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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99개-180화 (180/203)

180화

수풀을 헤치며 나온 사람은 왜소한 체격의 남자였다.

잔뜩 겁먹은 표정에 부들거리는 손과 발. 쭈뼛거리는 그의 다리는 얼음판을 걷듯 조심스럽기만 했다.

“하나.”

“둘.”

“둘 반에 반…….”

“허억!”

그제야 남자는 허겁지겁 달려 나의 앞으로 다가왔다.

생김새는 영락없는 쫄보인데.

스윽.

혹시나 싶은 마음에 해머를 들어 놈의 얼굴 앞에 들이댔다.

겉과 속이 다른 게 사람이니까.

“커헉! 살, 살려 주세요!”

하지만 이 남자는 외모와 성격이 일치했다.

“지금부터 묻는 말에만 대답한다.”

“네, 넵!”

이 모습이 거짓이라면 신이라도 속아 넘어갈 터.

화들짝 놀라며 답하는 저 모습은 누가 봐도 겁먹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지금부터 거짓말하면 죽는다. 머리를 굴리거나 헛소리 삑삑거려도 죽고, 대답이 늦거나 몰라도 죽는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남자는 정신없이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했다.

“이름.”

“에비오입니다!”

“죽은 놈들하곤 무슨 사이야.”

“어쩔 수 없이 다닌 사이입니다!”

“왜.”

“…네?”

“뒈질래.”

“아, 그게! 로이드 님의 명령 때문입니다!”

부동자세를 취한 남자는 눈을 부릅뜨며 나의 질문에 대답했다.

여기까지는 기본이었고.

“로이드는 지금 어디 있지.”

핵심은 이제부터였다.

“그건… 아, 그게 저도 잘…….”

하지만 녀석은 중요한 순간에 모르쇠를 발동했다.

그렇다면 기억나게 해 줘야지.

“에비오.”

“네!”

“뒤로 열다섯 발자국 이동.”

“이동!”

뒤돌아 걷던 에비오는 흠칫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움찔거리며 망설이는 녀석.

마지막 한 걸음을 앞에 두고, 에비오는 두 다리를 떨며 애처롭게 뒤돌아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녀석이 멈춘 자리엔 곤죽이 돼 버린 레이의 시체가 처참히 펼쳐져 있었다.

“바닥에 있는 옷 주워.”

“이, 이걸요?!”

“하나…….”

“주, 주웠습니다!”

숫자 셋을 외치기도 전에 놈은 피범벅이 된 레이의 옷을 주워 들었다.

“보기 흉하니까 그 옷에 고깃덩이들 쓸어 담아.”

“네에에에에?!”

“담으라고. 그러면서 생각해. 로이드가 어디에 있는지.”

“저, 저는 정말…….”

“그게 아니지. 뒷말은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에 에비오는 입을 뻐끔거리며 이어질 말을 삼켰다.

혼이 나가 버린 것만 같은 표정.

“모르면 어떻게 된다고 했지? 어디 있는지 생각나야 할 거야. 너도 그렇게 될 테니까.”

그런 녀석을 향해 나는 사형선고와 다름없는 말을 무감정하게 내뱉었다.

“믿어 주세요. 저는 진짜.”

콰아아아아앙―

“으와악!”

변명을 찾던 에비오는 곁에 떨어진 천벌에 혼비백산하며 주저앉았다.

“주워.”

“살려 주세요! 전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그러고는 손바닥을 빌며 애원하듯 소리쳤다.

하지만 내가 원했던 대답은 그게 아니니까.

“주워 담으라고.”

“아흐흑…….”

얼음장 같은 나의 말에 에비오는 무너지듯 머리를 처박았다.

* * *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에비오는 끅끅거리며 힘겹게 말을 이어 갔다.

차라리 좀 쉬었다가 하든가.

“아, 거 되게 거슬리네. 말 똑바로 안하지.”

“어어억! 죄송합니다! 똑바로 말하겠습니다!”

자백을 멈춘 에비오는 호흡을 고르며 감정을 추슬렀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나갔고.

“이번에 왜 아케른으로 안 온 거냐.”

나는 녀석의 행동이 바뀐 이유를 물어보았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의미 없는 반문일 뿐.

“이번이라뇨?”

에비오는 겁먹은 얼굴로 조심스레 나에게 되물었다.

역시나 이 녀석은 내막을 모르고 있었다. 따라서 질문의 내용은 달라져야 했다.

“그게 아니라. 왜 손쉬운 아케른을 놔두고 이런 힘든 곳까지 따라왔냐 이 말이야.”

“그야 로이드 님이 당신을 죽이지 말라고 했으니까요. 아무래도 아케른은 생포할 여건이 아니었거든요.”

“로이드가? 그놈이 왜?”

“그야 저도 모르죠. 아무튼 그 사람은 당신을 곁에 붙잡아 두려고 했어요.”

“붙잡아서 뭐하게.”

“그건 저도 잘…….”

또다시 에비오는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여러 정황상, 녀석이 알고 있는 정보는 이러한 표면적인 내용이 전부인 것 같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

“뭐긴 뭐예요. 계속 죽여 가며 회귀시키려고 했겠죠.”

듣고 있던 겨울은 발끈하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능력의 본래 주인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요.”

겨울은 세비앙에서 죽은 리를 떠올리며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다.

보다 나은 결과를 위한 강제 회귀.

능력의 주인인 리는 자신의 목숨으로 로이드의 욕심을 채워 주었다.

그리고 이젠 나에게 그 역할을 넘기려 했다.

“감히 나를?”

“와아아아아아악!”

벌떡 일어서는 나를 보며 에비오는 벌러덩 뒤로 자빠졌다.

저런 겁쟁이가 어떻게 이 험한 길을 헤쳐 온 건지.

측은한 마음마저 들게 하는 녀석은 마지막 살길을 찾아 겨울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나, 나 알죠? 우리 그 이상한 집에서 함께 지냈었잖아요. 뭐라고 말 좀 해 줘요! 저 진짜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에요!”

울먹이는 에비오를 보며 겨울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 * *

북쪽으로 향하던 카리프는 행군을 멈추고 눈을 가늘게 떴다.

전방에 보이는 사람의 형상.

족히 수십 명은 될 것 같은 작은 무리를 보며 카리프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안심하는 것도 아닌, 그렇다고 걱정하는 얼굴도 아니었다.

저건 또 뭐야?

같은 느낌이랄까.

그만큼 시달리며 여기까지 왔으니 이런 반응도 이해할 만하다.

지금이야 줄어든 느낌이지만.

이들은 도시 한복판에서조차 몬스터와 싸우며 탈출해야 했다.

상상초차 해 본 적 없던 상황.

지난한 행군이 이어지며 모두의 몸과 마음이 지쳐 가고 있었다.

이럴 땐 차라리 자아가 없는 게 편할지도.

카리프는 사마르가 만든 강화 인간을 떠올리며 시답지 않은 생각에 잠겼다.

한데 그 인간은 어디로 간 걸까.

수도마저 함락된 지금, 사라센의 그 어느 곳도 은신처가 될 순 없는 상황이었다.

어쩌면 서쪽으로 갔을지도 모르겠다.

내륙에 있는 도시가 모두 무너졌으니, 마지막 흑마탑이 있는 수비드가 최후의 보루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카리프의 생각은 틀렸다.

“으음?”

서쪽에 있을 거라 생각했던 그 남자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데서 마주치게 되다니.

작은 무리를 이끄는 사람의 정체는 보고 또 봐도 사마르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 만남이 의아했던 건 카리프만이 아니었다.

행군의 선두를 확인한 사마르 역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함께 있을 이유가 없는 두 사람이 그의 시선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저 둘이 왜?”

자하르와 카리프.

실패한 연구원과 실패한 실험체가 사마르의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도 군대를 이끌면서.

차츰 가까워지던 두 무리는 어느 지점에 이르러 얼굴을 맞대게 되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먼저 말문을 연 사람은 사마르였다.

늘 그래왔듯.

속사정을 묻는 사마르의 말투는 추궁과 짜증이 담겨 있었다.

이쯤 되면 습관이라 할 수 있을 터.

“보면 모르겠습니까? 진짜가 진짜와 만나 함께 다니는 거지요. 그나저나 흑마탑의 자랑거린 어디로 가고 들개처럼 떠돌고 계시는 걸까요?”

대상으로 지목된 자하르는 냉소 섞인 말투로 사마르에게 대답했다.

사마르의 눈썹이 작게 꿈틀거렸다. 그러고는 이내 말없이 시선을 돌려 카리프의 군대를 바라보았다.

얼추 보이는 것만 해도 4,000명 이상. 이쯤 되면 몰락한 귀족의 사병으론 분에 넘치는 규모였다.

게다가 병사들의 저 복장은.

“바빌리안을 친 놈들이 네놈들이었구나.”

청색과 백색이 조합된 바빌리안 주둔군의 타바드였다.

“어허, 네놈이라니요. 사라센 최고 명문가의 가주님입니다. 말조심하세요.”

“무어라?”

“이젠 귀까지 안 좋아 지셨나 봅니다. 보기 딱하여 장수하는 법을 알려 드리지요. 무릇 사람의 명줄이란 혓바닥 관리만 잘해도 크게 늘어나는 법입니다. 잘 기억해 두셨다가 험한 노후는 피하시길 바랍니다.”

본전도 못 찾은 사마르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왜 아니겠나.

한 녀석은 강하게 만들어 달라며 사정했던 놈이고, 다른 한 놈은 쓸모없어 쫓아낸 인간이었다.

한데 그런 잡놈들이 감히.

“이것들이 그 날강도였구만.”

발끈하는 사마르를 제치며 바스코가 앞으로 나섰다.

몬스터를 이식한 것 같은 저 말도 안 되는 체격. 꿈틀거리는 근육을 보며 자하르는 주춤거렸다.

38호…….

살귀 같은 놈의 존재는 자하르 역시 알고 있었다.

비록 용도조차 알 수 없던 골방 연구실에서 들었지만, 그에 대한 거짓말 같은 일화는 흑마탑을 나올 때까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중에 하나를 꼽으라면 바로 이것.

“죄지은 놈들이 오히려 건방을 떠네. 이건 말이 안 되잖아.”

바스코의 표정이 바뀌는 순간, 심장을 옭죄는 살기가 비수처럼 온몸을 찔러 댔다.

몬스터마저 굴복시킨다는 그의 살기는 거짓이 아니었다.

“후후, 이상한 사술을 쓰는군요. 하지만 이까짓 것, 정신력 약한 사람들에게나 통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나 자하르는 콧방귀를 뀌며 여유 있게 대답했다.

아니, 그렇게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비참했으니.

쪼르르…….

태연한 척 비웃던 자하르의 바지는 그가 지린 오줌으로 젖어 가고 있었다.

살로메는 이미 주저앉아 버린 상황.

“적당히 하는 게 좋을 텐데.”

카리프는 사나운 눈을 치켜뜨며 바스코에게 말했다.

여유 있는 그 모습에 바스코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카리프의 시선을 마주했다.

“내가 경험해 본 바에 의하면 말이야. 내 살기를 견디는 놈들은 8성급은 되는 모양이더라고. 그 이하는 도살장에 끌려온 소 새끼들 마냥 벌벌 떨며 쓰러지지. 옆에 있는 멀대 새끼처럼.”

바스코는 흥건히 젖은 자하르의 바지를 보며 하찮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다시 카리프를 보며 장난치듯 말을 건넸다.

“너도 좀 하는 건 알겠는데. 계속 그렇게 인상 쓰면 다 죽인다. 정말 다 죽여 버릴 거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그러니까 이제 눈깔에 힘 좀 풀었으면 싶은데.”

하나 카리프는.

“네놈의 주둥이 먼저 손보고 생각해 보지.”

검집에서 칼을 뽑아 느긋하게 앞으로 향했다.

서서히 피어오르는 붉은 연기.

바스코는 핏빛 안개를 뿜어내 카리프의 군대를 감싸기 시작했다.

“그만들 하게.”

그러나 사마르는 두 사람을 진정시키며 상황을 넘겼다.

이어서 단순한 중재가 아닌 설명을 시작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비정상적인 세상에 대한 이야기.

“이렇게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군. 이 사건의 주동자를 잡는 게 우선이 아닌가 싶네만.”

사마르는 착잡한 심경을 드러내며 베일에 감춰진 한 사내를 언급했다.

“나와 함께 일했던 사람 중에 로이드라는 자가 있었다. 현 상황은 아무래도 그가 계획한 것 같네.”

“로이드 님이 왜요?”

고백하듯 흘러나온 사마르의 말에 살로메가 끼어들어 이유를 물었다.

“로이드를 알고 있는가?”

놀란 사마르의 시선이 여인에게로 향했고.

“그분의 사람이니까요.”

살로메는 덤덤한 얼굴로 질문에 대답했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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