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오래전부터 로이드는 한결 같았다. 소환을 계속했지만 그걸로 다른 일을 꾸미지 않았지. 그저 자신을 배반한 놈들을 쫓거나, 가끔씩 큰돈이 오가는 의뢰를 받아 능력자들을 보내곤 했었다.”
건조한 사마르의 말투는 이러한 분위기에 더없이 잘 어울렸다.
감정 없이 내뱉는 과거에 대한 기억들. 그러한 사마르의 태도는 듣는 이로 하여금 더욱 몰입하게 만들었다.
“그가 욕심을 부렸더라면 뭔가 하나는 했을 텐데…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로이드는 조용했다. 소환한 사람들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알려진 내용도 없었고, 나중에 가서는 나에게 소환 의식까지 넘겼지.”
“그거야 브라함의 사정이 좋지 않아서일 거예요. 빅터의 감시가 심해진 건 그 무렵이었으니까요.”
이어진 살로메의 해명을 사마르는 묵묵히 들어 넘겼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고, 그로인해 브라함 흑마탑은 활동에 큰 제약을 받았다.
표면적으론 말이다.
“당연히 그랬겠지. 빅터의 시선을 그쪽으로 향하게 한 건 나였으니까.”
“뭐라고요?!”
“오우, 그렇게 벌떡 일어나고 그러면 안 되지. 내 손으로 예쁜 아가씨를 죽이게 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
덤덤히 앉아 있는 사마르와 발끈한 살로메.
그 사이를 가로막은 바스코는 칼끝을 흔들며 경고했다.
그런 바스코의 칼등 위에는.
“그건 네놈도 마찬가지인 것 같군.”
어느새 올라온 카리프의 검이 지긋이 얹어져 있었다.
“다들 진정하게. 빅터를 끌어들여 피해를 입은 건 오히려 나였으니까.”
“그게 무슨 말이죠? 사라센의 흑마탑은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편하게 활동했잖아요. 게다가 에르텔까지 넘겨받아 놓고는 무슨 피해를 운운하는 건가요? 저는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네요.”
저걸 지금 변명이랍시고 내뱉는 건가?
해명을 빙자한 뻔뻔한 대답에 살로메는 날카롭게 대응했다.
“브라함의 상황은 그저 구실이었다네. 로이드는 그것을 이용해 오히려 나를 이 진흙탕 속에 끌어들인 게지.”
하지만 사마르의 입장은 변함없었다. 특유의 감정 없는 그의 말투는, 로이드를 언급하며 자신이 피해자임을 강조했다.
“이봐요. 당시 브라함의 흑마탑은 정말로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것을 이용해서 뭔가를 꾸미기엔 여러모로 힘든 입장이었다고요. 당신 때문에요!”
두 사람의 입장은 좁혀질 수 없었다.
이유와 과정이 어찌됐건, 그로인해 브라함 흑마탑은 현재 괴멸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오히려 피해를 입었다니. 하… 진짜 어이가 없네. 이런 상황에 그런 표현을 쓰면 안 되죠. 이럴 땐 자업자득, 제 꾀에 제가 넘어갔다고 하는 거예요. 아시겠어요?”
그것을 강조하듯 살로메는 불쾌한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그런 살로메를 보며 사마르는 시스템 창을 띄웠다.
허공에 떠오른 수많은 게이트의 좌표들.
투명한 문자들을 띄워둔 채 사마르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나도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네. 내가 로이드에게 이용당했다는 것을.”
사마르는 떠오른 게이트 좌표를 훑어 내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도착한 마지막 장에는.
[최우선 정화 지역 : 사라센]
인과율의 추가 기울어진 마지막 지역이 최초 목적지로 자동 지정 됩니다.
작금의 상황을 설명하는 짧은 문장이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소환 의식과 함께 완성된 인과율의 기울기와 사라센으로 몰려든 몬스터의 목적까지.
대륙 곳곳에서 시작된 이상 징후들은 신들의 맹약이 집행되며 사라센으로 집중되었다.
쉽게 말하자면.
사라센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썼다는 얘기였다.
“로이드 님이 왜 그런 짓을… 그래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러니 찾아야 하지 않겠나. 무슨 생각으로 이랬는지 나 역시 매우 궁금하다네.”
날선 검과 같던 살로메는 할 말을 잃은 듯 시선을 흐렸다.
이래서 갑자기 연락이 끊어진 건가.
해야 할 일을 다했으니까?
그렇게 한겨울을 찾던 로이드는 어느 시점부터 무심해졌다.
마치 버림받은 것처럼.
이러한 살로메의 의문은 이어진 두 사람의 대화로 더욱 굳어졌다.
질문하는 사마르와 대답하는 자하르.
카리프의 병력이 궁금했던 사마르는 병사들의 출처와 익숙한 기운의 정체를 물었다.
그에 자하르는.
“로이드 님이 준비해 주신 겁니다.”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경위와 신인류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이어 갔다.
“그랬었군. 이거 완전히 당해 버렸어. 하하하.”
을씨년스런 황무지에 허탈한 사마르의 웃음이 흩어지듯 울려 퍼졌다.
오래전부터 조금씩 진행돼 온 로이드의 계획.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그 인간의 꼭두각시였던 게야.”
각자의 길을 돌아왔던 사람들은 의외의 장소에서 감춰진 비밀을 마주하게 되었다.
* * *
에비오를 심문하던 나는 레이가 살아나게 된 과정을 빠짐없이 들었다.
굳이 뭔가와 비교하자면 강령술과 비슷한 술법이었는데.
“그러니까.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들여 다시 살아나게 하는 거네? 그럼 죽은 사람은 다 되는 건가.”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라 남아 있는 영혼을 다른 사체에 빙의시키는 거니까요.”
에비오가 가진 능력은 망자의 영혼을 다루는 영혼술사였다.
뭔가 께름칙하긴 했지만.
“물론 망자의 몸이 멀쩡하다면 그 사람 몸에 바로 빙의시킬 수도 있겠지요.”
녀석의 말을 들어 보면 꽤나 쓸모 있어 보이는 기이한 능력이었다.
마치 부활과 다름없는 능력이 아닌가.
영혼이라는 것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모르겠지만, 죽자마자 사라지는 게 아니라면 바로 살릴 수 있다는 얘기였다.
“확실해?”
“아직 해 본 적은 없지만, 이론상으론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흠, 특이한 재주네.”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물론 최대 세 명이라는 제한과 빙의 해제의 권한이 마음에 걸렸지만, 상황에 따라 크게 쓰일 수 있는 능력임은 확실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데 말이야. 로이드가 어디 있는지는 모른다 이거잖아?”
“허억, 그건!”
“그러면 약속대로 죽어야지.”
해머를 들고 일어서자 에비오는 기겁을 하며 나의 다리에 매달렸다.
“살려 주세요! 저는 진짜 억울합니다!”
“그런 건 상관없어. 널 살려 둘 만한 가치가 있는가. 이게 중요한 거지. 넌 묻는 말에 대답도 못했잖아.”
“자, 잠깐만요! 지금 로이드 있는 곳은 모르지만, 놈들의 아지트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
“네!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럼 진작 말하지 그랬어.”
나는 녀석의 머릴 쓰다듬으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감사하다며 머리를 조아리는 에비오.
무릇 인간이란 뭐든 쉽게 얻으면 고마워하지 않는 법이다.
* * *
시작의 마을에 도착한 빅터는 병사들에게 시설 보수를 지시했다.
이제부터 새로운 인마대전의 근거지가 될 터.
병사들은 낡고 오래된 마을을 손보며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곳을 다시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네요.”
마을을 둘러보던 그레이시는 만감이 교차한 얼굴로 소회를 밝혔다.
그저 지나치는 것과 상주하는 것은 다른 의미가 있으니까.
그레이시는 30년 전의 두근거림을 새삼스레 느끼고 있었다.
“그러게 말이다.”
감회에 젖은 그레이시의 뒤에서 빅터는 낮은 목소리로 공감을 전했다.
살아생전에 이 모습을 다시 보게 될 줄이야.
무성한 잡초에 뒤덮인 시작의 마을은 잃어버린 제 모습을 찾아 시간의 허물을 벗어 내고 있었다.
변해 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추억에 잠기던 그때.
“스승님, 후배님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바쁘게 다가온 베르는 빅터에게 양피지를 내밀었다.
“무슨 일이더냐.”
“로이드의 은신처를 알아낸 모양입니다.”
그에 빅터는 양피지를 펼쳐 내용을 살폈다.
[로이드의 은신처 발견.
브라함 남부 다우롱 마을 외곽에 위치한 농가.
마을의 서쪽 출구로부터 1㎞.
밀밭 가운데 지어진 농가이며, 지하에 소환자들이 감금돼 있는 것으로 추정.]
메신저를 살펴본 빅터는 미간을 구기며 양피지를 접었다.
“덮치실 생각인가요.”
“그래야지.”
공격 여부를 묻는 베르의 말에 빅터는 짧게 답했다.
인류의 적으로 돌아선 과거의 영웅.
빅터는 한줌의 미련도 없이 로이드를 채포하기로 결정했다.
“남부의 마을이라면 세비앙을 지나가는 게 빠르겠네요.”
지도를 펼친 에스카는 최단 경로를 찾아 빅터에게 전했다.
표시된 지도를 찬찬히 살펴보던 빅터는.
“그레이시와 에스카를 데리고 다녀올 테니, 베르는 이곳에 남아 시설 보수를 서둘러라.”
지도를 접어 에스카에게 넘기곤 빠른 걸음으로 마구간을 향해 걸어갔다.
* * *
베르에게 메신저를 보낸 이후, 나는 대각선을 그으며 대수림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포로 비스무리 한 에비오도 함께.
녀석은 멀찌감치 떨어진 채 자신의 말을 타고 따라오는 중이었다.
혹시 도망가면 어쩌나 싶겠지만, 그럴 일은 없다.
가까이 붙지 못해 안달 난 건 녀석이었으니까.
몬스터가 두려운 에비오는 최대한 거리를 좁히려 자신의 말을 다그쳤다.
하지만 펜리르를 두려워한 녀석의 말은 다가올 생각을 안 했다.
자칫하다간 주인을 버리고 도망갈 판.
어쩔 수 없이 에비오는 먼발치를 따라오며 정신없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푸르르―
“커허억!”
본인의 애마가 내는 소리에 놀라면서 말이다.
저런 상태인데 도망을 어찌하겠나. 나를 벗어나려면 이 대수림을 홀로 통과해야 한다는 것인데.
“조금만 천천히 가 주세요!”
내 모습이 사라지면 녀석은 기겁을 하며 고함을 질러 댔다.
저런데 도망을 친다고?
전전긍긍하는 에비오는 알아서 열심히 따라오고 있었다.
무엇을 해야 살 수 있는지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다시 출발한 지 얼마나 됐지?”
“이제 두 시간쯤 된 것 같네요.”
시간을 확인한 나는 게슴츠레 눈을 뜨며 전방을 주시했다.
이제 슬슬 개활지가 나올 터.
목표했던 장소를 찾으면 마력 감지기를 설치한 이후 빠르게 주위를 토벌해야 한다.
화근을 잘라 낸다고 해야 하나.
대수림에서 밤을 보내려면 필수적으로 해야 할 선행 조치였기 때문이다.
“설마 마족들도 두 배로 강해지는 건 아니겠지요?”
“불길한 소리하지 마. 퉤퉤 하고 침 뱉어. 빨리!”
농담처럼 내뱉는 겨울의 말에 나는 정색하며 대답했다.
밤이 되면 두 배로 강해지는 대수림의 몬스터의 특성 탓이었다.
“그치만 마계의 영향을 받아 그런 거라면서요. 마족이니까 당연히 두 배로 강해지는 것 아니에요?”
“캭 퉤!”
“엥?”
“퉤퉤퉤퉤퉤퉤!”
어이없어 하는 겨울을 두고 나는 필사적으로 침을 뱉었다.
녀석의 말이 현실로 일어나면 우리는 모두 꼼짝없이 죽기 때문이다.
“너, 시작의 마을이 왜 생긴 건지 알아?”
“글쎄요?”
“밤이 되면 마족과 싸울 수 없었기 때문이야. 피난처라고.”
결계석으로 둘러친 시작의 마을은 어둠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해 준 유일한 안전지대였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게 뭔 줄 아니.”
“뭔데요?”
“쥐죽은 듯 조용히 밤을 보내는 거야. 부대를 나눈 것도 그것 때문이고.”
그래야 숨기 편하니까.
그것은 탐색 때문이 아닌, 피해를 줄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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