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부대로 돌아온 나와 빅터는 출발 준비를 마쳤다.
기세 좋게 막사를 뛰쳐나오긴 했다만, 이렇게 가도 되는가 싶던 차에 누군가 빅터의 이름을 불렀다.
“빅터 공, 설마 이대로 가시려는 건 아니겠지요?”
스벤이었다.
이렇게 직접 찾아온 걸 보면 본인도 느낀 것 같다. 여러모로 심상치 않은 상황이란 걸 말이다.
“멈추지 않는다면 명령 불복죄와 항명을 들어 처벌받게 될 것이오.”
결국 스벤은 자신이 꺼낼 수 있는 가장 무거운 패를 뽑아 들었다.
어쨌거나 총사령관이 아니던가.
“지난 인마대전 당시, 총사령관이 해치운 마족이 얼마나 되시오.”
빅터는 하던 행동을 멈추고 뒤돌아 스벤에게 물었다.
“그걸 누가 일일이 세며 싸운단 말이오. 기억나지 않소.”
“그렇다면 귀족은요? 성골 마족을 쓰러뜨린 기억이 있으십니까.”
“없소.”
“나도 없습니다.”
의심스럽게 답하는 스벤에게 빅터는 덤덤히 말했다. 그러고는 이 전쟁의 무의미함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신탁의 기사들이 아니었다면 고위급 마족은 손도 못 댔을 겁니다. 아니, 신탁의 기사 역시 진의 도움을 크게 받았지요. 한데 지금은 누가 그들을 대신할 수 있을까요.”
“흐음… 그래서 빅터 공이 전선을 지켜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무엇 때문에요. 제가 남아서 사라센을 정벌하면 침입한 마족이 물러난 답니까?”
차분한 빅터의 말엔 묘한 힘이 실려 있었다.
그의 이름이 가지고 있는 무게랄까.
“전쟁을 시작한 이후 사라센은 대패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사실 바람만 불어도 무너질 판이지요. 이 상황에 마족이 넘어왔다면, 사라센은 이미 끝났다고 보는 게 옳을 겁니다.”
관록을 앞세운 빅터의 예측에 스벤은 침묵했다.
그 또한 인마대전을 지나온 자.
“그곳에 따라 들어가 무엇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죽은 시체 구경하러 산목숨 밀어 넣는 격입니다.”
패도적인 마족의 위용을 모를 리 없는 것이다.
“이제껏 우리의 수도가 무사한 건 다행이지만, 지금이라도 놈들이 들어온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흠…….”
“총사령관도 짐작하다시피 우리가 도착할 때쯤엔 이미 모든 게 끝났을 것입니다.”
“하면 어쩌잔 말이오.”
“아직 피해가 크지 않을 때 마계의 입구를 찾아야 합니다.”
“그야 당연한 말이지만 쉬운 일이 아니잖소.”
“어쩔 수 없습니다. 일단 피해가 큰 대수림 접경부터 시작해 안으로 파고들 수밖에요.”
사라센을 정복한 자.
그 엄청난 명예를 앞에 둔 스벤의 갈등이 표정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사라센을 꼭 점령해야겠다면 그리하세요. 저희가 없더라도 손쉽게 해내실 겁니다. 하지만 저라면 우선 철군한 뒤 후일을 노리겠습니다. 살아서 귀환하는 것을 장담할 수 없을 테니까요.”
불필요한 낭비를 할 이유가 없잖은가.
손 안 대고 코 풀 수 있는데 굳이 목숨을 버려 가며 싸울 이유가 없는 것이다.
어차피 사라센은 파멸할 테고, 살아남는다 한들 피해는 치명적일 테니까.
혹시 모를 위험에서 국가를 지키고 이후 피폐해진 사라센을 정복해도 늦지 않는단 얘기다.
“하지만 폐하께서 아직 말씀이 없으시니 우리는 출정한 소임을 이뤄야 하는 것 아니겠소.”
그러나 스벤의 생각은 여전히 복잡한 듯했다.
충성을 핑계로 머뭇거리는 그를 향해, 빅터는 옅은 미소를 지은 뒤 입을 열었다.
“지난 인마대전이 재현된다면 총사령관께선 막아 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거야 해 봐야 아는 것 아니겠소.”
“글쎄요.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멸망뿐이군요. 그때와 같은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면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오기 섞인 스벤의 답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대륙의 정점이 죽음을 논하는 데 거기에 무슨 말로 대항할 수 있겠나.
할 말을 찾지 못한 스벤을 향해 빅터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승리보다 중요한 명장의 조건은 중요한 것을 알아보는 혜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같은 상황이 그러한 때라고 하겠지요. 계속 방해하신다면 군법에 따라 정식으로 항명하겠습니다.”
“아니 군법이라면 오히려 제가!”
“국익에 심각한 위해를 초래할 명령의 경우 항명을 통해 거절할 수 있다. 부당한 명령에 대한 증거가 확보될 경우, 선 조치 우선 원칙에 따라 임의 구속하여 자격을 박탈시킬 수 있다……. 잊으셨습니까?”
“이보시오, 빅터 공!”
“나라가 없어졌는데 공로가 다 무슨 소용입니까. 나라가 있어야 치하해 줄 폐하도 존재하는 법입니다.”
채비를 마친 빅터는 말에 오르며 스벤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원하는 게 뭐가 됐건,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당장 폐하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가서 도심을 살피고, 병력을 모아 주변과 대수림 접경 도시를 재정비하세요.”
침묵하는 스벤.
잡을 수 없다는 걸 확인한 그는 조용히 뒤돌아 본진으로 향했다.
“저희가 과했던 건 아니죠?”
“사라센 정복을 코앞에 뒀는데 보이는 게 있겠냐. 이 정도는 해야 돌아볼게다.”
걸어가는 스벤의 뒷모습을 보며 빅터와 나는 한마디씩 주고받았다.
그러고는.
“저는 리베로 올라가겠습니다.”
동행이 아닌 다른 목적지를 얘기했다.
“이유는?”
“리베의 상황도 비슷한 것 같아서요. 그곳의 용병들과 함께 남하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유를 묻는 빅터의 말에 나는 듀란을 떠올렸다.
“결국 인력 싸움이니까요.”
마계의 입구를 찾는다는 건 엄청난 운과 함께 막대한 인적 자원이 필요한 까닭이었다.
대수림이 작은 마을은 아닐 테니 말이다.
“반투족도 이 싸움에 함께하겠다.”
그에 보태 녀석들까지.
“괜찮겠어?”
“전투 부족이 전장을 마다할 이유가 있는가. 어차피 마족을 막지 못하면 우리의 땅도 지키지 못한다.”
걱정하는 나의 말에 부족장은 눈을 빛내며 참전을 알렸다.
“좋아. 잘 부탁할게.”
“후후… 드디어 가문의 힘이 세상에 드러나겠군.”
동생을 말하는 건가.
술은 피식피식 웃으며 기대에 찬 말을 던졌다.
술김에 태어난 녀석과 개 때문에 태어난 동생.
좌우지간 나의 부대는 리베의 용병에 더해 반투족까지 합류시키기로 했다.
“그래, 알겠다. 우리는 함브룩을 지나 시작의 마을로 이동하마.”
“네. 저는 리베에서 시작해 중앙으로 내려가겠습니다.”
목표를 정한 나는 펜리르에 올라타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한데 그 순간.
“후배님, 잠깐만요!”
급하게 달려온 베르가 손짓으로 나를 불러 세웠다.
“지도 줘 보세요.”
“지도요?”
이유야 알 수 없으나 허튼짓은 아닐 터. 펜리르에서 내린 나는 지도를 꺼내 베르에게 넘겼다.
이후 몇 번의 마법이 지도 위를 넘나들었고.
“반응하는 마력의 종류를 추가했어요. 리베에 가시면 마력 감지기를 대량 구입하세요.”
지도를 돌려준 베르는 무언가를 사라고 알려 주었다.
“그게 뭔데요.”
“초소나 주요 시설에서 사용하는 마도구인데, 주위에 발생한 마력을 감지해 알려 주는 장치입니다.”
“그걸 뭐 하러… 아! 덧처럼 여기저기 깔아 놓으란 건가요?”
“역시 후배님. 유일한 판매처가 리베에 있으니 물량은 제법 있을 겁니다. 모조리 구입해서 탐색 지역에 뿌려 두세요. 마계가 열려 마력에 변화가 생기면 신호를 보내 올 겁니다.”
“알겠어요.”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전달받은 뒤 나와 반투족은 펜리르와 풍 형제에 올라탔다.
뒤를 이어 테오까지.
“그사이 어금니가 더 커진 것 같지 않아요? 완전 코끼리네.”
앞자리에 앉은 겨울은 풍 형제를 보며 새삼스레 감탄했다.
아닌 게 아니라, 녀석들의 어금니는 내 팔보다 길게 자라났다.
팔이 뭐야.
거대한 마상창이라고 봐도 무관할 만큼 위협적으로 성장했다.
“저기서 더 자란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들은 아직 성체가 아니다. 이미 어지간한 붉은 멧돼지만큼 자랐는데 말이다.
“언령의 힘인가.”
녀석들과 펜리르를 번갈아 보며 나는 안장의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선례가 있으니 안 될 것도 없지.
이유야 어찌됐건, 펜리르와 풍 형제의 조합은 그럴듯함을 넘어 웅장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몸조심하세요.”
“네놈 앞가림이나 똑바로 해라.”
무뚝뚝한 빅터의 말을 끝으로 우리는 각자의 목표로 향했다.
* * *
“하아, 이게 다 뭐야.”
정신없이 달리고 달린 게 벌써 반나절이 지났다.
심지어 복장은 얼마나 거추장스러웠나.
굽 높은 신발과 달라붙는 긴 치마는 살로메의 목숨을 시시각각 위태롭게 만들었다.
“그저께 떠났어야 했는데.”
이제와 푸념해 본들 이미 늦어버린 후회, 귀찮음이 불러일으킨 대참사일 뿐이었다.
그렇다곤 하지만.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겠냐고.”
명색이 수도를 앞에 둔 알함브라가 아닌가. 한데 자고 일어나니 세상이 뒤집어져 버렸다.
갑자기 대수림으로 변했다고나 할까.
벌거벗은 여인이 걷는 걸 보고 처음엔 눈을 의심하며 걱정했다. 그러다 머리통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고, 손에 들고 있는 게 사람의 신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땐 이미 도시 바깥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렇게 오늘 하루가 지나 버렸다.
열심히 도망친 덕분에 뒤를 쫓는 괴물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했다.
몸을 지킬 수단은 죽음의 입맞춤뿐인데 그걸로 스스로를 지켜야하니 난감할 뿐이었다.
몬스터가 눈감고 기다려 줄 리 없잖은가.
머지않아 해는 저물 것이고, 전투 능력이 빈약한 살로메게엔 최악의 시간이 다가올 것이다.
그야말로 속수무책인 상황.
인간 세상을 벗어난 살로메의 능력은 하찮고 부질없기만 했다.
엎친 데 덮친다던가.
다가온 또 다른 현실이 살로메를 더욱 심란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여기가 어디야…….”
어디를 지나고 있는지 당최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다 몬스터라도 마주친다면.
최악을 떠올린 살로메는 고개를 저으며 바쁘게 걸음을 놀렸다.
어떻게든 몸을 숨길 장소 정도는 찾아야 할 테니까.
사방을 둘러보며 막막해하던 그녀는 오른쪽을 향해 막연히 걸어갔다.
서서히 어두워지는 황무지의 오후.
“아!”
지친 발걸음을 내딛던 살로메는 무언가를 발견하곤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 * *
우리의 목표는 사라센을 종으로 가르는 것이었다.
알함브라를 지나 바빌리안으로, 거기서 조금 더 달려 리베로 향하는 것이 기본 루트였다.
그렇게 달려 알함브라를 지나쳤을 무렵.
“이 위로부턴 경로를 바꿔야 할 것 같군.”
“왜? 어디로 바꾸게.”
“북쪽의 성들은 아직 건재한 곳이 많지 않은가. 조금 더 인적이 드믄 곳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다.”
부족장은 요란스런 부대의 행군에 대해 걱정을 드러냈다.
우린 지금 정말 신나게 달리고 있으니까.
때때로 몬스터와 조우할 때면 거칠 것 없이 쓸어 내며 전진하기를 반복했다.
따라서 주목받을 만한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 건 맞는 얘기였다.
그러나 사라센 군대와 마주칠 확률은?
지금까지 상황을 정리해 봤을 때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수도가 작살나게 생겼는데 뭐라도 하고 있겠지. 아니면 성문 걸어 잠그고 있든가.”
굳이 이런 외곽까지 기어 나올 시점이 아닌 것이다. 주둔 중인 성을 지키거나, 수도를 지키러 갔겠지.
그러니 우리와 마주칠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었다.
“흠, 그럴 수도 있겠군.”
불안해하던 부족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의 말에 수긍했다.
제정신이라면 이런 곳으로 나오지 않았을 태니까.
밀려오는 마수 군단을 보며 나는 행군의 방향을 결정했다.
하지만 놈들의 속도가 더욱 빨랐고.
“먼저 달려!”
어느새 따라붙은 거인들을 향해 금빛 해머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