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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99개-177화 (177/203)

177화

뜻하지 않은 도주의 행렬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계속되고 있었다.

산 넘어 산에 강 건너 호수랄까.

이름 모를 한적한 곳에 도착한 카리프는 행군을 멈추고 휴식을 취했다.

그러고는 커다란 바위에 몸을 기대며 한 남자를 떠올렸다.

‘놈의 말이 사실이었나.’

우연히 재회한 해머 녀석.

빅터의 제자라는 그놈은 싸우던 도중에 이렇게 말했었다.

엘 하즈라는 이미 끝났다고.

마족들이 진격했다는 녀석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인간의 몸에 염소 머리가 있거나, 멀쩡한 얼굴에 뿔이 자랄 일은 없을 테니까.

뒤죽박죽된 현 상황에 카리프는 마른세수를 하며 고민에 빠져들었다.

이런 건 예상에 없었는데.

깊어지는 카리프의 생각은 어느새 다가온 셀로메로 인해 연기처럼 흩어지고 말았다.

“이반과 아는 사이인가요?”

“누구를 말하는 건가?”

“싸웠던 그 남자요. 잘생기고 해머를 휘두르던…….”

외모를 설명하던 살로메는 말끝을 흐리며 눈썹을 끌어 올렸다.

대충 알아들었냐는 뜻일 터.

“악연이라고 부르는 게 맞겠지. 한데 그건 왜 묻나?”

대상을 짐작한 카리프는 건조하게 답하며 이유를 되물었다.

“그 사람도 궁금하지만, 그보단 곁에 있는 꼬마 계집 때문이에요.”

“꼬마 계집?”

“네. 흰 늑대에 타고 있던 꼬마요. 녀석을 잡아 로이드 님께 데려가는 게 저의 임무였답니다.”

늑대 위에 있던 소녀라.

전장을 떠올리던 카리프는 스치듯 사라진 모습을 기억해 냈다.

거대한 늑대의 등에 파묻히듯 매달려 있던 아이.

“흠, 생포했어야 하는 데 미안하게 됐군.”

“아니에요. 잡았다고 한들 데려갈 방법도 없었겠네요. 상황이 이런데 어떻게 데려가겠어요.”

유감을 표하는 카리프에게 살로메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이곳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중이었다.

수도로 향하는 길은 마수들 천지였고, 엘 하즈라가 보이는 지역에 도착했을 땐 불타오르는 황궁과 시커먼 연기를 감상할 수 있었다.

“우선 이곳을 빠져나가야 할 것 같아요.”

이어진 살로메의 말에 카리프는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곳은 서쪽과 북쪽.

상황을 알 수 없는 서쪽 해안가엔 그가 모르는 기회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뒤엉킨 이 시국에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근거지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잠잠히 듣고 있던 자하르는 복귀를 추천했다.

“흐음…….”

카리프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바통 마을로 복귀.

나쁘지 않지만 가깝지 않은 거리가 문제였다.

이미 수도 인근까지 들어왔으니,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야 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돼 버렸다.

그렇다고 이곳에 머무를 수도 없는 일. 망설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여건은 더욱 나빠질 뿐이었다.

“북쪽으로 가자.”

결정을 내린 카리프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고삐를 그러쥐었다.

* * *

모하비에서 나온 빅터는 접경 도시 마하라자를 지나 대수림으로 향했다.

말을 달리는 모든 곳이 사라센 영토였건만, 길을 가로막는 적의 군대는 찾을 수 없었다.

보이는 것은 처참한 주검뿐.

대수림에 들어서자 오히려 쾌적한 기분을 느낄 지경이었다.

그렇게 우거진 숲을 지나 중앙으로 향하던 때.

“흠…….”

앞서가던 빅터는 걸음을 멈춰 넓은 개활지를 바라보았다.

짓밟힌 풀들과 이리저리 꺾인 작은 나뭇가지들, 인위적인 손길이 가득한 장소를 보며 뒤따라온 에스카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제 그곳과 똑같네요.”

“그렇구나. 이쪽에도 입구가 열렸던 모양이다.”

주위를 살피며 묻는 에스카의 말에 빅터는 무거운 얼굴로 대답했다.

이곳까지 오면서 발견한 흔적만 벌써 두 개째. 수색 범위를 넓히지도 않았건만, 마계의 입구는 쉽게 눈에 띄었다.

그만큼 많이 생성되었단 증거일 터.

“어쩐지 과하더라니.”

에스카는 입술을 뜯으며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할 수 없던 몬스터의 창궐. 원인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과거엔 대수림 깊숙한 곳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번엔 다르구나. 열린 입구의 개수나 유지 시간이 모두 달라진 것 같다.”

그에 빅터는 날선 눈빛으로 입구의 흔적을 바라보았다.

“예전엔 하나의 입구만 열렸다고 했잖아요.”

“그랬지.”

“직접 확인해 보신 건가요?”

“인마대전 동안 놈들의 근원지를 찾아다닌 게 작전의 전부였다. 하지만 1년이 다되도록 찾을 수 없었지.”

빅터는 굳은 표정으로 과거를 떠올렸다.

늘 한걸음 늦게 도착했던 수색.

하지만 결국 찾아냈고, 신탁의 기사들은 입구를 파괴하여 마계를 봉인했다.

입구가 하나라고 믿었던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끝내 발견한 마계의 입구를 없애자 모든 게 종결된 까닭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많이 열렸다면 어느 걸 봉인해야 하는 거죠? 전부 다 막아야 한다면 끝이 없을 것 같은데.”

이처럼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다는 건 하나만 막아서 될 일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과거의 영웅들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남아 있는 것은 그레이시와 변절한 두 흑마법사들뿐.

전투에 적합하지 않다는 점을 떠나 카론과 루즈는 피아구분조차 모호한 실정이었다.

전력은 약해졌는데.

대상은 더욱 강해졌다.

“어쩔 수 없다. 하나씩 막아 내면서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에스카의 물음에 답하며 빅터는 발걸음을 옮겼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역시 묵묵히 해쳐 나갈 뿐이었다.

* * *

오전부터 시작된 출정 준비는 진작 마무리되어 대기 중이었다.

그러나 이동은 없었고, 그렇게 해는 중천에 떠올라 어느덧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오늘 출발하는 것 아니었나.”

“맞아.”

“한데 왜 이러고 있는 것인가?”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내내 궁금해하던 부족장은 결국 다가와 이유를 물었다.

“누굴 기다리는 데 이토록 귀한 시간을 낭비한단 말인가.”

“굳이 말하자면 해결사?”

“흐음, 흥미롭긴 하지만 감이 오질 않는군. 여기 모인 사람들 이외에 더 올 사람이 있다니.”

뜻 모를 나의 대답에 부족장은 턱 끝을 매만지며 의뭉스런 표정을 지었다.

왜 아니겠나.

이곳에 있는 사람들만 살펴봐도 브라함의 정예부대를 간단히 상회한다.

내가 이끌고 나온 삼천의 부대에 반투족이 천 명, 거기에 이백 명이 넘는 알브족 마법사까지 있으니 실로 막강하다 할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듀란을 주축으로 한 리베의 용병들은 전원 오러 유저로 구성된 강력한 정예 집단이었다.

그들의 숫자만 해도 삼백 명.

사천오백에 이르는 병사들의 무력은 어지간한 성 따윈 가뿐히 쓸어버릴 만큼 강력했다.

한데 또 다른 해결사를 들먹였으니 녀석의 궁금함은 충분히 이해됐다.

하지만 내가 떠올리는 사람은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공식적으론 대륙에 단 두 명뿐인 남자.

지금 내가 기다리는 건 그 두 사람 중에 하나인 반크스였다.

“반크스라면 그대의 예비 신부 삼촌이 아닌가.”

대상을 확인한 부족장이 갸우뚱하며 대답했다.

그리고 그 순간.

“뭐래는 거야!”

“닥쳐라! 누구 맘대로 신붓감을 정하는가!”

나와 별은 동시에 소릴 질렀다.

“흐음, 지난번 에르텔을 찾아왔을 때 결정 난 것이 아니었나. 그대도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다만?”

“발그레했었지. 나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부족장은 과거를 들먹이며 말꼬리를 잡았고, 어느새 다가온 술은 피식피식 웃으며 부족장의 말을 거들었다.

“헛소리하지 말고, 네놈은 가서 풍이들 밥이나 챙겨라.”

“밥 줬는데.”

“또 줘라. 돼지한테 풀을 처먹이니 애들 자라는 속도가 느리잖나!”

“어리석긴. 그게 바로 균형 잡힌 식단이라는 것이다. 돼지라서 많이 먹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너의 선입견일 뿐이지.”

발끈하는 별에게 술은 능글맞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여기서 그만둬야 했지만.

“사람이건 짐승이건, 음식을 과하게 먹으면 불필요한 부분이 커지는 법이지. 누구처럼. 후후…….”

기세를 올린 술은 별의 가슴을 보며 빈정거렸다.

그러나 별은 화를 내는 대신 피식 입꼬리를 끌어올렸고.

“아, 네놈은 먹질 못해서 필요한 부분이 자라지 못했나 보군.”

시선을 내려 술의 정중앙을 바라보았다.

“무, 무슨 헛소린가!”

“마을에 소문난 지 오래다. 네놈 게 새끼손가락만 하다고.”

눈앞에서 까딱거리는 별의 얇은 손가락.

새파랗게 질린 술의 곁으로 동생인 개 머시기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그렇게 다가와서는.

“형, 너무 속상해하지 마. 집안 내력이라고 어머니가 말씀하셨잖아. 어머니가 가출을 자주한 건 다 이유가 있더라고…….”

술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졸지에 드러난 술의 가족사.

“아참, 그리고 ‘이슬 먹고 피어난 꽃’ 누님이 전해 달라더라.”

“뭐라고.”

“실망이라고.”

“개색…….”

얼음이 돼 버린 술은 멀어지는 동생을 보며 주먹을 부들거렸다.

그 모습이 왜 그리도 안쓰러워 보이던지. 동경에 가득찬 시선만 받아 왔던 나로서는 풀 죽은 녀석의 얼굴이 가엽게 느껴졌다.

‘집안 내력이라.’

개 머시기의 말을 떠올리며 나는 아버지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여러모로 대단한 몸을 주었으니까.

기묘한 뿌듯함을 느끼며 나는 동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벌써 연락이 왔어야 하는데.

소식의 주인인 로제는 여전히 가타부타 연락이 없었다.

이대로 무작정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냥 출발해야 하나…….”

반응 없는 메신저를 들여다보곤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오후에 접어들면 출정은 또다시 내일로 미뤄질 터.

한시가 급한 와중에 이런 기다림은 옳지 않다.

하다못해 소식이라도 있다면 좋으련만, 기약 없이 지나가는 시간들은 모두를 초조하게 만들뿐이었다.

그러니 이제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출발할 테니, 가서 준비시켜.”

추후의 연락을 기대하며 나는 출정을 지시했다.

그렇게 돌아서려던 그때.

“어, 저기 좀 봐요.”

펜리르의 털을 빗기던 겨울이 손을 뻗어 동쪽을 가리켰다.

녀석이 바라보던 시선의 끝에는.

“왔구나!”

검이 교차하는 초승달 문양이 바람에 나부끼며 펄럭이고 있었다.

기다렸던 카슈타르 가문의 문장.

연락이 끊겼던 로제는 반크스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대형을 갖춘 병사들이 두 사람의 뒤를 따르고 있었고.

“부름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중 나간 나는 로제와 반크스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이제야 완성되는 그림.

“그간 잘 지냈는가.”

머릿속으로 그렸던 나의 원정대는 반크스의 합류로 인해 정점을 찍게 되었다.

“저야 늘 똑같죠.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벌써 이렇게 시간이 지나갔네요.”

“늘 똑같은 게 아닌데? 이거 못 본 사이에 엄청나게 강해졌잖은가. 아예 다른 사람이 돼 버렸어.”

가볍게 답한 나의 안부에 반크스는 정색을 하며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역시나 원기를 느낀 걸까.

“뭘 감추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심상치 않은 기운이군. 정말 특이한 느낌이야.”

전신을 훑어보던 반크스는 흥미로운 얼굴로 소감을 전했다.

그러고는.

“그래, 이 정도는 돼야 로제를 맡길 수 있지! 빌어먹을 마족 놈들을 쫓아내고 나면 바로 혼인부터 올리도록 하세.”

이번에도 역시 자신만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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