족의 숫자가 너무도 위태로웠다.
“드워븐은 손재주 하나로 살아오던 부족이라네. 성격은 호전적이지만 싸움에 소질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지.”
그런 나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으니, 욜란드는 부족의 특징을 설명하며 서론을 마쳤다.
그러고는 어두운 낯빛으로 본론을 말했다.
“우리는 이곳에 남아 부족을 지켜야 한다네. 이해해 주게.”
“물론이죠. 더 큰 위험이 올지 모르니 조심하세요.”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
비장함마저 느껴지는 욜란드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의를 당부했다.
목숨을 강요할 명분은 그 어디에도 없으니까.
“알겠네.”
조용히 답하는 욜란드에게 부족장의 시선이 머물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의 먼 뒤에 있는 검은 암석이었다.
“결계석이 많이 매장돼 있는 것 같던데, 우리에게 조금 나눠 줄 수 없는가. 그렇게 된다면 참으로 고맙겠군.”
대화에 참여한 부족장은 결계석에 대해 넌지시 사심을 드러냈다.
“결계석? 그야 지천에 널렸으니 필요한 만큼 가져가게.”
“고맙다. 드워븐의 호의는 잊지 않겠다.”
“신경 쓸 것 없네. 이 동굴 바닥에 깔린 게 죄다 결계석이니까.”
시원스레 답한 욜란드는 고개를 돌려 경작지를 바라보았다.
“저 돼지들이 파먹는 얌얌은 결계석 주변에 많이 자라지. 조금만 파내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네.”
“알겠다. 그렇다면 조금 얻어가도록 하겠다.”
“하지만 그냥 가져가면 큰 효과가 없을 걸세. 저 멧돼지처럼 넘어오는 녀석들도 있을 테고.”
“흐음, 결계석만으론 부족하다는 얘긴가?”
“당연하지. 결계석은 그저 몬스터들이 싫어하는 느낌을 전하는 것뿐이네. 증폭기가 장착돼야 얼씬도 못하지. 이 동굴 입구에도 장착돼 있고 말이야.”
욜란드는 미처 몰랐던 사실을 우리에게 전했다.
하지만 풍이들은 들어왔잖은가?
“저 녀석들이 들어올 수 있던 건 증폭기가 고장 났기 때문이네.”
“고장이요?”
“나도 이상해서 확인해 보니 고장이 났다더군. 결계석 하단에 묻어 두는 게 기본지만, 드물게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네.”
설명을 듣던 나는 작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욜란드의 말을 듣다보니 출처가 궁금해진 것이다.
이곳처럼 결계석을 심어 둔 장소.
“흠… 혹시 시작의 마을이라고 아세요? 거기도 이곳처럼 결계석이 심어져 있거든요.”
내가 아는 그 장소 역시 몬스터의 침입이 불가했기 때문이다.
“시작의 마을? 아… 인간들의 전초기지를 말하는 거군. 맞네. 그곳에도 우리의 증폭기가 장착돼 있지. 결계석도 여기서 가져간 걸세.”
역시…….
돌아온 대답은 나의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따라들 오시게.”
욜란드는 우리를 데리고 어딘가로 향했다.
목적지는 넓게 지어진 2층 건물.
안으로 들어선 욜란드는 접시처럼 생긴 증폭기 앞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필요한 만큼 가져가게.”
하여 우리는 각 부대에 필요한 숫자를 계산에 백 개를 추려 냈다.
너무 많이 챙기나 싶지만 그렇지도 않다.
벽면 가득 쌓인 것 중에 고작 작은 한 칸을 덜어 냈을 뿐.
여전히 이곳은 증폭기로 가득했다.
“다됐으면 이쪽으로 와 보게나.”
반대쪽으로 향하는 욜란드를 따라 우리는 잰걸음으로 뒤를 쫓았다.
먼저 도착한 그가 나에게 내민 것은.
“이것은 마력 총이라고 하네.”
동그란 파이프가 달린 기묘한 형태의 막대였다.
아니, 막대라고 하기엔 뭔가 좀 이상하고…….
용도가 떠오르지 않는 이 기물은 손에 쥘 수 있도록 손잡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총이요?”
그런 기물을 보며 겨울은 눈동자를 키웠다.
그렇다는 건.
“여기에도 총이라는 무기가 있군요.”
“지구에도 있었어?”
“네. 이곳 세상의 창칼과 같다고 보면 돼요. 지구인들은 총을 들고 싸우니까요.”
“아…….”
“신기하네. 총이 있다니.”
역시나 겨울에겐 익숙한 형태의 무기였다.
그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겠나.
“지금 지구라고 했는가?”
“네.”
“사실 이건 우리 드워븐 족의 생각이 아니었네. 28년 전에 대수림에서 만난 낮선 사람들의 지식이었지.”
과거에 소환된 신탁의 기사들과 접점이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나와 다수의 부족원들이 그들에게 목숨을 빚지는 사건이 있었다네. 대대적인 몬스터의 습격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 덕에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지.”
이런 식으로 말이다.
“마력 총은 그때 알게 된 기술을 우리 장인들이 재창조한 것이라네.”
이유야 어찌됐건 이들은 그렇게 이계의 문명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사람들 이름을 기억하나요?”
특별한 이름을 기대하며 욜란드에게 물었다.
이를테면 진이라던가, 그레이시 같은 이름 있잖은가.
“이름은 알지 못하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질문했지만 원하는 대답을 듣진 못했다.
딱히 실망할 내용은 아니었기에 조용히 끄덕이며 마력 총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 순간.
“이름은 모르지만 엄청난 괴력을 가진 사내는 기억하고 있지. 체격도 장대했고, 여러모로 대단한 남자였어.”
추억을 소환한 욜란드는 아련한 눈으로 기억을 더듬어 갔다.
“큰 체격에 괴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셨나요?”
“그렇다네. 마족들에게서 우리를 구할 때도 그 남자 혼자 휩쓸다시피 했다네.”
욜란드는 눈을 빛내며 나의 말에 답했다.
그의 일화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빨래를 수월하게 도와주는 세탁기나, 냉기를 가둬 음식을 보관하는 냉장고라는 기물도 알려 주었다고 했다.
그 외에도 높은 곳에 공을 집어넣는 특이한 운동을 전해 줬는데.
“저것이 그 운동기구일세. 농구대라고 하지.”
욜란드가 가리킨 기구는 수직으로 뻗은 높은 기둥에 넓은 판자와 둥그런 링이 달려 있었다.
“농구를 알려 줬다고요?”
그에 겨울은 머리를 긁적이며 욜란드의 키를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덩크슛은 영원히 볼 수 없겠네요.”
뜻 모를 말을 남기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정확한 이유야 당장은 알 수 없지만, 농구대라는 걸 직접 보니 드워븐이 할 만한 운동은 아닌 것 같았다.
고블린만 한 키에 3m는 너무 높지 않겠나.
“덩크슛이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공 던지는 재미가 쏠쏠하더군.”
어쨌거나 그들은 즐겁게 운동했다고 한다.
그 밖에도 공을 던지고 치는 야구라든가, 바닥에 놓고 발로 차는 축구.
심지어 호두만 한 공을 막대기로 치며 노는 골프라는 운동도 전수해 줬다고 한다.
게다가 그 괴력의 남자는.
“잎 넓은 채소를 맵게 양념해 먹는 음식을 알려 주었지. 그게 아주 끝내줬다네. 이젠 그거 없인 밥을 먹을 수 없을 정도지.”
이들의 식문화까지 변화시키고 사라졌다고 한다.
이쯤 되면 눈치채지 못하는 게 이상할 터.
“그대의 부친이 이곳에 다녀가신 것 같군.”
부족장은 마력 총을 내게 넘기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