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흑마탑을 나온 카리프는 몬스터가 이동 중인 외곽으로 달려갔다.
길가의 풍경은 처절했다.
도시 밖으로 이어진 길은 핏물이 흥건했고, 널브러진 자잘한 몬스터의 사체가 병사들의 시신과 함께 나뒹굴고 있었다.
저것을 시체라고 할 수 있나.
형태조차 없는 붉은 덩어리들은 짓밟힌 개구리마냥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다.
도대체 어떤 공격을 당했기에 이렇게 된 걸까.
흔적을 쫓는 카리프의 시선은 머지않아 한곳에 멈췄다.
그러고는 뜬금없이 탄성을 내뱉었다.
저런 크기의 몬스터가 있었구나.
뭐, 이런 느낌으로.
괴수의 신장은 5m가 훌쩍 넘었고, 팔다리는 신전의 기둥처럼 두꺼웠다.
그런데.
“저렇게 빠를 수가 있나?”
체격과 맞지 않는 민첩함에 카리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저 커다란 몸이 인간과 같은 속도로 움직였다.
체감되는 느낌은 몇 배 이상.
똑같은 1초를 움직여도 그사이 이 괴물은 사람의 활동 반경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아이와 어른의 차이이랄까.
이 둘이 함께 움직이는 모습을 떠올린다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따라서 현장은 위태로웠다.
말이 좋아 유인이지, 실상은 쫓기는 것과 다름없었다.
“큭, 더 빨리 달려! 따라잡힌다고!”
기를 쓰고 달려 보지만, 거리는 좀처럼 벌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놈이 거리를 조절하는 느낌 이었다.
녀석은 좁혔다 멀어지길 반복하며 안간힘을 쓰는 병사들을 하나씩 때려죽이고 있었다.
저 엄청난 철봉을 회초리처럼 사용하면서 말이다.
이대로 놔뒀다간 더 큰 사달이 일어날 터. 호흡을 정리한 카리프는 사라지듯 몸을 날려 놈의 뒤에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그어지는 은색의 실선.
오금이 잘린 몬스터는 부러지듯 무릎을 꿇으며 요란하게 주저앉았다.
그대로 전진한 카리프의 검은 고개 숙인 놈의 목덜미를 향해 칼끝을 내리그었다.
카앙―
하지만 카리프의 검은 녀석의 목에 닿지 못했다.
대신 마주한 건 거대한 두께의 철봉. 공격을 막아 낸 검은색 쇳덩이가 바람을 가르며 카리프에게 쇄도했다.
부아아아악―
공기를 찢는 소리가 살벌하게 지나갔다.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날아간 철봉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다시 되돌아왔다.
부욱!
붕! 부우우웅!
아찔하게 스치는 철봉 사이로 카리프의 그림자가 다가왔다.
카리프의 눈동자는 차갑게 빛났고, 거머쥔 검날에선 탁한 오러가 예리하게 피어올랐다.
7성급 이상이라고 했었나.
어떤 기준으로 판단했는지 모르겠지만, 놈의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다.
이대로 갈라져 죽는 것.
다리를 못 쓰는 놈이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가 전부일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카리프의 착각이었을 뿐.
“조심하십시오, 카리프 님! 그놈은 말도 안 되는 재생 능력이 있습니다!”
녀석은 잘린 다리를 일으켜 세우며 철봉을 내밀었다.
“재미있군.”
카리프의 얼굴에 희미한 변화가 떠올랐다.
7성급 이상이라더니.
놈의 능력을 확인한 카리프는 이제야 해 볼 만하다고 느낀 것이다.
그렇다면 제대로 상대해 줄 수밖에.
― 가문 대대로 이어 오는 검술이다. 잘 보고 배우거라.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카리프는 검을 고쳐 잡았다.
무스타파류 검술 제1장, 천 개의 검.
― 최선의 수비는 공격이다. 적의 도발을 원천 봉쇄하는 것이야말로 무스타파류의 근본. 제1장 ‘천 개의 검’은 상대의 전투능력을 빼앗는 최고의 검술이다.
그날의 수련을 끝으로 부자간의 연습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아비는 잘린 머리로 돌아왔고, 어린 카리프는 재능 없는 멸문 귀족의 아이로 성장했다.
하지만 지금.
비참한 시절을 보냈던 아이는 세상의 꼭대기에 서서 천하를 오시하려 했다.
이런 마물 따위에게 멈출 순 없는 법.
검을 내민 카리프의 손이 잔상을 남기며 빠르게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하나였던 검이 두 개로.
더욱 빨라진 두 개의 검은 다시 세 개가 되고 네 개로 변했다.
마침내 카리프의 주변이 검으로 가득 찼다고 느껴진 순간.
콰가가가가가각!
둥그렇게 채워진 은색의 검이 거대한 몸뚱이를 향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설혈이 낭자하는 놈의 거체.
천 개의 손을 만든 카리프는 적의 목을 노리며 두 번째 검식을 뽑아냈다.
― 무스타파류 검술 제2장 ‘신속의 검’은, 극한의 속도를 통해 적의 목숨을 노린다.
재능 없던 시절의 카리프는 가문의 절기를 구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완벽하게 강화된 그의 몸을 통해 실전된 가문의 검술이 재탄생하고 있었다.
더욱 강해진 모습으로.
크워워워워워웍!
잔상조차 남지 않는 카리프의 검이 거대한 몬스터의 몸을 도륙했다.
또다시 무너지는 마수의 거체.
재생을 허용하지 않는 카리프의 검이 놈의 뼈와 살을 처참히 분리해 갔다.
하나 몬스터의 질긴 생명력은 여전했고, 놈의 철봉은 카리프의 머리를 노리며 빛살처럼 날아들었다.
갈라진 바람마저 비수가 되는 엄청난 파괴력.
무심한 카리프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무스타파류 검술 제3장, 처형의 검.
스으윽―
소리조차 집어삼킨 카리프의 검이 반짝거리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순간 멈춰 버린 세상.
내리치던 거대한 철봉이 반으로 갈라졌다.
그것을 쥐고 있던 두꺼운 팔도.
카리프의 검이 그은 궤적은 직선을 그으며 마주한 모든 걸 나눠 버렸다.
멈췄던 세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콰아아아아아아앙!
검기가 스쳐 지나간 흔적 위로 가공할 폭발이 이어졌다.
* * *
알함브라로 이동하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기이할 정도로 많아진 몬스터들 때문이다.
깊은 산자락에서나 마주했을 녀석들이 도심으로 향하는 공도에서 빈번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무리를 이룬 집단으로.
이쯤 되니 슬슬 분위기가 바뀌었다. 불신이라는 감정이 병사들의 생각을 좀먹기 시작한 것이다.
“사병들의 동요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죠. 전쟁과 다른 미지의 현상이니까요.”
휴식 중인 상황에도 부관들의 걱정은 계속 이어졌다.
집중해도 모자를 판에 몬스터까지 끼어들었으니 전쟁의 흐름이 비틀린 탓이었다.
뜻하지 않게 시작된 삼파전.
이제 전쟁의 향방은 단순한 승리로 정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버렸다.
수많은 변수를 극복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과거에 마족은 어느 시점에 등장했나요?”
침묵으로 일관하는 빅터에게 나는 조용히 질문했다.
그들이 등장하기 전에 전쟁을 끝낼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핵심은 이 부분이었다.
“흐음…….”
그에 빅터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 때문일 것이다.
마족의 등장 이전과 이후.
지금의 변화가 인마대전의 전조증상이라면, 마족이 등장하기 전에 모든 준비를 마쳐야 한다.
마계의 주인이 인세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지옥이 열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는 달라진 환경을 이상 징후라고 인지하지 못했었다. 그러니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추측할 수도 없지.”
그러나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그저 회한 어린 표정만 있을 뿐.
빅터의 말에 의하면 당시엔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긴 전례가 없었을 테니…….”
그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빅터의 대답에 수긍했다.
경험이 없다는 건, 비교할 대상이 없다는 것일 테니까.
“게다가 그때는 대수림부터 변화돼 바깥으로 흘러나왔다. 이상함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크게 변해 버린 이후였지.”
빅터는 무지했던 과거를 후회하듯 굳은 얼굴로 당시를 회고했다.
“이미 등장했을 수도 있겠네요.”
“그렇지 않길 바라야지.”
결국 모든 건 불확실하게 방치돼 있었다.
고민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인마대전은 이미 시작되었을지 모른다.
“지휘 막사로 오시랍니다!”
“무슨 일인가.”
헐레벌떡 달려온 병사에게 켄드릭이 답했다.
“그게… 사라센에서 전령이 온 모양입니다.”
“전령이라니?”
“자세한 내용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총사령관님께서 지휘부 소집을 명하셨습니다.”
* * *
사라센 전령이 들고 온 소식은 간단했다.
주된 내용은 이 전쟁을 멈추자는 것.
대륙 전체에 걸쳐서 발생되고 있는 이상 현상을 무시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헛소리.”
하지만 스벤의 뜻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강경해졌다고나 할까.
“먼저 침략해 올 때는 언제고, 이제 와 종전이라니. 패배가 눈앞으로 다가오니 유치하게 구는군. 그러한 대승적인 이유를 들면 우리가 냉큼 응할 줄 알았더냐.”
긴장한 사라센의 전령을 두고, 스벤은 냉소로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의 행동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시기가 안 좋았을 뿐.
“이놈의 목을 쳐서 되돌려 보내라.”
“안 됩니다.”
폭주하는 스벤의 말에 나는 조용히 나서며 저지했다.
지금은 더 큰 위험을 주시해야 하는 혜안이 필요한 시점인 까닭이었다.
하여 나는 그걸 알려 주고자 말을 이어 나갔다.
“못 들으셨습니까? 적들은 이미 알함브라를 버리고 수도로 후퇴했습니다.”
“그러니 고삐를 늦춰선 안 되는 거요. 병법에 무지한 것 같은데, 기회가 왔을 때 잡지 못하면 그 다음은 몇 배로 힘들어지는 법이오.”
“그 부분은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어째서요.”
“이미 스스로 무너지고 있으니까요. 알함브라에 있던 강화 인간이 모두 마인으로 변했고, 거기에 몬스터들까지 합세해 도시를 초토화 시켰다고 들었습니다. 수도의 상황이라고 다를까요? 제가 보기엔 조만간에 자멸할 것 같은데요?”
나는 고개를 돌려 사라센의 전령을 바라보았다.
“엘 하즈라에 주둔한 강화 인간들은 어떻게 되었나.”
“그게…….”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는 공멸을 막기 위함이 아닌가? 너희의 병력이 얼마가 됐건 우리에겐 위협이 되지 않아. 살고 싶다면 너희의 상황을 설명해라.”
쭈뼛거리던 전령은 긴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는 결심한 듯 고갤 들어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수도에 있는 강화 인간도 모두 마인으로 변했습니다. 때문에 내전 상태가 되었고, 알함브라에서 넘어온 괴인들로 인해 매우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어쩌면 브라함에게 함락 당하는 것보다 놈들에게 무너지는 게 더 빠를지도 모릅니다.”
소식을 전하는 전령의 표정에 비통함이 가득했다.
사실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알함브라에 몬스터가 몰린 이유는 근처에 있는 마하라자 때문일 테니까.
대수림에서 유입된 몬스터들은 마하라자를 지나 알함브라를 점거했고, 이어서 수도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들으셨죠? 이 난장판에 우리가 끼어들어 피해를 키울 이유가 있습니까?”
스벤을 향해 질문을 던진 나는 다시 전령에게 시선을 돌렸다.
“몬스터의 수가 얼마나 되는 가.”
“알함브라를 덮친 놈들의 규모는 대략 오천에 가까웠습니다.”
“오천?”
“네. 그 이상일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처음 보는 몬스터들이라 대처할 방법조차 없었습니다.”
“처음 본다면 어떤 종류를 말하는 건가.”
“여인의 몸에 염소의 머리를 하고 있다든가, 5m가 넘는 신장에 눈 없는 거인… 짐승의 몸에 세 개의 머리를 한 괴수도 있었습니다.”
나는 질문을 멈추고 빅터를 바라보았다.
이건 어떻게 생각해도 마계의 출현이 아닌가.
“결정적으로, 알함브라를 함락시킨 건 뿔이 달린 인간이었습니다.”
“뿔이 달렸다고?”
“네. 저희와 똑같은 형상에 이마에 긴 뿔이 달려 있었습니다.”
쾅!
그와 동시에 빅터의 주먹이 책상을 내리쳤다.
“마족이다.”
더 이상의 말도 없었다.
자리를 박찬 빅터는 회의 막사를 나가 모습을 감췄다.
나 역시 자리를 털고 일어섰고.
“스승님과 저희 부대는 인마대전을 준비하러 가겠습니다. 땅따먹기는 총사령관님이 알아서 하시지요.”
뒤를 따르는 부관들과 함께 막사를 돌아 나왔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