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카슈타르의 군대를 맞이한 직후, 나와 로제는 조합 본관 한편에서 못다 한 대화를 이어 갔다.
“조금만 늦었다면 어긋날 뻔했네요. 왜 미리 연락을 안 했어요?”
“아, 그게… 메신저를 다 써 버리는 바람에 그만.”
말끝을 자른 로제는 시선을 돌리며 무안함을 감췄다.
엄청 많이 챙겨 줬던 것 같은데…….
하긴 하루가 멀다 하고 안부를 전해 왔으니 지금쯤 소진됐을 법도 했다.
“왕궁을 나와 연락을 드리려 했는데 더 이상 남은 게 없지 뭐예요. 파발을 보낼까 하다가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직접 오게 됐어요.”
어쨌거나 로제는 자신의 입장을 구구절절 설명했다.
사실 문제될 내용은 아니었다.
언제까지 답변해 주겠노라 약속한 것도 아니었고, 출발 전에 도착해 마주하게 되었으니 이 또한 잘된 일이었다.
애초에 추궁하려고 물어본 것도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신경 쓰이는 건 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였다.
“혹시 함께 출정할 생각으로 오신 건 아니죠?”
물론 갑옷 차림은 아니었지만, 속내는 모르는 것 아니겠나.
따라가겠다고 하면 어쩌나 싶었던 나는 조심스레 이유를 물었다.
“제가 가 봤자 짐만 될 텐데 여기 있어야죠. 저는 영지에 남아 해야 할 일이 많답니다.”
다행스럽게도 로제는 무모하지 않았다.
그 대신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았는데.
“잘 생각하셨어요. 지금 대수림은 예전과 많이 달라요.”
“네, 저는 돌아갈 거예요. 하지만 제가 굳이 이곳까지 온 이유는…….”
로제는 말끝을 흐리며 얼굴을 붉혔다.
민망해질 것 같은 느낌이 확 몰려드는 순간.
“보고 싶어서…….”
망설이던 로제는 결국 큰 거 한 방을 터뜨리며 고개를 숙였다.
“아, 음…….”
말끝을 흐리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 할 말을 찾지 못한 나는 헛기침을 내뱉으며 시선을 좌우로 돌렸다.
반면 말문이 터진 로제는 나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이반 님은 강하시니까 무사히 돌아오시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이걸 가져가세요.”
“뭘…요?”
“제 마음이요.”
수줍게 대답한 로제는 조용히 내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쿵…….
이건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인가.
갑작스런 로제의 행동에 나의 맥박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아예 작정하고 나온 걸까.
기댄 머리를 들어 올린 로제는 시선을 마주하며 낮게 말해 왔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반달처럼 휘어지는 동그란 눈매.
부서질 듯 환한 눈웃음을 보인 로제는 나의 품을 벗어나 호위대의 곁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고는.
“조심히 다녀오세요.”
가느다란 손을 흔들며 아리안으로 돌아갔다.
폭풍 같던 떨림이 쓸고 지나간 자리.
“와… 이 아저씨 선수였네.”
어느새 다가온 겨울은 멀어지는 로제의 뒷모습을 보며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었다.
“한쪽은 청순가련에 얼굴까지 인형이고, 다른 한쪽은 시크하고 섹시한 여왕벌이네요.”
겨울은 로제와 별을 번갈아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저게 또 무슨 황당한 소릴 하려고 저리 폼을 잡는 건지.
“아, 별 언니랑 친해서 이쪽 손을 들어주고 싶지만, 새로운 도전자가 너무 막강한데요.”
녀석은 이미 모습을 감춘 로제를 향해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남자들은 저런 여자한테 약하거든요. ‘겨울이는 오빠야 보고 싶었는데, 오빠는 나 안 보고 싶었어요?’ 이러면 그냥 훅 가는 거죠.”
거기에 왜 제 이름을 넣는 건지 모르겠지만.
“저 언니 완전 나랑 비슷한 과라서 무시할 수가 없네요. 저런 청순녀들은 서로 통하는 느낌이 있거든요. 하… 이거 별 언니한테 너무 미안해지는데.”
어째선지 겨울은 스스로를 청순하다고 믿고 있었다. 게다가 눈은 왜 갑자기 아련하게 뜨는 건지.
녀석은 어른 흉내를 내며 분위기를 잡기 시작했다.
어이없는 모습을 볼 것 같은 이 불안한 예감이라니.
“에휴…….”
긴 한숨을 내뱉은 나는 고개를 저으며 자리를 벗어났다.
* * *
사천오백 명이었던 원정대의 규모는 카슈타르의 정예 오백을 더해 오천 명으로 늘었다.
이 정도면 상당히 큰 규모다.
이런 부대가 몇 개 모여 공성전 진영을 만드는 거니까.
이천 명으로 시작된 나의 부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배 이상 늘어났다.
이 모든 건, 기꺼이 참전을 허락한 소수민족과 카슈타르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렇게 많이 데려오실 줄 몰랐는데, 파병 기간이 끝났나 보네요?”
“지난달에 다들 복귀했지. 영지에 돌아온 삼천 명 중에 쓸 만한 놈들로만 추린 걸세.”
아닌 게 아니라, 반크스와 함께 온 병사들은 나의 부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별히 강한 인재가 없을 뿐.
일반적인 기준으로 볼 때는 어느 하나 부족함 없는 병사들이었다.
그런 병사들을 이끌고 온 것도 모자라 반스크가 직접 참전했다.
왕실 기사단장이 말이다.
“그런데 용케 허락을 받으셨네요. 솔직히 부탁을 드리긴 했지만, 반크스 님이 참전하는 건 기대하지 못했었거든요.”
“왕실은 허락하지 않았네.”
감탄 섞인 나의 수다에 반크스는 의외의 답변을 내놓았다.
허락하지 않았다니?
무단으로 참전했다는 말을 하려는 건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말 그대로일세. 왕실은 허락하지 않았고, 하여 나는 사퇴한 뒤 로제를 대신에 이곳에 왔을 뿐이네.”
“그래도 되는 거예요?!”
“안 될 건 또 뭔가. 다 살아 보자고 하는 짓인데. 다들 건재할 때 힘을 모아야 그나마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겠나.”
듣는 사람은 이렇게 놀라는데 정작 당사자는 덤덤했다.
그런 결정을 내린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러니 감사는 내가 아닌 로제에게 전하게. 멍청한 권력자들을 설득하느라 고생한 건 그 녀석이니까. 나는 그저 성질대로 때려치우고 나온 것뿐이라네.”
속사정을 전해 들은 나는 말없이 로제의 얼굴을 떠올렸다.
보고 싶어서 왔다는 대범한 고백.
또다시 뛰는 심장을 달래며 조용히 앞을 향했다.
“한데 이 늑대는 뭔가? 어디서 이런 엄청난 녀석을 길들인 거지?”
“아, 서리고원의 워 울프에요.”
“워 울프! 그렇군. 나도 들어 본적은 있네만, 이렇게 큰 녀석이 아니었을 텐데?”
“보통은 그렇죠. 이 녀석이 조금 특별한 거예요.”
나는 펜리르의 머릴 쓰다듬으며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그 정도로 이 녀석의 가치에 대해 설명할 수 있을까.
말이야 조금이라고 했지만, 펜리르는 신수의 모습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하여간 영물이군. 내가 타고 있는 이 녀석도 군마로는 최상인 녀석인데, 긴장한 것이 온몸을 통해 전해 온단 말이지. 이런 경우는 처음일세.”
“다른 말 같았으면 벌써 도망쳤을 걸요. 그 정도만 해도 대단한 겁니다.”
오죽하면 술이 붉은 멧돼지 새끼를 데려왔겠나.
그런 펜리르의 곁을 버티는 말이라면 군마로서 최고의 자격을 갖췄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여기서도 보일만큼 불안해하고 있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사이 우리는 대수림 입구에 도착해 부대 재편성을 시작했다.
이동을 시작한 병사들은 세 개의 부대로 나눠졌다.
반투족과 테오가 하나의 부대를 지휘하기로 했고, 반크스와 내가 각각 다른 부대를 지휘한다.
기본적인 병력의 구성은 지휘관과 같은 계통으로.
즉, 부족장 휘하에는 반투족이 배정되었고, 나의 부대는 절반으로 나눠 반크스에게 편입시켰다.
알브족의 마법사 이백 명 역시 삼등분하여 각 부대에 배치됐다.
이런 구성이라면 작은 소도시 따윈 순식간에 점령할 정도.
“이렇게 마주하다니, 이것도 메투스의 뜻인가 보군.”
“신의 뜻을 우리가 어찌 알겠나. 인간인 우리는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할 뿐이네.”
알브족의 족장 타르가와 반투족의 부족장은 서로를 마주 보며 소회를 나눴다.
“우리 부족의 사람들을 잘 부탁하네.”
“걱정 마라. 우리 반투족이 앞에 있는 한 그대의 사람들이 다칠 일은 없을 것이다.”
자부심 강한 두 일족은 동시에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렇게 마주잡은 두 손.
타르가와 부족장은 옅은 미소를 주고받은 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출정을 준비했다.
“이제부터 세 갈래로 나눠 탐색을 시작한다. 각 부대의 간격은 1㎞. 모든 부대는 반경 1㎞ 범위를 수색하며 동쪽으로 전진한다.”
재배치를 마친 부대 앞에선 나는 작전 진행에 대해 다시 한번 설명을 시작했다.
이후 출발한 각각의 부대는 빅터가 알려 준 특징적인 장소를 찾아 수색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목표가 될 특별한 장소란.
― 마계의 입구는 개활지에 나타난다. 입구 주변에 나무나 바위가 없는 탁 트인 지형에 발생하지. 지난 인마대전에 발견한 흔적들은 모두가 같은 지형에서 발견되었다.
빅터의 설명과 비슷한 장소를 발견하게 되면 그곳에 마력 탐지기를 설치하고 다음 장소를 찾아 나서는 방식이다.
언뜻 들어 보면 수백 개의 목표를 마주할 것 같지만.
대수림 안에서 개활지는 생각보다 드물다.
대부분 밀림이나 바위가 가득한 거친 지형이다 보니, 탁 트인 지형이 보이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좁은 공터야 흔하지만, 빅터가 알려 준 지형은 최소 연병장 이상의 크기였다.
한눈에 봐도 넓다는 느낌이 확연하게 드는 장소.
지난 경험을 떠올리면 하루 종일 이동해도 발견하지 못한 날도 있었다.
“탐색 중에 마족과 조우할 경우 교전하지 말고 회피, 이후 신호를 보내 주변 병력과 함께 입구를 봉인한다.”
교전 수칙까지 재확인한 부대들은 각자의 방향을 찾아 밀림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 * *
“하, 이 빌어먹을 놈들. 기껏 사라센을 빠져나오더니 다시 대수림으로 기어들어 가는 건 뭐냐고. 미친 거 아냐? 이 시국에 거길 왜 들어가?!”
숲으로 사라지는 병사들을 보며 레이는 분통을 터뜨렸다.
브라함에서부터 시작해 사라센까지.
또다시 뒤를 쫓아 리베로 넘어왔건만 이반이라는 놈은 다시 대수림을 향해 이동했다.
이제껏 넘긴 위기만 해도 벌써 수십 차례가 넘지 않았나.
이대로 가다간, 놈을 잡기도 전에 자신들이 먼저 찢겨 죽게 될 판이었다.
“안 되겠다. 로이드고 지랄이고, 그냥 죽여 버리고 끝내자. 생포는 불가능해진 것 같으니까.”
“난 찬성. 어차피 로이드 그 꼰대 새끼도 마음에 안 들었어. 지랄하면 이참에 그냥 죽여 버리자. 아니, 이반과 빅터를 해치우고 나면 그냥 먼저 찾아가서 없애 버리자. 그게 깔끔하겠네.”
드물게 입을 연 로우는 살벌한 소리를 줄줄이 내뱉었다.
이래서야 배신자 일당이 되는 건 시간문제.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해? 하기 싫으면 그냥 너희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잠수타면 되잖아. 굳이 쫓아가서 죽일 것까진…….”
“병신아, 그러니까 네가 그 취급을 받고 있던 거야. 그 인간이 어떤 인간인데? 우리가 사라지면 가만있을 것 같아?”
에비오는 카이 형제의 계획을 말리려 했지만, 놈들은 역으로 몰아붙였다.
“소환자들이 도망칠 때마다 팔다리 끊어서 잡아 오라고 했던 인간이다. 눈알을 후벼 파도 상관없으니 반드시 살려서 데려오라고 발광했던 게 그 금발 새끼라고.”
“내가 그렇게 잘라 온 손발이 열 쌍이 넘지. 뽑아낸 눈깔만 해도 여섯 개가 넘어.”
누가 형제 아니랄까 봐 녀석들은 이상한 쪽으로 척척 죽이 맞아 들어가고 있었다.
“후…….”
에비오는 긴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어차피 연락이 뜸해진지도 오래.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지만, 몬스터들이 날뛰기 시작한 이후로 로이드의 연락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다른 일들이 있거나,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방이 난리잖나.
이런 상황에 그 어떤 변고를 당한들 놀랄 만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 더욱 큰 문제는 따로 있었으니.
“싫으면 너 혼자 가고. 그동안 함께 지낸 정이 있으니 살려는 줄게.”
카이 형제를 떠나서 살 수 있는 확률은 0%에 가까웠다.
어떻게 혼자 버텨 낼 수 있을까.
“그냥 해 본 말이야. 나도 그 인간 별로였거든.”
에비오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대수림을 향해 무거운 걸음을 내딛었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