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목숨 99개-169화 (169/203)

169화

사라센에 있는 대수림 접경 지역은 총 세 군데가 있다.

바빌리안에서 멀지 않은 동쪽 계곡과 알함브라에서 이어지는 접경 도시 마하라자.

마지막으로 수드라와 가까운 곳에 있는 매드나가 대수림으로 향할 수 있는 통로였다.

그중에 가장 번성한 곳을 꼽으라면 역시나 마하라자.

사라센의 용병 조합은 이곳을 중심으로 발달되어 왔다.

그런 마하라자 역시 심상치 않은 징조는 있었다.

그리고 오늘.

“도, 도망쳐…….”

대수림과 마주한 초소에 재앙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봐, 정신 차려! 어떻게 된 일이야?!”

초소를 지키던 병사는 다리가 절단된 남자를 붙잡고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무슨 일을 당했기에 이렇게 만신창이가 된 걸까.

초소 앞까지 기어온 남자는 경련을 일으키며 숨을 거뒀다.

“젠장! 비상 신호를 쏘아 올려!”

뒤돌아 소리친 병사는 사망한 남자를 잡아끌었다.

그러고는 이질적인 감각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리 한 짝의 무게가 이렇게 클 줄이야.

가벼워진 몸을 끌던 병사는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저었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는 풍경이 펼쳐진 탓이었다.

벌건 대낮에.

수풀 속에서.

발가벗은 나체의 여인이 꿈을 꾸듯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것도 여러 명이.

“가면인가……?”

병사는 염소와 똑같은 머리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나 그런 의구심도 잠시.

꿀꺽…….

뇌쇄적인 여인들의 자태에 시선은 자꾸만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렇게 거리는 가까워졌고.

“진짜 머리?”

그제야 병사는 이것이 가면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더 일찍 눈치챘어야 했다.

이들이 악마였다는 것을.

“커허억!”

여인의 손이 명치를 파고들어 온 순간, 병사는 비명과 함께 염소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후회했다.

벌어진 염소의 주둥이가 자신의 손목을 덥석 씹어 삼켰기 때문이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초소를 가득 채우는 단말마의 절규.

콰드득―

고통에 가득 찬 병사의 얼굴은 생선 껍질처럼 뜯겨 나갔다.

* * *

“시설이 좋아서 그런지 확실히 작업이 수월하군요. 벌써 대부분의 병사들이 승급을 마쳤습니다.”

“좋은 소식이군.”

“네. 아주 만족스러운 결과입니다. 먼저 시작했던 병사들은 이미 다음 강화에 들어갔을 정도니까요. 내일이면 모든 병력이 신인류로 거듭나게 될 겁니다. 그중에 1/3이 5성급 이상이고요. 놀랍지 않습니까? 그 정도 인원이라면 사라센 따위는 진심으로 상대할 만합니다.”

보고서를 받은 카리프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로서 보유한 모든 병사의 승급이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결과를 실제로 만들어 낼 줄이야.

“이게 다 이번에 개량시킨 강화 방법 때문이지요. 시술 방식이 간소화된 덕분에 강화 속도가 말도 안 되게 줄어들었습니다. 시술을 하고 연구실에 죽치고 있을 필요가 없어요. 그냥 돌아가서 일상생활을 하면 됩니다. 그러니 연구실 회전율이 엄청나게 높아졌지요. 이젠 그냥 찍어 내는 수준입니다. 이 모든 게 제가 잘나서 얻은 결과지만, 카리프 님은 저와 함께 기뻐하셔도 됩니다. 여기까지 올 수 있던 건 카리프 님의 역할이 컸으니까요.”

체내에 마석을 삽입하던 방식을 바꾼 자하르는 보다 쉽게 마기를 인간에게 침투시켰다.

결과는 대성공.

“융합 방식에 변형을 둔 것이지요. 물과 기름이 섞이지 않을 것 같지만, 적절한 유화제가 있다면 상황은 달라지거든요. 그와 같은 이치입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고생했다.”

어차피 이해 못할 영역인 바.

카리프는 손을 휘적거려 길게 이어질 설명을 잘라 냈다.

그의 공로라는 건 인정하니까.

긴 시간을 들여 진행했던 시술은 이젠 간단한 치료 수준으로 바뀌었다.

자하르의 말처럼 이제 쏟아져 나오는 수준.

마석을 삽입하지 않으니, 시간과 재료 소모의 범위가 말도 안 될 만큼 줄어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고무적인 건 부작용 문제입니다. 이유는 모르겠습니다만, 사마르의 강화 인간들은 모두 마인이 돼 버렸지요. 저희 신인류들은 멀쩡하고요. 이것이 뜻하는 건 우리의 방식이 옳았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미 이 싸움은 저희가 이긴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시술의 부작용.

연구를 위해 포획한 사마르의 강화 인간들은 모조리 마인으로 변해 버렸다.

처음엔 그저 우연이라고 여겼지만, 그렇게 치부하기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같은 시간에 똑같이 변했다는 것이 좀 마음에 걸리는군요.”

한날한시에 변한 강화 인간들과 몬스터의 이상 행동들.

“카리프 님도 소식은 들으셨겠지요?”

“무엇을 말하는가.”

“몬스터 말입니다. 동쪽 계곡에서 대수림 몬스터들이 넘어 들어온 모양입니다.”

연관성 없는 두 사건을 두고 자하르는 묘한 연결 고리를 감지했다.

세상에 우연이라는 건 없으니까.

어떤 일이 생겼다는 건 누군가 무엇을 했기 때문이다.

“어쨌건 내일 중으로 모든 작업을 완성하겠습니다.”

“좋아. 모든 작업이 끝나면 수도로 진격하겠다.”

“흐흐흐, 기대되는군요.”

수도인 엘 하즈라까진 약 3일 거리.

브람함보다 먼저 도착하는 게 관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유리했다.

브라함의 군대가 수도에 도착하려면 알함브라를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보급로를 지키고 후위의 안전을 도모하려면 지나칠 수 없는 과정이다.

하지만 카리프의 부대는 다르다.

인원 자체도 가볍고, 무엇보다 보급로를 신경 쓸 이유가 없다.

전군이 함께 움직이고 있으니 후방 지원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보급은 점령한 도시에서.

병력의 보충 또한 전향을 통해 늘려 갈 뿐이었다.

따라서 진행 루트의 유연성이 높다.

시간 단축이 목적이라면 빠른 코스를, 병력과 자원 충당이 목적이라면 큰 도시를 공략하면 그만이다.

이 얼마나 편리한가.

지킬 것이 없다는 건 자유로운 계획을 허락했다.

더군다나 사라센의 전력은 브라함을 상대로 집중된 상태.

카리프는 다양한 선택지를 두고 상황에 따라 고르면 될 뿐이었다.

“카리프 님! 바깥에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 인가.”

“동쪽 계곡에서 몬스터들이 넘어 들어온 것 같습니다!”

병사의 다급한 보고에 카리프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몬스터가 나타났으면 잡으면 될 터, 이렇게까지 호들갑을 떨 일은 아니라 생각한 탓이었다.

“그게 왜?”

“출몰한 몬스터 중에 7성급 이상이 있다고 합니다!”

“뭐라? 확실한 정보인가?”

“네! 도시 외곽으로 유인하는 중입니다만, 이미 피해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병사의 보고가 끝났을 무렵엔 카리프는 이미 방을 나간 이후였다.

* * *

회의실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악명 높은 모하비 성을 이토록 쉽게 공략했음에도 브라함의 군대는 즐거워할 수 없었다.

루드겐 마이어의 죽음 때문에?

아니다.

그의 죽음에 동요했던 건 스벤 총사령관 하나뿐.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인연이란 이토록 가벼웠다.

부관을 잃은 스벤은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아 덤덤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끼리끼리 모인다더니.

비어 있어야 할 스벤의 옆자리엔 의욕에 가득 찬 새로운 얼굴이 눈을 빛내며 앉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심란한 이유는 바로 이것.

“그래서 폐하는 어쩌길 원하신다는 겁니까?”

수도에서 날아온 한 장의 서신 때문이었다.

“특별한 하명은 없으셨습니다만, 함브룩에 몬스터들이 들어와 쑥대밭이 됐다고 합니다.”

“함브룩에 있는 용병 조합들은 뭐하고요? 용병이 아니라도 영지의 정규군들이 있는데 몬스터에게 당했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서신에 그렇게 적혀 있네요. 함르룩은 이미 난리가 났다고. 그러니 수도인 레반도르가 비상이 걸린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 뭐 8성급 괴수라도 나타났답니까? 대수림에서 몬스터가 넘어왔다고 해도 초입의 놈들일 건데, 그런 놈들이 어떻게…….”

“8성급이랍니다.”

“네?”

“측정이 안 된대요. 7성급 몬스터의 기준을 아예 넘어 버렸답니다.”

“그게 무슨… 아니, 6성급 놈들을 만나는 것도 흔한 일이 아니잖습니까. 그런 괴수들은 깊숙한 곳에 숨어 지내는 게 아니었나요?”

“낸들 압니까. 나타났다니 그렇게 믿을 수밖에요. 흑마탑을 추적하던 군대들도 모조리 불러들이신 모양입니다.”

“허허, 거참… 엘 하즈라가 이제 코앞이거늘.”

이 모든 소란은 빅터가 예견했던 인마대전의 전조 때문이었다.

“사실 외진 영지에선 이미 공론화되었던 얘기입니다. 전쟁 중이라 이곳에 영향을 주지 못했을 뿐이지요.”

후발대로 합류한 영주의 말에 나는 조용히 기억을 곱씹었다.

처음 듣는 얘기가 아니었으니까.

제나르 성에 합류한 영주들은 영지의 사정을 말하며 불안해했었다.

이제 와서 더욱 커졌을 뿐.

“전쟁을 중단해야 합니다.”

듣고 있던 빅터가 묵직한 울림을 내며 종전을 주장했다.

“이제 와서요?”

“네. 시간 낭비할 틈이 없습니다.”

“흐음.”

갑작스런 빅터의 제안에 스벤은 침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고민에 빠져들었다.

잠시 후.

“수도 인근에 8성급 몬스터가 나타났으니 비상시국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전시 상황이 아닙니까. 우리의 목표는 전쟁의 승리이고, 더군다나 지금은 그 끝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 엘 하즈라를 함락하고 돌아가는 게 옳은 것 같습니다.”

“그러면 늦습니다.”

“폐하께서도 즉시 오라고는 안 하셨습니다. 수도에도 방위군은 있으니까요. 국가급 몬스터의 대처법은 이미 훈련된 사항이니 돌아갈 시간 정도는 충분히 벌어 줄 것입니다.”

회군을 주장하는 빅터의 생각에 스벤은 정반대의 의견을 내세웠다.

그리고 나는 별다른 감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벤의 말도 틀리진 않았기 때문이다.

대상이 몬스터뿐이라면 말이다.

“그 대처법이라는 게 결국 유인해서 먼 곳으로 내다 버리는 것 아닙니까. 지금 상황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요? 그 외에 뭐가 또 있다는 겁니까. 빅터 공께서 너무 깊게 염려하시는 것 같습니다.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사라센 정벌은 또 언제 올지 모릅니다. 그걸 알고 계시기에 폐하께서도 달리 명을 내리지 않으신 겁니다.”

“모르고 계시니까요.”

“무얼 모른다는 겁니까.”

“단순한 몬스터의 난입이 아니라는 것을요.”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 두 사람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리며 대립하고 있었다.

“하면 뒤에 뭐가 있다는 겁니까? 답답하게 굴지 말고 다 꺼내세요.”

결국 스벤의 인내심이 한계를 드러냈고.

“인마대전입니다.”

빅터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얼어붙어 버린 회의실.

대화가 다시 시작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건 너무 많이 가신 것 같습니다. 인마대전이라니요.”

“흑마탑주가 카론과 루즈라면 인마대전은 억측이 아닙니다.”

“그들이 살아 있는 것과 인마대전이 무슨 상관입니까? 그것은 이미 봉인되어 끝난 일 아닙니까.”

“봉인이 다시 풀렸으니까요.”

“네?”

“당신은 모르겠지만, 카론과 루즈는 인마대전의 열쇠들입니다.”

“그건 또 무슨 말…….”

대답을 꺼내던 스밴은 말을 멈추고 숨을 몰아쉬었다.

소환된 이계인을 아는 몇 안 되는 남자.

그러니 생각이 많아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가 아는 건 거기까지였나 보다.

“어찌됐건 우리는 엘 하즈라를 점령하고 네자르 황제를 잡아들일 것입니다.”

“다시 생각하시오.”

“아닙니다. 폐하께서 하명하셨다면 모를까, 여기까지 와서 회군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스벤 공.”

“공이 아닌 총사령관이요. 내일 아침 알함브라로 출발할 테니 오늘 중으로 정비를 마치시길 바라오.”

자리에서 일어난 스벤은 뒤돌아 회의실을 나섰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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