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한참을 더 이동한 끝에 나는 목표로 했던 개활지를 발견했다.
내 기억이 틀린 건가.
예상보다 훨씬 깊이 들어온 이후에야 이곳을 찾을 수 있었다.
일단 가장 먼저 할 일은 마력 감지기 설치였다.
개활지 중간을 찾아간 나는 적당한 자리를 골라 감지기를 장착시켰다.
이제 해야 할 일은 주변을 정리하는 것.
혹시 모를 위험 요소 제거를 위해 인근에 있는 몬스터를 모조리 없앨 예정이다.
“다녀올 테니까 여기 있어.”
펜리르와 겨울을 남겨 두고 홀로 주위를 빠르게 살폈다.
하지만 역시 몬스터는 적다.
기분 나쁠 정도로 고요한 이 숲은 대수림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평화로운 모습으로 나를 반겼다.
“얼마나 크게 뒤통수를 치려고 이러는 거야.”
달갑지 않은 숲의 상황에 절로 푸념이 흘러나왔다.
환경이 변했다는 건,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더욱 많이 생겼다는 뜻이기도 하다.
예상을 뛰어넘는 그 무엇들.
낯선 선택지를 마주한 인간의 생명은 한없이 작고 초라해지기 때문이다.
불안한 마음을 뒤로하고 몬스터 수색을 계속했다.
잊을 만하면 하나씩.
말 그대로 수색을 해야 마주칠 만큼 몬스터들의 모습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한 가지 특이한 건, 남아 있는 몬스터 전부가 기존에 있던 대수림 토종이라는 것이다.
‘모조리 사라센으로 이동했나.’
새로 등장한 놈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이러한 나의 생각을 뒷받침해 줄 증거일지도 모른다.
훗날은 일단 재껴 놓고…….
지금만 놓고 보자면 오히려 좋은 상황이다.
일단 탐색이 수월해질 테니, 마력 감지기 설치 작업도 빠르게 진행될 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평화가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변해 버린 대수림의 밤은 언제든 돌변해 모든 생명을 앗아갈 수 있다.
그러나 어둠과 빛은 늘 공존하는 법.
― 대수림에서 인간이 어떻게 버틸 수 있는지 아세요?
― 잘 싸워서?
― 물론 그런 것도 있지만, 몬스터의 감각기관 때문이에요.
나는 얼마 전 모하비에서 있었던 베르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주간에 활동하는 마수와 야간에 활동하는 마수의 특징이 어떻게 다른가.
― 공통적으로 마나에 반응하지만, 특히나 심야에 움직이는 몬스터들은 거의 대부분 마나 감지에 의지해요.
그에 대해 베르는 이러한 결과를 나에게 알려 줬다.
― 드물게 일반인이 대수림에 들어와 사고가 나는 경우가 있죠. 그런데 의외로 생존자 무리에 섞여 있는 경우가 많아요. 왜 그런지 아세요?
― 싸우지 않아서?
― 비슷해요. 우선 제거 대상에서 벗어나 있는 거죠.
이유는 마나 때문이었다.
아니, 그것이 마나가 됐건 마력이 됐건 그건 중요치 않다.
놈들은 체내에 흐르는 특별한 기운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할 뿐이었다.
그것이 뜻하는 게 무엇이겠나.
마나의 흐름을 억제한다면 놈들에게 감지되는 것을 최대한 피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대놓고 마주치면 공격당하겠지만…….
어찌됐건 변수가 없길 바라며 나는 개활지로 돌아와 은신처를 만들기 시작했다.
* * *
모습을 가릴 만한 장소를 찾은 나는 은신처를 구축하고 늘어지듯 몸을 기댔다.
종일 뭔가를 찾아다녀서 그런가.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밀려드는 피로감이 상당했다.
“용케 이런 자리를 찾았네요.”
곁으로 다가온 겨울은 은신처를 살피며 감탄하듯 얘기했다.
하지만 저 얘긴 반만 맞았다.
“없으면 만들면 되니까.”
“이걸 만들었다고요?”
“여기 이 바위랑 저쪽에 통나무들은 내가 옮겨 둔 거야.”
마땅한 자릴 찾지 못한 나는 적당한 장소를 발견해 이리저리 손길을 보탰다.
덕분에 이렇게 숨을 장소를 마련했지만.
“우리는 사람이 적어서 다행이긴 한데요. 다른 부대는 위험한 거 아니에요? 뭉쳐 있으면 숨어 있기도 힘들고 발견될 확률도 클 것 같은데.”
겨울은 분리된 다른 부대에 대해 걱정스레 말했다.
“그런 면도 분명히 있지. 너의 말마따나 우리보다 발각되긴 더 쉬울 거야.”
아무리 마나를 갈무리한들 많은 인원에서 오는 노출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뭉쳐서 보낸 건, 더 이상 잘게 쪼갤 경우 생존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다 뭉치는 건요? 어차피 몬스터를 염두에 뒀다면 그게 더 안전하지 않을까요?”
“몬스터가 대상이라면 그렇겠지. 단순하게 몬스터만 신경 쓴다면 굳이 부대를 나눌 이유는 없었어.”
“그러면 왜…….”
“마족 때문이야. 두 배나 강해진 마족과 마주친다면 부대 전체가 사라지게 될지도 몰라. 그래서 나눈 거야.”
“어차피 죽을 테니 차라리 적게 죽으라고요?”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건 너무 슬픈 얘기다.”
겨울은 풀 죽은 목소리로 고개를 숙였다.
죽음을 대비한 인원 배치라니. 어린 소녀가 듣고 감당하기엔 잔인한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겨울을 보며 덤덤하게 얘기를 계속했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렇게 슬프기만 한 얘기는 아니니까.
“걱정 안 하게 생겼어요? 걸리면 다 죽을 판인데.”
“마족도 밤에는 잔대.”
“네?”
“스승님이 그러셨는데 놈들도 밤에는 거의 안 다닌대. 사람처럼 잠잘 거 다 자고 그러나 봐.”
“헐…….”
꼬맹이의 걱정을 덜어 내며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침 뱉어. 재수 없게 밤잠 없는 놈 나타나면 다 네 책임이니까.”
“그런 게 어딨어요!”
“여기 있잖아! 빨리 침 뱉어. 얼른!”
그렇게 녀석과 나는 티격태격하며 무거워진 분위기를 털어 냈다.
한데 그사이.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에비오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왜?”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말해.”
“그… 생리 현상에 한계가 와서…….”
그러고는 생뚱맞게 자신의 용변 상태에 대해 고백했다.
도대체 무슨 대답을 듣고 싶어 저런 말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널린 게 나무잖아. 아무거나 붙잡고 싸.”
나는 턱짓으로 은신처 바깥을 가리켰다.
“그게 아니라 좀 멀리 가야 할 것 같아서요…….”
“큰 거?”
끄덕끄덕.
“어쩌라고?”
“같이 가 주시면…….”
“돌았냐? 나보고 네 똥 냄새를 함께 맡아 달라는 거야? 뒈질래?”
하지만 5분 뒤 나는.
“끄으응……!”
신음과 푸드득 소릴 동시에 들으며 들고 간 해머를 움켜쥐어야 했다.
* * *
밤새 열심히 침을 뱉은 탓인지 마족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기야 대수림 전체가 썰렁해졌으니 위험도 역시 낮아졌을 터. 변수 없이 지나간 밤에 감사하며 새로운 일정을 시작했다.
“서두르자. 오늘은 좀 바쁘게 움직여 보자고.”
꼼지락대는 겨울을 번쩍 들어 펜리르 위에 태웠다.
몬스터가 없어 활동하기 편해졌으니 이 기회를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속도전.
“정신 똑바로 차리고 따라와. 찾으러 돌아가지 않을 거니까.”
“넵!”
멀찍이 떨어진 에비오를 향해 퉁명스럽게 경고했다.
그런 녀석이 안쓰러웠던 걸까.
“불쌍한데 이제 좀 살갑게 대해 줘요. 말도 잘 듣고 있는데.”
뒤를 돌아보던 겨울은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직은 이른 얘기.
“무사히 본대에 합류하면.”
나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의 뜻을 밝혔다.
“잉? 해 줄 거면 지금부터 해 주지 뭐 하러 아껴요.”
“지금은 저 상태로 지내는 게 좋아.”
그래야 녀석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조금 더 긴장하고.
조금 더 조심하는 것.
“빈틈이란 의지하는 순간부터 생겨나는 거니까.”
시선을 돌린 나는 짙은 녹음을 향해 펜리르를 이끌었다.
* * *
윈정대의 오른쪽 끝을 담당하는 건 반투족의 부대였다.
이들의 탐색 방식도 이반과 마찬가지로, 세 군데로 나눠진 소부대가 각자의 영역을 탐색하고 있었다.
그중에도 이곳은 마지막 경계 지역으로, 부족장과 술이 부대를 통솔하는 중이었다.
“긴장했던 게 무안할 정도로 지루하군. 원래 대수림이 이랬던가.”
고즈넉한 숲길을 지나며 부족장이 입을 열었다.
봄날에 꽃놀이 나온 것도 아니고…….
재미를 기대하고 들어선 길은 아니었지만, 솔직히 맥 빠지는 건 사실이었다.
“이쪽 길만 조용한 걸지도 모르지. 다른 곳은 전투가 벌어졌을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겠군.”
순순히 인정하는 부족장에게 술은 내용을 바꿔 질문했다.
“싸우고 싶나?”
“시작된 싸움이야 피하진 않겠지만 굳이 찾아다닐 이유는 없지.”
“나도 그렇다. 이렇게 느긋한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다.”
술은 치열했던 사라센을 떠올리며 여유 있는 지금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꾸웨엑?
술이 몰던 광풍이 무언가에 반응하며 코끝을 씰룩거렸다.
덩달아 부족장의 폭풍이까지.
꾸웩?
짧은 괴성을 지른 두 녀석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꼬리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말이다.
“어어억?!”
갑작스런 녀석들의 질주에 당황한 술이 고삐를 당겼다.
하지만 멈추지 않는다.
거칠게 자란 갈기를 뜯어도 소용없고, 등짝을 내려친들 아랑곳없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광풍과 폭풍은 미친 것처럼 대수림을 달려 나갔다.
“무슨 짓을 한 거냐, 술!”
“하긴 뭘 했다는 거냐! 네 녀석의 투정을 받아 주다가 이렇게 된 거 아니냐!”
통제력을 잃은 두 사람은 멧돼지의 등에서 고함을 질러 댔다.
뜬금없는 사건의 책임을 서로에게 넘기며, 고요했던 대수림을 소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아까 보니 광풍이가 무슨 냄새를 맡는 것 같던데 짐작 가는 게 없는 건가!”
“모르겠다!”
“네놈이 모르면 어쩌라는 거냐!”
“미친! 내가 돼지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알겠나!”
으르렁거리며 서로를 탓해 봐도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멈추기만 바라고 있을 뿐.
어쩌면 부족장의 말대로 냄새에 반응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데 무슨 냄새이기에 이렇게 멀리까지 달리는 걸까.
최대 5km라고 하던 녀석들의 후각거리는 이미 한참을 벗어나 경로마저 이탈했다.
이대로 가다간 원정대에서 완전히 고립될 판.
꾸웨에에에엑!
남쪽으로 달리던 광풍과 폭풍은 삐쭉 솟아오른 바위 앞에서 뒷걸음질을 치며 투레질을 해 댔다.
들락날락하며 안절부절못하는 걸 보니, 솟아오른 바위 주변으로 녀석들을 자극한 그 뭔가가 있는 모양이다.
꾸웩?
꾸웨웩?
킁킁거리며 돌아다니던 녀석들은 각자 자리에 멈춰 땅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이건 또 무슨 해괴한 상황인지.
어금니까지 동원해 땅을 뒤집은 풍이들은 감자 비슷하게 생긴 걸 캐내 허겁지겁 집어삼켰다.
그러고는 또다른 땅을 찾아 열심히 파내려 갔다.
이번에도 뭔가를 집어먹는가 싶었는데.
꾸웨웨웨웩!
별안간 녀석들은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기웃거리던 녀석들은 코끝을 들이밀다 또다시 비명을 질렀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기이한 행동들.
찹찹 거리며 무언가를 처먹던 풍이들은.
꾸웨웨엑! 하면서 발광했다.
“지랄도 풍년이군.”
지켜보던 술은 생각하길 포기하고 구경을 선택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이제는 아예 손쓸 방법도 없어보였다.
한마디로 무아지경이랄까.
녀석들은 정체 모를 뿌리 식물을 향해 광기에 가까운 식탐을 드러냈다.
그러다 기겁하길 반복하면서 말이다.
“이게 그렇게 맛있는 건가?”
곁으로 다가간 술은 작은 덩어리 하나를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생긴 건 영락없는 감자인데.
특이한 향이 나긴 하지만 딱히 맛있는 느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순간.
꾸웨에에엑!
또다시 지랄하는 광풍이 앞으로 익숙한 형태의 암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는 빗살 무늬의 암석.
“이런데 숨어 있었군.”
뒤를 따라온 부족장은 눈을 빛내며 암석을 향해 다가갔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