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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99개-172화 (172/203)

172화

“알함브라는 안 돼요. 그냥 엘 하즈라로 가세요.”

“브라함의 군대가 들어왔나 보군요.”

“아니에요. 머리에 뿔난 인간들과 몬스터들이 휩쓸어 버렸어요.”

매끄러운 피부의 흑발 여인은 정색하며 대답했다.

황무지 사이로 갑작스레 나타난 여인. 살로메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 여성은 카리프에게 다가와 다짜고짜 상황을 전했다.

그에 자하르는 카리프를 돌아보았다.

“흠, 로이드 님이 말씀해 주신 게 이런 상황인 것 같군요. 처음 보는 몬스터가 창궐하여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했잖습니까.”

“그렇게 말씀하셨지.”

자하르의 추측에 동의하며 카리프는 생각에 잠겼다.

로이드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예측한 걸까.

각자의 목적지를 향하기 전, 로이드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내용은 간단했다.

자하르의 말처럼 몬스터의 침입이 있을 거란 얘기였다.

마지막에 덧붙여 전하길.

― 인간과 유사하게 생긴 종족이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가급적이면 피하세요.

미지의 종족이 나타날 것이라고 덤덤히 예언했다.

그런 로이드의 말은 사실로 이루어졌다.

몬스터는 창궐했고, 이름 모를 놈들까지 날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이제껏 보지 못한 종족마저 출몰하기 시작했다.

무엇을 향한 변화인 걸까.

깊어지는 카리프의 상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지금… 로이드라고 하셨나요?”

살로메라는 여인의 입에서 의아한 질문이 나온 탓이었다.

“혹시 금발 머리를 한 중늙은이를 말하는 건가요?”

“중늙은… 크흠, 그분을 아시는 겁니까?”

“그런 것 같은데요. 브라함에서 오신 흑마법사가 맞다면요.”

질문을 던진 여인은 눈을 빛내며 자하르에게 대답했다.

마치 큰 기회라도 잡은 것처럼 말이다.

“흐음, 어떻게 알고 지내는 사이십니까.”

“로이드 님과 함께 일하는 사이죠. 두 분은 그분을 어떻게 알고 계시죠?”

흐름을 탄 살로메는 오히려 상황을 주도하며 자하르에게 물었다.

하지만 자하르 역시 어리숙하지 않은 바.

“저희야 작은 인연이 있었습니다만, 그보다 당신과 로이드 님의 관계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느슨해진 경계를 조여 다시 살로메를 추궁했다.

“증명할 게 뭐 있나요. 로이드 님의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 자체가 극비 사항인데. 그분의 얼굴과 이름을 아는 건 측근들뿐이에요.”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자하르를 혼란스럽게 했다.

저 자연스런 말투와 여유.

“저야말로 여러분들의 정체가 궁금하네요. 이 먼 곳까지 연을 두고 있었다니… 솔직히 조금 놀랐어요.”

사실상 자하르는 살로메가 풍기는 분위기에 휘말려들고 있었다.

그게 어디 자하르만의 사정일까.

카리프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이미 살로메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니, 빠져들었다.

“이상한 짓을 하는 것 같은데 그만두는 게 좋을 거요.”

결국 지켜보던 카리프가 앞으로 나섰고.

“그만두고 싶어도 방법이 없어요. 애초에 그렇게 타고난 거라 어쩔 도리가 없거든요.”

살로메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카리프의 말을 받아쳤다.

거기에 보태 하나 더.

“로이드 님과 어떤 관계죠? 적인지 아닌지만 알려 주시면 될 것 같은데. 솔직히 그 이상은 관심 없거든요.”

심하게 당당한 모습으로 카리프를 몰아세웠다.

잠시 이어지는 침묵.

“나의 은인이시오.”

카리프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렇군요. 적이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아무튼… 알함브라는 안 돼요.”

“어차피 갈 생각도 없었소.”

대화를 끝낸 카리프는 말 위에 올라타 고삐를 잡았다.

목적지는 수도인 엘 하즈라.

가볍게 찌른 박차와 함께 카리프의 말은 서쪽으로 향했다.

* * *

“계속 몰려드네요.”

측면에서 시작된 또 다른 소란에 겨울은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어디서 저렇게 계속 나오는 거지.”

불필요한 싸움을 피하고 있지만, 몬스터는 여기저기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새로운 마경을 달리는 기분이랄까.

대수림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적은 밀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이르자 풍 형제의 진가가 드러났다.

육중한 체격을 앞세운 녀석들의 어금니는.

콰지지직!

마주 오는 몬스터들을 흉포하게 찢어 버렸다.

그사이 금빛 해머가 거인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고.

콰아아아앙!

고꾸라지는 놈을 지나쳐 또 다른 곳으로 스킬을 시전했다.

번쩍거리며 내리꽂히는 천벌.

틈틈이 섞여 있는 거인들을 쓰러뜨리며 새로운 길을 찾아 앞으로 달려갔다.

“저 앞에 뭐가 있는데?!”

선두를 지키던 술이 크게 외치며 돌아보았다.

새로운 무리가 나타났다는 건가.

“어느 쪽이야? 뚫을 수 있겠어?”

“흠, 그게 좀 특이한 상황이라 말하기가 애매하군.”

“그게 뭐야? 이상하면 다른 곳으로 방향 잡아! 머뭇거리지 말고!”

선두가 어리바리하면 뒤를 따르는 부대가 심각한 위협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바로 전군의 기병화.

점령지에서 포획한 말들을 모조리 보병에게 넘긴 것이다.

덕분에 기동력은 생겼으나 이동 중의 전투는 피해야 했다.

기본적으로 승마는 가능했지만, 마상 전투에 익숙지 않은 탓이다.

그러니 이토록 예민할 수밖에.

서툰 사람들을 이끌고 몬스터 사이를 누벼야 하니, 선두에 선 길라잡이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 막중한 책임을 진 사람이 다름 아닌 술.

거짓말 같은 녀석의 시력을 앞세워 부대의 진로를 결정해 왔던 것이다.

한데 저렇게 모호한 답을 내놓으니 울컥하지 않겠나.

“어디로 갈 거야!”

결정을 내리지 못한 술을 향해 나는 큰소리로 채근했다.

그에 술은 고개를 갸우뚱거렸고.

“전방에 군대가 다가오는 것 같은데 적의 깃발이 없다!”

확인한 내용을 나에게 전달했다.

“군대가 온다고?”

“그렇다! 몬스터들과 싸우면서 우리 쪽을 향해 오고 있다!”

그런데 깃발이 왜 없지.

삼천 명으로 늘어난 나의 군대도 버젓이 깃발이 날리고 있었다.

비록 영지의 문장이 없어 해머 하나만 덜렁 수놓아졌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깃발이 없다는 건 정규군이 아니라는 얘기다.

“일단 왼쪽으로!”

정면 충돌을 피하기 위해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길게 이어지는 기병들의 행렬.

“그런데 언제까지 계속 이렇게 달릴 거예요? 병사들의 말이 못 견딜 것 같은데.”

뒤를 돌아보던 겨울은 걱정스런 말투로 나에게 물었다.

하기야 세 시간이 다 되어 가니까.

실제로 행군 속도는 눈에 띄게 느려졌고,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고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쉴 곳이 없다.

알함브라 인근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몬스터의 숫자는 더욱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여러 곳에서 마구 솟아나는 것처럼.

‘한두 개가 아니야.’

나는 입술을 곱씹으며 빅터의 말을 떠올렸다.

28년 전 봉인된 마계의 입구.

하나라고 알려졌지만, 이번엔 뭔가 달라진 것 같다.

이토록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이만큼의 개체가 보인다는 건, 마계와 연결된 입구가 하나가 아니란 증거다.

아니면 엄청나게 넓던가.

그것도 아니라면 이러한 물량 공세를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어찌됐건 더 이상의 질주는 여의치 않은 상황.

“후미가 뒤쳐진다. 이러다간 허리가 끊긴다!”

곁을 달리던 별은 굳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멈춰야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

싸울 수밖에 없다면 조금이라도 유리해야 할 테니까.

몬스터와 거리를 벌리던 나는 결국 정체불명의 군대와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저 새끼가 왜 여기서 나와?”

깃발 없는 군대를 보며 얼굴을 와락 구기고 말았다.

맨 앞에 나와 있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

나의 머리를 반으로 갈라 버렸던 놈.

카리프 무스타파가 병사들과 함께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저게 다 강화 인간?”

믿고 싶지 않았지만, 놈들 몸에서 나오는 탁한 기운이 그들의 정체를 알려 주고 있었다.

하지만 왜.

이놈들은 멀쩡한 걸까.

사라센 군대의 강화 인간들은 모두 마인으로 변했는데 말이다.

생각이 깊어지는 사이, 또 다른 무리가 달려왔다.

몬스터다.

카리프와 나 사이에 끼어든 몬스터는 편가를 것 없이 사이좋게 공격해 왔다.

그렇게 전장은 1:1:1이라는 기묘한 형태로 변형되어 갔다.

서로를 마주한 나와 카리프는 공공의 적부터 해결하기 시작했다.

놈들의 동태를 조금씩 살피며 가운데 몰린 몬스터들을 하나둘 정리해 나갔다.

하필 저 녀석과 함께라니.

본의 아니게 시작된 이 전투는 어느새 인간 세력의 협공이 되어 버렸다.

“오래간만이군.”

먼저 인사를 건넨 건 카리프였다.

녀석은 피에 젖은 검을 털어 내며, 나를 향해 무표정하게 안부를 전했다.

뭐 반갑다고 인사를 주고받을까.

“다시 마주치면 죽는다고 했을 텐데.”

나는 차가운 말투와 표정으로 놈의 인사에 화답했다.

그러고는 해머를 들쳐 메고 놈의 앞으로 걸어갔다.

놈의 발걸음도 마찬가지.

결국 우리는 몬스터가 널브러진 전장의 한가운데에서 다시 만났다.

카리프를 향한 나의 시선이 놈의 뒤로 이동했다.

기억에 남은 두 사람.

죽은 줄 알았던 연구원이 버젓이 살아 있었고.

“저 여자도 한패였어?”

겨울을 쫓던 여인도 그 곁에 서 있었다.

“여러모로 거슬리는 조합이네.”

시선을 되돌린 나는 카리프를 향해 해머를 겨눴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나.

콰아아앙!

놈의 검이 올라오는 순간 나의 해머는 내리꽂혔다.

3차전의 시작.

기다려 왔던 세 번째 대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처음은 비교조차 불가능한 나의 패배였고, 두 번째는 박빙이었다.

내가 조금 더 우세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니 이번에는 나의 승리로 끝을 낼 차례다.

하지만.

쾅! 카앙! 콰가각!

합이 진행돼 갈수록 달라진 놈의 실력이 드러났다.

내가 성장했듯 녀석의 모습 또한 나의 기억과 일치하지 않았다.

“이상한 사술을 쓰네.”

빨라진 카리프의 칼이 두 개에서 세 개로 늘더니 급기야 놈의 주위를 가득 채워 버렸다.

불현 듯 스치는 불길한 예감.

위험을 감지한 나는 광역 강타를 휘둘러 빽빽한 놈의 검을 마주했다.

쿠와아아아아아아아앙!

귀를 찢는 굉음이 울리며 무수한 놈의 검과 금빛 해머가 허공에서 충돌했다.

실체가 되어 부딪친 두 개의 기운은 막대한 충격파를 날리며 일대를 뒤집었다.

하지만 이 격돌은 나의 승리.

상성에서 앞선 나의 스킬이 놈의 검들을 날려 버렸다.

애초에 폭발을 위해 만들어진 기술이기 때문이다.

뒤로 물러난 놈을 향해 연속으로 광역 강타를 내리쳤다.

놈의 입장에선 사정거리 바깥이라고 생각했겠지만.

“크으윽!”

애석하게도 녀석은 폭발 범위 안에 들어와 있었다.

재차 날아가는 놈을 따라 몸을 날리려던 그 순간.

크워어어어어억!

달려드는 몬스터와 뒤엉키며 싸움은 난전으로 치달았다.

오는 길에 몇 번을 마주했던 눈 없는 거인이었다.

질주를 멈춘 나는 공격의 방향을 바꿔 놈의 정강이를 노렸다.

폭발과 동시에 꺾이는 거대한 무릎.

내려오는 거인의 뒤통수로 금빛 해머가 쐐기처럼 내리꽂히고 있었다.

콰지지지직!

머리의 절반이 날아간 거인이 무너지며 벌거벗은 여인들이 달려들었다.

염소 머리를 한 나체의 여인.

껄끄러운 자태 앞에 눈살을 찌푸리던 그때.

“이 요망한 년들이 어디서 홀딱 벗고.”

광풍을 타고 등장한 별의 대검이 염소의 머리를 갈라 버렸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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