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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99개-168화 (168/203)

168화

리베의 용병 조합은 오늘도 역시 시끄러웠다.

기분 좋은 소란이 아닌 무거운 웅성거림.

고성과 신음이 오가는 이유는 며칠 전 상황이 더욱 악화됐기 때문이다.

“그 정도였나요?”

“조사단을 대규모로 만든 게 다행이었습니다. 만약 인원이 적었다면 큰일을 치렀을 겁니다.”

듀란의 답을 들으며 조합장 한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기대했단 결과를 한참 벗어난 탓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수상한 정황을 확인한 조합장 한스는 단체장의 허가를 받아 대수림 조사단을 파견했다.

마치 전쟁을 나가듯 말이다.

한데 그런 인원들이 퇴각을 했을 만큼 대수림의 상황은 며칠 사이 급격하게 변해 버렸다.

“5성과 6성급이 흔해졌습니다. 오가며 마주한 7성급만 해도 세 마리였고, 그 이상으로 추정되는 놈도 발견했습니다. 다행히 회피했으니 망정이지…….”

말끝을 흐리는 듀란의 얼굴에서 당시의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7성급 이상을 발견했다니.

이것은 국가가 나서야 할 만큼 심각하고 중대한 사안이었다.

한데 그런 몬스터를 이렇게 쉽게 마주쳤다고?

심지어 조사단이 다녀온 지역은 대수림 초입 인근에 불과했다.

인간의 발자취가 없는 깊숙한 곳이 아니란 얘기다.

그래서 심각했다.

저런 놈들이 초입부터 나타난다면 정상적인 수렵은 불가능해진다.

그 와중에 서식지를 이탈한다면?

놈들이 대수림 바깥을 향하는 순간, 인간들은 몬스터와 전쟁을 치르게 되는 것이다.

“대수림만 그런 게 아닙니다. 도시 외곽마다 몬스터들이 창궐하고, 알브족이 있는 달의 계곡도 하루하루가 다른가 봅니다.”

듀란과 함께 나섰던 조사대원은 무거운 얼굴로 말을 거들었다.

대륙 전체에 걸쳐 일어나는 이상 징후들.

소식을 접할수록 한스의 표정은 더욱 굳어져 갔다.

“그 와중에 전쟁까지 있으니 걱정이네요. 일이 커지면 주변국들과의 협력도 필요할 텐데.”

“그러게 말입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라센이 저 지경이니 난감하군요.”

듀란은 한스의 말을 받아 걱정스레 대답했다.

하필 가장 가깝고 강한 조력자가 저지경이라니.

대수림의 문제는 어느 한 국가만의 사정이 아닌, 접경을 맞댄 모든 나라의 관심과 협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앙숙이던 사라센과 브람함도 협력했을 만큼, 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초월적인 이해관계가 성립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흐트러진 상황.

“일단 이반 님께 연락해서 상황을 좀 알아봐야겠습니다.”

조합장 한스는 책상 서랍을 열어 양피지를 꺼내 들었다.

* * *

북문을 정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다 도망간 건가.”

할 일이 없었다는 게 맞을 것이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

부족장은 활짝 열린 성문을 보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보이는 건 사라센 병사들의 사체와 부서진 성벽의 잔해들뿐.

어슬렁거리는 마인 몇을 제외하곤 이곳은 이미 끝난 전장이었다.

콰직!

비척대는 마인들을 정리하고 우리는 다시 내성으로 향했다.

그렇게 돌아가려 했는데.

“저건 또 뭐야?”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얼굴을 찌푸리고 말았다.

“루드겐이라는 자가 아닌가.”

“그렇군. 한데 저치가 왜 저기 있는 거지?”

“딱 보면 모르나. 인질이구만.”

마지막 술의 얘기처럼 루드겐은 두 손이 묶인 채 끌려오고 있었다.

기세등등하게 내성을 정리하겠다더니 오히려 포로가 되어 나타났다.

“이곳의 지휘관이 누군가!”

“나다.”

적장의 부름에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나는 사라센의 총사령관 막심 투르크만이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그에 중년의 남자는자신의 정체를 밝히며 나의 정보를 요구했다.

어차피 서로 죽일 놈들끼리 이름은 알아서 뭐하려는지 모르겠지만.

“이반.”

남자의 요구에 따라 이름을 간략히 알려 주었다.

“길을 터라. 우리가 북문을 벗어나 모습을 감출 때까지 추적하지 않는다면 이자를 살려 줄 것이다. 하지만 길을 막는다면 이 남자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다.”

그러나 돌아온 얘기는 이런 개소리였고.

“야, 성문 닫아.”

나는 숨도 쉬지 않고 남자의 말에 대답했다.

“이자가 목숨을 잃어도 상관없단 말인가?!”

“상관없어.”

“이자는 총사령관의 부관이다.”

“나의 총사령관이 아니야.”

“이 상황에 말장난이라니 배짱이 대단한 친구로군.”

“아니, 진심인데.”

변함없는 나의 대답에 막심이라는 적장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하지만 그 대신.

“그게 무슨 망발인가! 브라함 제국군에 속해 있으면서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포승줄에 묶인 루드겐이 발악하듯 소릴 질러 댔다.

“망발이라니. 난 스승님 때문에 여기 있는 거지, 브라함 때문이 아니야. 내가 누군지 잊었어?”

그에 루드겐은 어금니를 깨물며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나는 아리안의 자작이니까.

함께 싸워 줘서 감사하다 인사를 받아도 모자랄 판이었다.

한데 어디서 감히 훈계를!

“어차피 당신은 못 나가. 인질을 잘못 잡았어. 죽이고 시원하게 싸우든지, 붙잡고 힘들게 싸우든지 알아서 하라고.”

상황을 가늠하던 막심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루드겐을 바라보았다.

속았다는 표정일까.

당황스러워하는 막심의 얼굴에서 다양한 생각이 읽혀지고 있었다.

“적의 총사령관을 잡느냐, 우리의 부관 나부랭이를 잃느냐… 빤한 선택이잖아.”

“네, 네놈이 감히!”

막심을 향한 확고한 나의 태도에 루드겐은 얼굴을 흙빛으로 물들인 채 소리쳤다.

그런데.

지금 ‘감히’라는 말을 쓴 건가?

쓴웃음이 절로 나와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쥐새끼 주제에.

나는 손에 쥔 해머에 원기를 넣으며 놈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감히라고? 너 같은 놈이 감히 영웅들을 배신하고 만삭의 여인을 죽였지.”

“그건 명령이었다!”

“아니지. 스승님을 떠나 스벤에게 간 건 너의 뜻이잖아. 덕분에 잘 먹고 잘살아 왔고. 이제 대가를 받아야지. 안 그래?”

굳어 버린 루드겐은 할 말을 찾는 듯 입술을 움찔거렸다.

차라리 입 다물고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웃기지 마라! 나는 제국과 황제를 위해서 행동했을 뿐이다!”

루드겐은 대의를 앞세우며 자신의 탐욕을 포장했다.

그런 놈의 모습에 나는.

“잘했어. 그러니까 네가 싼 똥은 네가 치워.”

희미하게 남은 망설임조차 완벽하게 지워 냈다.

“자, 잠깐! 지금 뭘 하려는 건가! 스벤 공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칭찬하겠지.”

적의 총사령관을 잡았다고.

기겁하는 루드겐을 보며 머리 위로 해머를 들어 올렸다.

“멈춰! 멈추라고 이 새끼야아아아아아아!”

괴성과 함께 놈의 발악이 시작됐고.

“천벌.”

나는 낮은 목소리로 금빛 해머를 소환했다.

루드겐과 막심의 머리 위로 떠오른 거대한 원기의 모습.

“하… 시발.”

고개를 치켜든 루드겐은 헛숨을 내쉬며 뇌까렸다.

그리고 낙하.

금빛 해머가 내리꽂히는 순간, 막심은 루드겐을 밀치며 자리를 이탈했다.

콰아아아아아앙!

홀로 남은 루드겐의 머리 위로 원기의 해머가 떨어졌다.

드디어 시작된 복수.

처참히 뭉개진 놈을 지나 막심을 향해 달려들었다.

“우리도 가자!”

때를 같이해 반투족이 뛰쳐나왔다.

그렇게 북문은 다시 전장으로 돌변했고, 적의 총사령관 막심은 오러를 뿜어내며 나의 해머에 맞섰다.

쿠와아앙! 쾅! 콰광!

막심과 검을 마주한 느낌은 7성의 끝자락.

경지를 파악한 나는 잔상을 남기며 호쾌하게 해머를 휘둘렀다.

“크윽.”

압도적인 파괴력에 밀린 막심이 크게 물러섰다.

그리고 그 자리엔.

콰가가가가각!

원기로 이루어진 해머가 쉴 틈 없이 내리꽂혔다.

“커허억!”

비명을 지르며 구르는 놈의 곁으로 어느새 나의 해머가 날아들었다.

“큭!”

적장 막심은 간발의 차이로 나의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상관없다.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

콰아아아아아아앙!

바닥에 작렬한 광역 강타는 유난히 강한 폭음과 함께 주위를 날려 버렸다.

폭발과 함께 날아가는 막심.

그의 착지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또다시 나의 공격이 들이쳤다.

쿠아아아아아아아앙!

연이은 광역 강타에 놈의 몸은 공중에 뜬 채 여기저기 날아다녔다.

마치 공놀이를 하듯.

필사적으로 버티는 놈을 향해 나는 스킬을 날리며 유린했다.

“끄어어어어억…….”

마침내 땅을 밟은 막심은 피를 토하며 주저앉았다.

챙!

덤덤히 다가선 나는 놈의 검을 발로 차 멀리 치워 버렸다.

그러고는.

콰지직!

바닥을 짚은 놈의 팔을 사정없이 짓뭉갰다.

“크아아아아아악!”

혹시 모를 희망 따위, 애초에 잘라 버린 것이다.

“포박해라.”

비명을 지르는 막심을 생포해 내성으로 걸음을 옮겼다.

돌아간 그곳엔 스벤이 와 있었고.

“적의 총사령관 막심입니다.”

나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리품을 전달했다.

“루드겐은? 이자에게 인질로 잡혀갔다고 들었네만.”

“현장에서 용감히 저항하다 전사했습니다.”

“허, 그게 사실이란 말인가?!”

“네. 덕분에 적장을 생포할 수 있었습니다.”

당황하는 스벤을 향해 나는 감정 없는 말투로 건조하게 대답했다.

‘다음은 네놈 차례다.’

명분과 상황만 갖춰진다면 다음은 스벤, 그 다음은 황제 데드릭 폰 케이사르다.

조용히 돌아선 나는 감정을 삼키고 빅터에게 향했다.

한데 그 순간.

딸랑―

들려오는 맑은 종소리에 나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품속을 뒤졌다.

소리의 출처는 메신저였다.

발신자는 리베에 있는 용병 조합장 한스.

[대수림과 도시 외곽에 몬스터가 대량 발생했으며, 강하게 진화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8성급으로 추정되는 개체도 발견되었습니다.

계신 곳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주변 국가의 상황도 비슷한 것으로 보아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희에게 알려 주실 만한 정보가 있다면 공유 부탁드리겠습니다.]

보내온 메신저의 내용은 세기말의 전조 증상이었다.

인마대전이 다가왔음을 알리는 신호.

나는 메신저의 내용을 빅터에게 전해 주었다.

그에 빅터의 미간이 깊게 일그러졌고.

“결국 시작돼 버렸구나.”

양피지를 접으며 낮게 읊조렸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마계의 입구를 찾아서 막아야지.”

간단한 대답과 달리 빅터의 표정은 어두웠다.

이유는 하나.

“한데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장소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말은 문제가 있었다.

“예전에 봉인된 장소가 있었을 거 아니에요. 그레이시 아저씨가 알고 있지 않나요?”

이미 위치를 알고 있는데 못 찾을 것처럼 말하니 앞뒤가 안 맞았다.

“알고 있지만 마계의 입구는 계속 바뀐다. 찾았을 때 바로 막지 못하면 다음은 없는 게지.”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이 또한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장소를 바꾸며 열리는 입구라니.

“마족이 침입할 때마다 위치가 바뀐다는 거네요?”

“그래. 놈들이 인간계로 들어오고 몇 시간 뒤에 사라진다.”

인마대전이 길었던 이유는 단지 마족의 강함 때문만이 아니었다.

침략을 막을 방법이 너무 난해했던 탓이다.

새로 생긴 입구를 찾는 것도 힘든 일일 텐데, 몰려나오는 마족을 말살해야 입구를 봉인할 수 있다니…….

실로 다양한 운과 실력이 어우러져야 가능한 일인 듯싶었다.

“이 전쟁이 빨리 끝나지 않으면 모두가 공멸하겠구나.”

빅터는 마른세수를 하며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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