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부락의 터가 안 좋은 건가.
유독 알브족 마을 인근에는 천적과 같은 몬스터가 모여들었다.
일전의 데스 아이도 그랬고, 이번에는 마력 자체에 저항을 가진 트롤이 달의 계곡을 침략했다.
불운이 과하다 할까.
이렇게 상극인 놈들과 계속 싸우니 알브족의 피해는 적지 않았다.
“후딱 해치워 버리죠!”
동년배의 소녀가 당하는 모습을 보며 겨울은 흥분해 크게 외쳤다.
기분 나빠지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
“떨어지지 않게 잘 붙잡고 있어.”
주의를 당부한 나는 펜리르에서 내려 트롤 사이로 뛰어들었다.
이어서 작렬하는 광역 강타.
콰아아아아앙!
귀청을 울리는 폭음과 함께 일대의 트롤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세졌다고?”
눈에 띄게 달라진 스킬의 위력 앞에 공격조차 멈춘 채 시스템 창을 바라보았다.
[광역 강타, 레벨 2.]
피격 대상의 주위로 동일한 광역 대미지를 입힙니다.
원기의 레벨에 따라 범위 증가.
대미지 증가 합계 20%
20%라니.
레벨 하나의 차이로 광역 강타는 천벌에 버금가는 위력을 얻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쓰임새가 달라질 수밖에.
이제까지 사용한 광역 강타의 용도는 적을 날려 무방비 상태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후 천벌로 마무리.
물론 약한 놈들에겐 해당 사항이 없지만, 강자와의 싸움에선 늘 천벌이 마지막을 장식하는 결정타였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콰앙! 콰앙!
콰아아아아아앙!
광역 강타 역시 충분한 자격이 생겼다. 승급한 효과는 확실했으니까.
그나마 버텨 내던 트롤들도 레벨이 상승한 스킬 앞에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가장 거대한 녀석 하나를 제외하고.
“저놈인가?”
우두머리로 추정되는 녀석은 나뒹구는 몸을 추슬러 나의 눈을 노려보았다. 얻어맞고 날아갈지언정 그 한 방에 죽진 않겠단 투지가 엿보였다.
하나 의지만으론 놈의 죽음이 달라지지 않는다.
나는 이미 다음 스킬을 발동시켰고, 더욱 강해진 천벌은 녀석의 머리 위에 떠올랐다.
[천벌. 레벨 2.]
원기로 이뤄진 해머.
레벨에 따라 해머의 개수 증가.
사용가능한 해머의 총합 2.
해머의 위치 조절 및 중첩 가능.
시선을 잡아끄는 한 구절에 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바로 중첩 가능이라는 말.
내 생각이 맞는다면, 동시에 두 개의 해머를 꽂을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에 대한 결과는.
“…….”
말문이 막힐 만큼 웅장했다.
이게 같은 스킬이라고?
겹쳐진 두 개의 천벌은 노려보던 트롤 우두머리를 땅속 깊이 묻어 버렸다.
등골을 타고 오르는 짜릿한 쾌감.
광기에 찬 학살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 *
마지막 남은 트롤에게 화염 마법이 작렬했다.
이어서 냉기 마법이.
그리고 다시 작열하는 불지옥이 놈의 몸뚱어리를 집어삼켰다.
쿠웅―
새까맣게 그을린 트롤이 고목처럼 쓰러졌다.
지금은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잠시 후 녀석은 꿈틀거리며 되살아 날 것이다.
보면서도 믿기 힘든 재생력 때문이다.
해법은 산산조각을 내는 것인데, 마력 저항을 가지고 있으니 알브족의 마법이 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마무리가 확실치 못하니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던 것이다.
하지만 족장 타르가는 달랐다.
커다란 바위를 소환한 타르가는 쓰러진 트롤의 머리 위로 암석을 내리쳤다.
“록 버스터.”
타르가의 음성이 작게 지나가고, 폭발하는 바위와 함께 트롤의 몸이 뭉개졌다.
이로서 달의 계곡의 전투는 끝이 났다.
지금 당장은 말이다.
“아저씨!”
내 모습을 알아본 꼬맹이가 함박 웃음을 지으며 달려왔다.
구김살 없이 밝은 여자아이.
족장 타르가의 딸인 파파야는 두 손을 흔들며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잘 지냈어? 다친 곳은 없고?”
“네! 안전한 곳에 숨어 있어서 괜찮았어요.”
“다행이다.”
미소를 지은 나는, 방실거리는 파파야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나의 시선은 주변 정리를 마친 타르가에게 향했다.
“또 이렇게 은혜를 입고 말았구려. 갚아야 할 빚이 점점 쌓여서 감사하고 죄송할 따름이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야 당연히…….”
“그러면 부탁 하나 드리겠습니다.”
타르가는 두 눈을 껌뻑이며 마른침을 삼켰다.
“인마대전에 대해 들어 본 적 있나요?”
“알고 있소. 알브족의 마을이 이토록 작아진 것도 그 때문이오.”
질문에 답한 타르가는 달의 계곡을 둘러보며 손짓했다.
“1년 남짓한 그 기간에 알브족은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소. 무수한 부족민이 목숨을 잃었고, 이곳에 있던 수많은 가옥들은 마족들로 인해 무참히 부서졌소.”
“그랬군요. 여기저기 집터가 많이 남아 있어 궁금하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랬을 거요. 본래 알브족 마을의 중심지는 이곳이었으니까.”
타르가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자신의 잘못인 것처럼, 풀숲에 가려진 폐허를 향해 먹먹한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그것은 지나간 과거의 기억일 뿐.
“인마대전이 다시 시작됐습니다.”
나는 다가올 미래에 대한 암울한 진실을 덤덤히 전했다.
* * *
이반의 메신저를 읽은 반크스는 그 즉시 말을 달려 왕궁으로 향했다.
밤을 새워 도착한 왕도 벨마레.
왕궁 복도를 가로지르는 반크스의 곁에 지친 기색이 역력한 로제가 힘든 발걸음을 이어 가고 있었다.
“전하께서는 지금 어디 계시는가.”
“오전 일과를 마치시고 집무실로 이동하셨습니다.”
국왕의 위치를 확인한 반크스는 지체 없이 몸을 돌려 집무실로 향했다.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했고.
“왕실 기사단장 반크스 경과 로제 후작께서 오셨습니다.”
집무실 앞을 지키는 경비병에게 알현을 청했다.
잠시 후.
딸깍.
금으로 치장된 문이 열리며 시종장이 얼굴을 내밀었다.
“드시지요.”
나긋하게 울리는 목소리를 따라 반크스와 로제는 국왕의 집무실에 들어섰다.
궁내성 주류관인 앙리 후작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고, 국왕의 동생인 모리에 공작이 반크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너머로 창틀에 기댄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으니.
“어쩐 일로 과인을 찾은 게요. 오늘은 휴일이 아니셨소?”
“급하게 아뢸 일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흐음… 좋소. 들어봅시다.”
창가에 서 있던 발롱 국왕은 소파로 다가와 몸을 기댔다.
“일전에 보고 드린 대륙의 동향을 기억하십니까.”
“창궐하는 몬스터 말이요? 그거라면 기억하고 있소.”
“네, 맞습니다. 오늘 찾아뵌 이유는 그 때문입니다.”
“계속해 보시오.”
관심을 보이는 국왕을 보며 반크스는 잠시 고민했다.
막상 소식을 전하려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탓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여유 부릴 사항이 아닌 바.
“인마대전이 시작됐습니다.”
반크스는 불필요한 설명을 배제한 채 본론으로 직행했다.
“흠, 그렇구려. 인마대전이라니…….”
어딘가에서 소식을 접한 것일까.
걱정과 달리 발롱 국왕은 차분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하나 다음 순간.
“잠깐… 지금 인마대전이라고 하였소?”
“그러합니다.”
“그 인마대전? 마족이 나왔던 그것 말이오?”
“맞습니다, 전하.”
뒤늦게 알아들은 발롱 국왕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따지듯이 되물었다.
“지금 바깥 대륙에 마족이 나타났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전하. 브라함과 전쟁 중이던 사라센은 존폐 여부조차 불투명한 상황이고, 대수림을 비롯한 각지의 상황이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고 합니다.”
“허허, 어찌 이런 일이.”
“현재 단승 자작인 이반 공이 리베에서 연합군을 모으고 있습니다. 하여 저희 아리안에서도 병력을 파견해…….”
“그리 쉽게 얘기할 문제가 아닌 것 같군요, 반크스 경.”
반크스의 말을 자른 건 국왕의 동생 모리에 공작이었다.
거기에 앙리 후작까지.
“맞습니다, 반크스 경. 자국의 전쟁이 아닌데 군대를 파견하는 건 국익에 반하는 행동이 아니겠습니까.”
평소 왕실의 딸랑이로 소문난 앙리 후작은 모리에 공작을 거들며 나섰다.
이유 같은 건 없다.
얄팍한 이 남자에겐 그 어떤 대의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머릿속 가득 자신의 안위뿐. 마론 후작이 품은 역심에는 앙리 후작에 대한 적개심도 크게 작용했었다.
“지금 대륙의 사정을 외면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반크스는 뒤틀리는 심기를 바로잡으며 국왕을 향해 다시 간언했다.
이대로 놔뒀다간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을 테니까.
대륙 최고의 팔랑귀인 발롱 국왕은 어려운 문제를 마주할 때마다 생각하길 포기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거, 갑자기 나타나서 전쟁하러 가자고 하는 건 너무 급한 거 아니오? 일단 그 인마대전이라는 것부터 집고 넘어갑시다.”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모리에 공작님. 반크스 경께서 너무 성급했던 것 같습니다.”
열변을 토하는 모리에 공작과 앙리 후작을 보며 국왕은 마른침만 꼴깍 삼키고 있었다.
“흐음…….”
긴 침음을 뱉은 반크스는 치미는 울화를 달래며 눈을 감았다.
차라리 마론 후작이 있을 때가 좋았는데.
역심을 품었을지언정, 해야 할 일을 앞에 두고 사리사욕을 채우진 않았다.
그런데 이놈들은.
우유부단한 국왕의 곁에서 세 치 혀를 놀리며 피를 빨고 있었다.
간신의 표본 같은 것들.
특히나 모리에 공작은 마론 후작이 숙청된 다음날부터 기다렸다는 듯 정계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와 어쩌겠나.
저놈들을 설득하지 못하면 군대를 파견하는 건 불가능해진다.
하지만 무투파인 반크스는 이런 토론에 약했다.
욱하는 성정을 다루는 게 쉽지 않은 탓이었다.
그렇게 부글거리는 속을 가라앉히며 할 말을 찾던 순간.
“대륙에서 가장 약한 군사력을 가진 나라가 어디일까요.”
조용히 지켜보던 로제가 반크스를 대신해 논쟁에 뛰어들었다.
“그야, 리베나 카잔…….”
“아리안입니다.”
“허허, 그게 무슨 허튼 소리입니까. 로제 후작이 아직 병권을 잘 몰라서 그러나 본데…….”
“대륙에서 가장 약한 나라는 아리안입니다. 숫자는 물론, 병력의 질도 현저하게 떨어지니까요. 이걸 아니라고 부정한다면 그 닫힌 귀와 눈을 열고 오시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겠네요. 국경의 좌우측으로 모두가 우리보다 강합니다.”
“크흠…….”
헛기침을 내뱉는 앙리 후작을 보며 로제는 무표정한 얼굴로 하던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런 우리가 건제할 수 있던 이유는 몬스터의 침입이 없고 외교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한데 주변 국가의 위태로운 상황을 외면한다면 이후 뒷감당은 어쩌실 생각입니까.”
“어쩌긴요. 제 발등의 불부터 꺼야지요. 우선은 지켜보다 어쩔 수 없을 때 참여해도 늦지 않습니다.”
“아니죠. 마지못한 도움에 감사할 사람은 없습니다.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언제 하느냐에 따라 영향력은 달라지니까요.”
“요청하는 국가가 없잖소?”
“왜 없습니까. 전하께 봉신을 맹세한 이반 공이 연합군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니 의미 없다는 것 아니요. 직접적인 도움을 요청한 것도 아닌데 왜 굳이 설레발을 치냐 이 말입니다.”
“공작님께서 그걸 설레발로 받아들이시니, 저로서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길게 이어진 문답 속에서 로제는 현기증을 느꼈다.
평화와 권모술수에 찌든 정치인의 민낯이라는 건 아직 로제에겐 감당하기 쉽지 않은 탓이었다.
“아리안의 귀족이 주도한 모병입니다. 대륙에서 유일하게 평화 상태인 우리가요. 이럴 때 앞으로 나서 상황을 주도한다면, 훗날 국익에 반드시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과거 소국이던 브라함이 대륙의 패자로 올라섰던 것처럼요.”
로제는 침착함을 유지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모리에 공작은 쓴웃음을 지으며 로제의 말을 받았다.
“그야, 브라함에는 빅터 공이 있었으니 가능했던 것 아닙니까.”
“우리에겐 반크스 경이 있는데요? 게다가 모병을 시작한 이반 공의 무위 또한 당대를 주름잡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전쟁을 두 사람만 하는 게 아니잖소. 가뜩이나 병력이 모자란데 그렇게 가치 없이 낭비하면 어쩌자는 거요.”
반대를 위한 반대.
작정하고 틀어막는 모리에 공작의 태도에 로제는 굳어지는 얼굴로 최후통첩을 준비했다.
하면 개인의 자격으로 참전하겠노라고.
하나 그 순간.
“대륙이 없는데 나라가 어찌 존재할 수 있습니까.”
지켜보던 반크스가 국왕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한곳으로 몰려드는 시선.
덤덤히 시선을 받아 내던 반크스는 발롱 국왕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왕실 기사단장, 반크스. 금일 부로 보직을 사퇴하겠습니다.”
차갑게 식은 눈으로 왕실과의 이별을 고했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