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마을로 돌아간 알브족은 전쟁에 참여하기로 했다.
트롤의 공격뿐만이 아니라, 달의 계곡 자체가 몬스터의 서식지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알브족에겐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는데.
“단일 계열이라는 게 문제였소.”
마법사로만 구성된 알브족은 트롤과 같은 천적에게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
사실 극히 드문 경우지만, 반복되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마계가 열린 시점인 만큼, 마법저항 몬스터의 출현은 그저 불운이 아니었다.
하여 족장인 타르가는 부족의 안전을 위해 투쟁하기로 결정했다.
이대로 위험을 마주하느니, 스스로 살길을 개척한 것이다.
“우선 조합 본관에 머물면서 지켜봅시다. 꽤 큰 건물이라 부족이 함께 지내기에 부족하진 않을 거예요.”
“알겠소. 내일 아침 준비가 끝나는 대로 출발합시다.”
일부는 나와 함께.
나머지 알브족은 리베에 머물며 전쟁을 지켜보기로 했다.
* * *
아침에 출발한 알브족의 행렬은 오후까지 이어졌다.
마법에 특화된 부족답게 각종 보조 마법을 사용하며 각자의 편의를 최대화했다.
예를 들자면.
“저건 그리스라는 마법이에요. 닿는 면의 마찰을 없애서 미끄럽게 만들어 주죠.”
이렇게 대답한 파파야는 손끝을 뻗어 곁을 지나는 남자를 가리켰다.
남자의 뒤에는 한가득 짐을 담은 커다란 상자가 별다른 저항 없이 끌려가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저 뒤에 보이는 건 중력 마법인데요. 저걸 사용하면 무게가 거의 안 느껴져요.”
파파야가 언급한 여인은 몸뚱이만한 짐을 들어 자신의 머리 위에 가볍게 얹었다.
보고 있자니 엄청난 힘을 가진 사람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보통 저런 건 아무나 못 할 테니까.
저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가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물론 나라면 무식하게 들고 이동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오후에 접어든 햇살이 길게 늘어질 때쯤, 나와 알브족은 리베의 북문에 무사히 도착했다.
“알브족을 데려오실 줄이야…….”
마중 나온 한스는 멍한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왜 안 그렇겠나.
반투족보다 더 폐쇄적인 부족이 알브족이다.
최단 거리에 있는 리베조차도 마주한 사람이 극소수일 정도니 더 이상의 설명은 의미 없다.
그런 알브족이.
이제껏 달의 계곡을 벗어난 적 없던 그들이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다.
그것도 부족 모두를 이끌고.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리베의 큰길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렇게 목적지인 조합 본관에 도착했을 땐.
“어서 오세요. 리베는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단체장 게브네가 두 팔을 벌려 알브족을 환영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자네는 늘 이런 엄청난 일들을 해내는군.”
“상황이 그랬으니까요. 위험한 시기라는 걸 모두가 느끼고 있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구심점이 없다면 인간은 모이지 않는 법일세. 다른 사람이 나섰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지.”
늘어선 알브족을 바라보며 게브네는 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마법적 재능을 타고난 기이한 민족.
1,000명이 조금 넘는 알브족은 부족원 모두가 마법을 사용하는 경이로운 사람들이었다.
비록 수준의 격차는 존재했지만, 대륙의 기준으로 봤을 땐 이해할 수 없는 기적임은 분명했다.
“조합 본관은 깨끗이 정리해 놨네. 주방은 공용으로 사용해야 해서 불편하겠지만 잠자리는 나쁘지 않을 걸세.”
“고생하셨습니다.”
“이런 게 고생이라면 부끄러워서 어찌 살 수 있겠나. 목숨 걸고 싸워 줄 자네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네.”
자신을 낮춘 게브네는 긴 숨을 내쉬며 앞으로 나섰다.
그러고는 알브족에게 다가가 짐을 나눠 들며 숙소를 안내했다.
“참으로 사심 없는 분이십니다.”
멀어지는 게브네를 바라보며 한스는 조용히 말했다.
존경을 담았다고나 할까.
“그렇죠. 제가 겪어본 정치인 중에 가장 욕심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한스의 곁에 서 있던 듀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평화로운 시절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단체장으로 부임한 첫해에 게브네는 인마대전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건 그렇고, 원정에 참여하는 알브족은 얼마나 되는 겁니까?”
시선을 되돌린 듀란은 본론으로 돌아와 병력 구성에 대해 질문했다.
이거야 말로 핵심적인 내용일 터.
“4서클 이상만 추려서 대략 200명 정도가 참여할 것 같더군요.”
나는 타르가와 나눴던 내용을 듀란과 한스에게 전달했다.
“4서클 이상만 추린 게 200명이라니, 알브족에 관한 명성이 괜한 소린 아니었나 봅니다.”
“혈통은 못 속인다. 뭐,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대륙 역사에 남은 대마법사들은 모두 알브족 출신이니까요.”
감탄하는 한스를 향해 듀란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러나 당사자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다.
“모두다 옛날 얘기요. 족장이 부덕한 탓에 당대엔 걸출한 인물이 없다오.”
정리를 마치고 온 타르가는 착잡한 표정으로 자책하듯 얘기했다.
책임감이 강해서 그럴까.
타르가는 부족에게 생긴 모든 불행을 자신의 탓으로 끌어안으려 했다.
변명하지 않으려는 모습이 당당해서 나쁘진 않지만, 과하게 자책하는 면은 조금 안타깝게 느껴졌다.
“상성이 나빴을 뿐입니다.”
본관으로 향하는 알브족을 보며 나는 덤덤하게 말했다.
부족 인구 1,000명에 4서클 이상이 200명.
이 거짓말 같은 비율이 부덕의 결과라면, 대륙의 다른 국가는 쓰레기가 통치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음이다.
말 그대로 상대가 지독히 나빴을 뿐이다.
마법사의 약점을 파고든 최악의 적. 하지만 누군가 그들의 앞에 있어 준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저기 걸어오는 또 다른 부족.
반투족 같은 전사들과 함께할 때야말로, 알브족은 최상의 힘을 끌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
도로를 가득 매운 반투족을 보며 한스는 헛숨을 들이켰다.
물과 기름 같던 두 부족이 한자리에 모이다니.
리베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라면 이것이 얼마나 큰 사건인지 알 수 있을 터였다.
“살다보니 이런 진귀한 장면을 다 보게 되네요.”
한스의 벌어진 턱은 다물어질 줄 몰랐다.
지켜보는 나 역시 마찬가지.
괜스레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다가오는 반투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사이 거리는 줄어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고.
“오래간만이오. 귀인이 후손이여.”
반투족의 족장 울부짖는 창은 주름진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자연스럽게 마주 잡은 두 손.
“힘든 결단을 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힘들 게 뭐가 있겠나.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니 감사는 접어 두시게.”
고마움을 전하는 나의 말에 족장은 고개를 저으며 잡은 손을 놓았다.
그런 족장의 곁에는 부족장과 술이 서 있었다.
어쩐지 의기양양한 술의 어깨너머에는.
“소개하지. 나의 아버지 ‘남자는 한 방’이시다.”
두 형제를 한 방에 만드신 전설적인 남자가 서 있었다.
어찌 그리도 비슷하게 생겼는지.
‘미쳤네.’
주름살 빼고 꼭 닮은 부자를 보며 나는 두 눈을 비벼야 했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으니.
“허억…….”
걸어 나오는 녀석의 동생을 보며 나는 얼빠진 소릴 흘려야 했다.
그날 개만 안 잡았어도.
음주와 불쌍한 짐승 덕에 태어난 술의 동생은 공포스러울 만큼 제 형과 똑같았다.
‘쌍둥이도 아닌데…….’
거울처럼 닮은 술 형제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턱 끝을 치켜들었다.
이 무서운 핏줄이라니.
나란히 서 있는 삼부자를 보며 나는 감탄을 넘어선 경외감을 느꼈다.
충격적인 첫 만남이 그렇게 지나갔고.
“원정에 참여하는 사람은 얼마나 돼?”
부족장에게 다가간 나는 출정 인원을 물어보았다.
“노인들과 아이들을 제외하고 1,000명 정도가 참전할 예정이다.”
“거의 절반인데 그래도 괜찮아?”
“안 괜찮다. 참전하지 못한 사람들의 불만이 엄청나다.”
“아…….”
역시 반투족.
과한 참여를 걱정하던 나는 졸지에 속 좁은 사람이 돼 버렸다.
“언제 출발할 예정인가.”
“내일. 그러니 오늘은 푹 쉬어.”
“마음이야 그러고 싶지만 저들이 얌전히 있을지 모르겠군.”
부족장을 따라 돌린 나의 시선 끝엔 벌써부터 상기된 반투족들이 씩씩거리며 모여 있었다.
“전쟁이 처음인 녀석들이 많아서 그렇다. 하루 이틀 지나면 잠잠해지겠지.”
“그래도 잘 타일러 봐. 내일부턴 진짜 지옥으로 들어가야 할 테니까.”
부족장의 등을 두드린 나는 보급품 확인을 위해 한스를 찾아 나섰다.
* * *
처음엔 제정신이 아니었다.
무작정 도망치기만 했을 뿐, 급변하는 상황을 보며 사마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저 괴물들은 무엇이며 강화 인간은 왜 마인이 된 걸까.
부작용이야 늘 있었지만, 이런 방식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한날한시.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모두가 마인으로 변해 버렸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거슬려 미칠 것 같은 이 시스템 문자는 떠올리기 싫은 끔찍한 기억을 다시금 상기시키고 있었다.
[게이트 숫자 8.]
연결된 공간 : 마계.
생성 지역 좌표.
X:0356 Y:6173
X:1258 Y:2485
X:3492 Y:4419
X:7242 Y…….
문자를 본 순간, 사마르는 인마대전이라는 네 글자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쓸모없던 자신의 삶이 달라지기 시작한 건, 인마대전이라는 신들의 장난 때문이었다.
그것으로 인해 이 땅에 소환되었고, 그로 인해 사마르는 자신의 본명인 루즈를 자랑스러워할 수 있게 되었다.
늘 비참했던 자신이.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던 루즈라는 사네는, 낯선 세상에 던져지고 나서야 비로소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빌어먹을.”
과거의 기억이 떠오른 루즈는 얼굴을 구기며 뇌까렸다.
― 저 녀석 애비가 연쇄살인범이라잖아. 택배 기사로 변장해서 여자들만 골라 죽였다는 놈!
살인범의 아들.
그것도 연쇄 살인범이란 꼬리표가 달린 루즈의 삶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처참히 짓밟혔다.
야반도주를 해 가며 다른 곳에 정착해도.
― 연쇄살인마의 자식과 어떻게 함께 공부를 시킵니까? 그 아이가 학교에 나온다면 우리 아이들을 전학 보내겠습니다!
귀신같이 알아낸 사람들은 끊임없이 루즈와 남은 가족들을 괴롭혔다.
그저 눈떠 보니 한 남자의 아들이 되었을 뿐인데.
그 하나의 이유로 루즈는 공공의 적이 되어 세상 밖으로 밀려났다.
인터넷으로 퍼져 버린 자신과 가족들의 신상 정보들.
불특정 다수를 향한 분노에 수많은 불면의 밤을 보내던 그때.
― 신들의 맹약에 따라 그대는 신탁의 기사로 선택되었습니다.
소설 속 주인공처럼 이세계로 전이됐다.
놀라움?
또는 두려움?
그럴 리 없잖은가.
지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루즈는 실성한 사람처럼 크게 웃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드디어 벗어나게 되었으니까.
가족이라는 끔찍한 족쇄에서 이제야 자유로울 수 있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자유의 대가는 혹독했다.
그의 역할은 전쟁터에 있었고, 그가 싸워야 할 대상은 다른 의미로 더욱 두려웠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저주와 상태 이상 마법들 뿐.
함께 소환된 이들이 히어로처럼 전장을 누빌 때, 구석에 숨은 루즈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전전긍긍해야 했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여우를 피해 호랑이 굴에 들어온 격이랄까.
힘들게 목숨을 건사했더니, 이번엔 황제가 칼을 뽑아 들었다.
그것마저 피해서 살아남았는데.
이제야 뭔가 이룰 수 있을 만큼 기반을 다졌다고 생각했는데.
“개 같은 세상…….”
30년을 돌아온 목적지엔 첫 시작과 똑같은 인마대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