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난입한 몬스터로 인해 카리프와의 싸움은 다시 중단됐다.
아니, 눈치껏 주고받는다고나 할까.
싸움과 협동을 반복하며 틈날 때마다 무기를 마주했다.
콰가가가각!
이렇게 말이다.
나와 동료를 위해 휘두르던 거대한 해머는 사정거리에 들어온 카리프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녀석도 마찬가지.
공격을 막아 낸 카리프의 검이 반짝거리며 수직선을 그었다.
이건 위험하다.
본능이 전하는 경고에 나는 해머를 내밀어 원기를 쏟아부었다.
스으윽―
어색한 소리가 귓가를 스치며 지나갔고.
콰드드드드드득!
내 주변을 제외한 황무지가 반으로 갈라지며 뒤집혔다.
“제법이군.”
남 얘기하듯 중얼거린 카리프는 몰려든 몬스터에 둘러싸여 모습을 감췄다.
이렇게 주고받은 합이 수십 번째.
혼잣말 같은 감탄을 내뱉으며 녀석과 나는 공방을 계속했다.
마치 즐기는 것처럼 말이다.
“바빌리안을 점령한 게 너냐?”
우연을 가장한 짧은 순간에 나는 공격 대신 질문을 던졌다.
그에 카리프는.
“맞다.”
간단한 말로 나의 물음에 답했다. 하여 다시 반문했다.
“너 사라센 사람 아니야?”
왜 고국을 향해 칼을 들이대는 거냐고.
“그곳 출신일 뿐이다.”
녀석은 무감정한 말투로 자신의 속내를 드러냈다.
짧지만 많은 것들이 함축된 이야기. 나는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그랬으니까.
태생이 브라함일 뿐, 나에게 있어 황제는 부모의 원수에 불과했다.
저 녀석 또한 마찬가지.
몰락한 가문의 아들인 카리프도 참담한 서사를 가진 불쌍한 놈이었다.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네.”
작게 내뱉은 나의 말에 녀석은 흘끔 돌아보곤 다시 전투를 시작했다.
인간과 마수.
밀려드는 공공의 적 앞에서 분위기는 사실상 협력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일단 발등의 불부터 끄고 보는 거다.
놈과의 악연은 잠시 미뤄 둔 채 나는 새롭게 등장한 네발짐승을 향해 광역 강타를 날렸다.
펜리르보다 조금 작은 녀석들.
카리프와의 싸움이 멈추게 된 것은 이놈들의 나타났기 때문이다.
빠른 몸짓으로 헤집고 다니니 전장의 흐름이 바뀌었다.
그나마 개체 수가 많지 않아서 다행이지, 여기서 조금 더 많았다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안심할 수도 없다.
여전히 놈들의 기세는 사나웠고, 병사들은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심지어 카리프까지.
거인과 싸우는 녀석의 뒤로 검은 그림자가 날아들었다.
순간 내리꽂히는 금색의 해머.
콰아아아앙!
카리프의 등을 노리던 마수는 피를 뿜어내며 짓이겨졌다.
멈춰 선 카리프의 시선이 뒤를 향했다.
그에 나는.
“고마워 할 필요 없어. 내 손에 죽어야 해서 살린 거니까.”
무심히 말을 던지곤 다른 마수를 향해 해머를 휘둘렀다.
말없이 바라보는 녀석.
“혹시 엘 하자르에 가는 건가?”
그런 카리프를 향해 나는 또 다른 질문을 전했다.
하나 녀석은 묵묵부답. 달려드는 마수를 베어 내며 조용히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가지 마라. 지금 가면 죽는다. 이미 마족들이 진격한 상태야.”
도통 생각을 알 수 없는 녀석에게 나는 계속해서 경고했다.
“이렇게 계속 밀려들어 가는 게 안 보이냐? 엄한 데서 객사하지 말고 내 손에 죽어.”
이렇게 열심히 설명해 줬는데.
“개소리.”
놈은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눈앞의 마수에 집중했다.
염병할 자식.
쫓아가 뒤통수를 날려 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또 다른 존재.
“이마에 뿔이…….”
알함브라를 점령했다던 마족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사람과 똑같다더니, 머리에 자란 뿔이 아니라면 구분하는 것도 쉽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다르다.
풍기는 모든 것이 이질적이고 낯설다.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마기마저 진짜 마족에게서 나오는 것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검다.
탁한 것이 아니라 새까맣다.
백색에 가까운 오러가 높은 경지를 뜻하듯, 마기는 검은색으로 강함을 나누나 보다.
그게 아니라면 저놈들의 위압감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아저씨 잠깐만요.”
마족에게 향하는 나의 등 뒤로 겨울의 마법이 날아왔다.
사기 마법 3종 세트.
다른 사람들에게 준 것을 회수해 나에게 시전한 것이다.
그만큼 위험해 보였다는 것이겠지.
“조심하세요.”
겨울은 돌아서는 나에게 당부하듯 말했다. 차오르는 힘을 느끼며 나는 왼손을 들어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고는 곧장 달려가며 크게 외쳤다.
“전군 기마! 북쪽으로 전력 질주한다!”
나의 예감은 지금을 놓치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카리프의 군대는 이미 서쪽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고, 부족장은 부대를 이끌며 북쪽으로 달렸다.
내 역할은 시간을 벌어 주는 것.
마족이 다가오는 방향으로 쏘아지듯 튀어 나갔다.
목표는 선두에 좌측.
유난히 거슬리는 두 개의 뿔을 보며 나지막이 스킬의 이름을 외웠다.
금빛의 원기가 놈의 머리 위로 모여들었고.
콰아아아아아앙!
오만하게 걸어오는 마족을 향해 요란히 떨어져 내렸다.
막아 냈을까?
휘몰아치는 먼지 폭풍을 보며 찝찝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마지막 순간에 보인 놈의 여유가 눈에 남은 탓이다.
“쯧…….”
황토빛 먼지가 걷히는 순간, 나는 쓰게 혀를 차며 다음을 준비했다.
저렇게 태연한 모습이라는 건 최소한 카리프와 동급, 아니, 그 이상이란 걸 뜻하는 것이다.
카리프와 싸울 때는 겨울의 도움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장 보이는 마족만 해도 다섯 명 정도.
듬성듬성 섞여 있는 놈들은 제각각 다른 길이의 뿔을 달고 느긋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철저히 무시당한 나의 공격은 다른 목표를 찾아 한 번 더 내리꽂혔다.
이번의 목표는 가장 작은 뿔.
당장 쓰러뜨리지 못한다면 차이점이라도 확인하고 싶었다.
외형으로 수준을 알 수 있다면 큰 이득일 테니까.
콰가가가각!
흩어지는 먼지구름을 보며 나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일그러진 놈의 얼굴이 결과를 알려 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공격을 막아 낸 놈의 팔뚝은 상처로 가득했고, 걸음을 멈춘 녀석의 다리가 충격에 떨리고 있었다.
역시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마족의 능력은 뿔의 길이에 따라 달랐다.
“소 새끼들도 아니고.”
푸념하듯 중얼거린 나는 연속으로 천벌을 내리쳤다. 진군하는 속도를 막아야 시간을 벌지 않겠나.
멀어지는 부대의 후미를 보며 계속해서 스킬을 날려 댔다.
가까이 다가오면 광역 강타를.
멀리 떨어지면 천벌을 날려 마족의 전진을 막아 냈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일 뿐이었다.
내가 막은 게 아니라 놈들이 너무 느긋했던 것이다.
강자의 여유랄까.
똥개의 짖음에 맹수가 반응하지 않듯, 마족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뿔이 짧은 몇 놈을 제외하고 말이다.
“확실히 큰일이네.”
적의 힘을 가늠한 나는 암울한 미래를 떠올렸다.
성골 마족이 벌써 나왔을 리는 없고, 시작부터 이 정도라면 끝이 예상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인간계의 8성급은 고작 네 명뿐이잖나.
빅터와 반크스.
거기에 나와 카리프를 합쳐도 놈들에게 대항하기엔 역부족이다.
양과 질 모두 지금의 인간계는 마족을 감당할 여력이 없다.
새로운 강자가 등장할 여지도 없고, 성장의 가능성이 있는 건 나와 카리프의 세력이 전부다.
그나마 이것도 시간이 주어졌을 때 얘기일 뿐.
멍청한 카리프는 죽을 자릴 찾아 서쪽으로 향했고, 나의 부대는 아직 이곳을 벗어나지 못했다.
남아 있는 나 역시 무력하긴 마찬가지. 이렇게 훼방을 놓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는 상황이었다.
“레벨을 올리는 수밖에.”
결국 해답은 이것이었다.
숙련도부터 시작해 각종 스킬과 원기의 레벨까지.
끌어 올릴 수 있는 모든 수치를 높이는 게 놈들과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오직 나만이 가능한.
사라진 부대의 후미를 확인한 나는 마지막 스킬을 날린 후 전장을 이탈했다.
* * *
“와, 그 많은 놈들을 이제껏 혼자 막으신 거예요?”
“대단하군.”
“역시!”
부대에 합류한 나를 향해 감탄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게 어디 나의 능력 때문이었겠나.
“내가 막은 게 아니야.”
“그러면요?”
“애초에 사라센의 수도가 목적이었나 봐.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더라고.”
고개를 저으며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진짜 마족은 어떻던가.”
“강해.”
“얼마나? 그대보다 더욱 강한 놈들도 있었단 말인가?”
“어. 나보다 강한 놈도 있었고, 약하다고 해도 나와 비슷해.”
“흐음…….”
소식을 접한 반투족과 부관들은 굳어진 얼굴로 침음했다.
내가 느꼈던 암담함을 이들 역시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일단 최대한 빨리 리베로 가자.”
대화를 마친 나는 선두를 이끌며 리베로 향했다.
머리 싸맨다고 없는 해법이 뚝 떨어질 리 없잖은가. 지금은 최대한 빨리 리베에 도착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우리가 이겨 낼 수 있을까요?”
달리는 펜리르의 위에서 겨울은 덤덤하게 물었다.
“글쎄? 해 보면 알겠지.”
작은 소녀의 물음에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이 정도뿐이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모호한 대답.
격차를 몸소 체험한 나로서는 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이라고 생각한다.
인간계에 드리운 암운은 그만큼 짙고 어두웠으니까. 세상을 채우던 희망의 빛은 이제 작은 점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
“가망이 없다고 보시는군요.”
“아니, 그건 아니야.”
“벌써부터 이만큼 전력 차이가 나는데요?”
“좁히면 되지.”
문답을 주고받던 나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며 긴 숨을 내뱉었다.
어두울수록 빛은 더욱 밝게 빛나는 법.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건, 해야 할 일이 명확해진다는 얘기다.
모을 수 있는 힘을 다 끌어모으고,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은 더 성장하는 수밖에.
나는 달려오는 몬스터의 머릴 날리고, 한산해진 공도를 달려 나갔다.
* * *
“이반 님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뭐라고 하던가요?”
“지금 병사들과 함께 리베로 오고 계시 답니다!”
와아아아!
용병 조합장 한스의 말에 조합은 뒤집어진 벌통처럼 시끄럽게 달아올랐다.
“자자, 잠시 진정해 주세요. 그 외에 다른 내용이 있으니 계속 읽어 드리겠습니다.”
잠잠해진 용병들을 둘러본 한스는 목청을 다듬어 낭독을 계속했다.
[현재 발생하고 있는 이상 징후들은 모두 인마대전의 전조 증상입니다. 대수림과 사라센엔 이미 마계의 문이 열린 것 같더군요.
특히 사라센은 괴멸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알함브라는 마족의 손에 점령되었고, 수도인 엘 하즈라 역시 오늘내일하는 상황입니다.
하여 브라함의 군대는 본국으로 회군하였으며, 저는 부대를 이끌고 리베로 향하는 중입니다.
오늘 체감한 마족의 수준은 8성을 가볍게 넘나들었습니다.
이들을 상대함에 있어 국가의 경계는 의미 없는 바. 저는 리베의 용병들과 힘을 합쳐 마계의 문을 찾아 소멸시킬 생각입니다.
내일 중으로 도착할 것 같으니 의견을 모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편지의 내용이 밝혀지자 용병 조합은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설마 했던 일이.
동화 같은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 까닭이었다.
“그런 건 옛날 얘기라고 생각했는데…….”
인마대전이라는 내용 앞에 누구 하나 나서지 못했다.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이야기니까.
하지만 단 한 사람.
“어쨌건 할 수밖에 없겠군요. 다들 준비합시다. 내일 도착한다니 오늘은 바쁘겠네요.”
자리를 차고 일어난 듀란은 방패를 거머쥐고 조합을 나섰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