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이런 데서 발견되다니 의외로군. 좀 더 깊은 곳에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암석 앞으로 다가간 부족장은 쪼그리고 앉아 빗살무늬를 들여다보았다.
크기는 대충 웅크린 사람 정도.
짙은 어둠을 머금은 익숙한 암석의 표면은 마력의 샘에서 접했던 결계석과 똑같은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것뿐인가. 좀 더 있다면 다른 부대원들에게 전해 줬으면 좋겠는데.”
부족장은 아쉬움을 드러내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몬스터의 접근을 막아 주는 광물이 아니던가.
지금과 같은 상황이야 말로 결계석의 존재가 빛을 발할 때였다.
하나 찾아낼 방법이 없었다.
애초에 드러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땅속에 매장되었던 것들이 풍이들로 인해 우연히 드러났을 뿐이었다.
그것도 경계석이 아닌 다른 작물을 찾는 과정에서 말이다.
“아쉽지만 이거라도 챙겨 가도록 하지.”
부족장은 결계석 주변을 파내며 땅속에 묻힌 부분을 걷어 내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꾸웩?
다른 냄새를 맡은 풍이들이 숲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번에 또 무엇을 찾기 위해 이러는 걸까.
갸우뚱하던 술은 지체 없이 몸을 움직여 녀석들을 따라 달렸다.
“거참…….”
결계석을 파내던 부족장은 일손을 놓고 술을 쫓았다.
또다시 시작된 정처 없는 추격전.
하지만 추격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녀석들이 사라진 숲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고, 좁은 수풀을 빠져나온 부족장은 절벽 앞에 멈춰선 술과 두 풍이를 발견했다.
낮게 솟은 절벽과 위를 뒤덮은 빽빽한 덩굴들.
킁킁거리던 풍이들은 난데없이 발을 구르며 절벽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설마 들이박는 건가?
자해는 아닐 거라 되뇐 부족장은 두 풍이를 바라보며 수상쩍은 눈길을 보냈다.
그렇게 상황을 살피던 찰나.
“야이 미친놈들아!”
절벽으로 달리는 녀석들을 향해 술이 큰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하나 우려했던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고.
후드득.
덩굴을 뚫은 태풍과 폭풍은 시커먼 구멍 속으로 모습을 감춰 버렸다.
저런 곳에 동굴이 숨겨져 있었다니.
사태를 파악한 술은 녀석들을 따라 굴속으로 뛰어들었다.
뒤를 이어 도착한 부족장도 마찬가지. 모습을 감춘 술을 쫓아, 검게 벌어진 입구로 망설임 없이 달려들었다.
잠시 후.
부족장은 거대한 공동을 바라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곳을 채우고 있는 것들. 즉, 높고 넓은 공동에 들어선 엄청난 규모의 건물들 때문이었다.
좀 더 간략하게 설명하면.
“…지하 도시?”
이곳은 지하에 만들어진 거대한 도시라고 할 수 있었다.
어째서 이런 것들이 존재하는지 모르겠지만, 부족장은 정신을 다잡으며 풍이들과 술을 찾았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이 사달의 주범들이었다.
그다음 시선이 머문 곳은 가지런히 정리된 땅이었는데.
녀석들이 파고 있는 넓은 고랑은 이름 모를 뿌리 식물의 재배지였다.
이래서 그렇게 환장했던 건가.
그런 풍이들 너머에 서 있던 술은 어딘가를 바라보며 홀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손에는 쌍도끼를 꺼내든 채.
신기한 건 사람은 하나인데 들리는 목소린 두 개였다는 것이다.
“좋은 말로 할 때 도끼를 내려놓으시지.”
“흥, 네놈이야 말로 그 요상한 막대기를 버려라.”
이렇게 말이다.
거대한 공동을 앞에 둔 술은 등을 돌리고 선 채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결계석이 잘못됐나? 저 돼지 새끼들은 어떻게 들어왔지?”
“네놈이야 말로 땅속에 뭘 심은 거냐?!”
“그 눈깔은 장식인가 보군. 당연히 먹고살 작물이 아니더냐!”
“풉, 멧돼지와 주식이 겹치다니. 저런 걸 먹고 사니 네놈이 그 모양으로 생긴 것이다!”
큰소리로 답하는 술을 향해 부족장은 기웃거리며 다가갔다.
대화는 이어지는데.
상대가 보이지 않는다.
가까이 이동해 살펴보지만 역시나 사람은 없었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부족장은 술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며 의뭉스런 표정을 지었다.
하나 그것도 잠시.
“헉, 뭐냐. 이 대갈 괴물은!”
시선을 내린 부족장은 커다란 머리의 고블린을 보며 할버드를 내밀었다.
변종 고블린 같은 건가?
사람과 꼭 닮은 놈의 생김새에 부족장은 놀란 가슴을 달래며 창대를 부여잡았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굵직한 저음의 목소리였으니.
“대갈 괴물이라고 했는가. 죽는 게 소원이라면 죽여 주마.”
커다란 머리의 고블린은 인간의 말을 하며 부족장을 노려 보았다.
* * *
대수림 하늘 위로 오색의 불꽃이 화려하게 빛났다.
이어서 내려앉는 색색의 연기들. 저것은 긴급 소집을 뜻하는 특별한 신호였다.
“무슨 일이지?”
신호가 올라온 방향은 반투족의 구역이었다.
하지만 경로가 이상했다.
거리를 유추해 봤을 때 남쪽으로 많이 치우쳤음을 알 수 있었다.
“입구가 열린 게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르겠네.”
뭐가 됐건 이유가 있으니 신호를 보내지 않았겠나.
기대 섞인 겨울의 추측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에비오, 빠르게 갈 거니까 잘 따라붙어라.”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경로를 벗어난 지역을 향해 펜리르를 이끌었다.
* * *
짧지 않은 거리였건만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중간에 마주한 몬스터는 고작 한 마리뿐. 녀석은 나와 마주치기도 전에 천벌을 맞고 육포가 돼 버렸다.
그 외에 별다른 일은 없었고.
“저기 사람들이 나와 있네요.”
겨울의 손짓과 함께 우리는 동굴 입구에 도착했다.
그러고는 반투족의 안내에 따라 통로에 들어섰다.
이런 사이즈를 가진 건 흔한 게 아닌데, 길게 이어진 통로는 상당한 크기를 가진 동굴이었다.
한데 이곳은 뭐 하는 곳일까.
규모부터 형태까지 예사롭지 않았다.
단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들어오면서 얼핏 봤지만, 동굴 입구 주위는 결계석이 놓여 있었다.
때문에 펜리르도 들어오는 걸 거부했으니 특별한 뭔가가 있다는 건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런 나의 예상은.
“이게 다 뭐야.”
정확하게 맞아 들었다.
마력의 샘을 확장시키면 이런 모습으로 변하게 될까.
엄청난 크기의 공동에는 독특한 형태의 건물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이런 건 들어 본 적도 없었는데.
미지의 세계를 접한 나는 할 말을 잊은 얼굴로 지하 도시를 바라보았다.
사람 눈은 다들 비슷한 건지.
“와… 영화 세트장 같다. 땅속을 놀이동산처럼 만들어 놨네요.”
뒤따라 들어온 겨울도 휘둥그레 눈을 뜨며 탄성을 자아냈다.
모르는 말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지만 상관없었다. 결론은 엄청나단 얘기일 테니까.
그렇게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던 나는 거슬리는 뭔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바라본 그곳엔, 작아도 너무 작은 남자가 술을 마주보며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소인족?”
“이건 또 뭐하는 놈이지? 건방지게 소인족이라니. 오늘만 3번째 반복하고 있으니 잘 들어라. 우리는 찬란한 기계 문명의 주인이자 위대한 장인의 혈통인 드워븐 일족의 후예로.”
“그러니까 소인족…….”
“닥쳐라! 그것은 열등한 너희 족속들이 붙인 저열한 이름이다!”
소문만 무성했던 신비의 일족.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자신을 가리켜 드워븐이라고 말했다.
“난리 통에 경비대를 철수했더니 이런 잡놈들이 몰려드는군.”
“뭐라, 잡놈? 반 토막 같은 놈들이 어디서 함부로 주둥이를 놀리는가!”
발끈한 술의 외침에 드워븐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는.
“한판 벌여야겠군. 네놈들이 이긴다면 손님으로서 환영해 주마.”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결을 청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결투라면 우리 반투족이 전문이다.”
“좋구나. 네놈이 나올 테냐?”
“후후, 나와 겨루기엔 아직 이르지. 우리 막내를 꺾으면 상대해 주마.”
“미친놈.”
졸지에 지명을 받은 별은 술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겨울에게 배운 지구의 욕.
빳빳이 손가락을 세운 별은 피식거리는 술을 지나 드워븐 남자 앞으로 다가섰다.
“나는 드워븐의 족장 욜란드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아무에게나 알려 줄 하찮은 이름이 아니다.”
“호오, 마음에 드는군. 실력도 입담을 따라오는지 볼까.”
욜란드는 손에 쥔 막대를 내려놓고 철퇴를 들었다.
여유 만만한 허세는 덤.
“선공은 양보하지.”
드워븐 족장 욜란드는 손끝을 까딱거리며 별을 도발했다.
하지만 별은 동요하지 않았고.
카앙!
묵묵히 대검을 날려 욜란드의 철퇴와 격돌했다.
짐작되는 그의 기량은 6성과 7성의 그 어디쯤일까.
객관적으로 따지자면 별의 실력이 한수 아래였다.
하지만 반투족의 전투는 그것만으로 평가할 수 없다.
오러가 없는 대신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외부로 드러나는 지표가 없을 뿐.
육체를 다루는 별의 실력은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자신의 무기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카아앙!
이렇게 말이다.
별의 대검을 마주한 드워븐 족장은 얼굴을 찡그리며 칼을 거두었다.
저 느낌 내가 잘 알지.
당혹스런 그의 심경이 주름진 미간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방어가 무색한 공격이니까.
내부를 진탕시키는 별의 대검은 마주한 자에게 색다른 고통을 선사한다.
처음보다 두 번째가 무겁고, 그 다음은 더 괴롭다.
공격을 해도 충격이 되돌아오니 상대하는 입장에선 정신이 혼미해진다.
무엇을 해야 할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상황.
그렇게 망설이는 사이 몸 안은 엉망으로 망가져 간다.
바로 내가…….
그렇게 죽을 뻔했다.
“대검을 장검처럼 다루네.”
가볍고 유연한 별의 공격을 보며 나는 감탄을 섞인 말을 중얼거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죽자고 휘두르더니.
지금의 별은 강함보다는 부드러운 연계에 집중하고 있었다.
카앙― 캉! 카강―
무기 사용법을 터득했다는 건 바로 이 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큰 거 한 방이 아닌 자잘한 연속 공격.
체내에 생긴 파문이 사라지기 전에 또 다른 충격파로 파문을 극대화시키고 있었다.
저것이 얼마나 끔찍한 느낌인지는 당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 않은 경험인데…….
드워븐 족장 욜란드는 최악의 해법을 찾아 철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고통을 참고 더욱 거세게 공격하는 것.
나 역시 저 방법으로 소대가리를 이겼지만, 그것은 겨울의 도움과 충격 내성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래 못 가겠네.”
맹공을 펼치는 욜란드를 보며 나는 쓰게 혀를 찼다.
저렇게 가다간 제풀에 지쳐 무너질 터.
거칠게 몰아붙이던 욜란드는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철퇴를 떨어뜨렸다.
“크으윽.”
남자는 핏물을 게워 내며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그러고는 황망한 표정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 뇌까렸다.
“이럴 수가…….”
심정은 이해하지만 억울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진탕하는 충격을 갈무리할 줄 모른다면 8성이 온다고 해도 속수무책인 까닭이다.
“더 할 생각이 없다면 약속을 지켜라.”
대검을 거둔 별은 덤덤한 얼굴로 욜란드를 추궁했다.
그에 남자의 고개가 위로 향했고.
“좋다. 드워븐의 이름으로 그대들의 방문을 환영한다.”
욜란드는 왼쪽 가슴에 주먹을 대고 큰소리로 우리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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