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돌아본 바스코는 망설임 없이 칼을 휘둘렀다.
강화 인간의 생김새 때문에?
아니다.
놈의 얼굴이 어떻게 변했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감히 나를 공격해?”
이유는 이것으로 충분했으니까.
아군인지 아닌지는 문제조차 되지 않았다.
덤비면 죽인다.
살아남으려면 자신보다 강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붉은 눈의 강화 인간은 그렇지 못했고, 약자의 만용은 비참한 죽음으로 끝이 났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이었을 뿐.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상황은 계속해서 악화되고 있었다.
“이것들이 미쳤나.”
달려드는 놈들을 베어 내며 바스코는 조금씩 뒷걸음질을 쳤다.
몇 명이면 모를까, 죄다 죽이는 건 다른 문제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좀 해 보지? 이대로 놔두면 안 될 것 같은데!”
난감해진 바스코는 사마르를 향해 소리쳤다.
몰려드는 놈들을 상대로 회피만 하는 것은 위험을 자초하는 일. 더 이상 대답이 없다면 결국 몰살시켜야 할 판이었다.
“이게 왜…….”
하지만 사마르는 혼란스러워했고.
“쯧.”
바스코는 쓰게 혀를 차며 핏방울을 뿜어냈다.
짙은 혈향을 풍기며 퍼져 가는 적색의 안개.
두 자루의 장검을 손에 든 바스코는 녹아들 듯 모습을 감추었다.
크아아아아악!
단말마의 괴성이 귀를 찢는다.
강화 인간에 달라붙은 붉은 안개들은 흡혈귀처럼 생기를 빨아들였다.
마른 생선처럼 찌그러져 가는 괴이한 모습.
비척거리는 놈들 사이로 바스코의 검이 번뜩이며 지나갔다.
데구르르…….
살가죽만 앙상한 머리가 바닥을 구르고.
“사마르 님 이쪽입니다!”
정신을 차린 흑마법사들은 넋이 나간 사마르를 잡아끌며 유적지를 빠져나갔다.
* * *
모하비 성의 구조는 다른 곳과 달리 높지 않고 넓었다.
그 대신 이곳의 성벽은 깊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계곡을 만들어 놨네.”
낮은 성벽 아래로 까마득한 해자를 파 놓았다는 것이다.
떨어져 죽는 건 둘째 치고, 올라올 방법이 없어 보인다.
물론 나에겐 통하지 않겠지만.
빅터와 함께 오른 암벽만 해도 산 하나는 거뜬히 넘을 높이일 것이다.
어쨌거나.
저리 깊은 해자를 지나 외성문을 뚫고 지나가면, 내성에 이를 때까지 두 개의 성문을 더 공략해야 한다.
이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겠나.
성이 크다는 건, 그만큼 수용할 수 있는 병력이 많다는 것이다.
“그런 것 치고는 저항이 약하지 않아? 잘하면 공성 마법으로 이길 것 같은데.”
하지만 이곳엔 뭔가 문제가 있어 보였다.
예상보다 약하다고 해야 하나.
이제껏 경험했던 사라센과는 전혀 다른 군대였다.
“보호 마법이 어수선하네요. 강해졌다 약해졌다 하고……. 집중하지 못하는 걸 보면 내부에 일이 생긴 것 같은데요?”
“분란 같은 건가.”
“글쎄요? 뭐가 됐건 정상은 아닌 것 같네요. 여기만 지나면 수도의 앞마당인데 병력이 이렇게 약할 리가 없잖아요.”
미심쩍어 하는 테오의 말마따나 모하비 성의 대응은 이상했다.
병력이 없거나, 내부의 문제가 있거나.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눈앞의 보호막은 위태로워 보였다.
“저러다 진짜 뚫리겠는데?”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나는 본진으로 시선을 돌렸다.
촉이 온 것이다.
이제 곧 진격 명령이 떨어질 것 같다는 느낌이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부서진다아아아아아아아!”
감탄하는 술의 목소리와 함께 한 줄기 마법이 본진 위로 올라갔다.
예상했던 진격의 신호.
대기 중이던 나의 부대는 성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우리 부대의 목표인 남문을 향해서.
“수상한데.”
“함정 아니야?”
너무 쉽게 풀리는 상황에 오히려 의심만 늘어갔다.
그사이 쏟아진 아군의 마법은 적의 성벽을 허물었고, 남쪽 다리를 건넌 나는 성문을 향해 해머를 휘둘렀다.
폭발하며 날아가는 거대한 적갈색의 성문.
안으로 진입하려던 나는 본능적으로 군대를 멈춰 세웠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이걸 함정이라고 보기도 그렇고…….
마법을 피해 숨어 있던 적군들은 이미 누군가와 전투 중이었다.
심지어 상대는 같은 갑옷을 입고 있었으니.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진격을 멈춘 나와 반투족은 내분이 일어난 적진을 향해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싸우는 대상이 명확하게 나뉜 탓이었다.
전장은 소수와 다수로 나뉘어 있었고, 싸움은 일방적인 학살로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가 아는 상식을 무시하는 광경.
적은 수의 인간들이 몇 배나 많은 병사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이유는 바로 이것.
“저놈들 강화 인간 아닌가?”
마귀처럼 날뛰는 놈들은 탁한 기운을 뿜어내며 살육을 자행하고 있었다.
한데 생김새가 낯설다.
내가 아는 강화 인간은 그저 무감정한 표정과 흐릿한 눈빛이 전부였다.
그게 전부였는데.
“왜 마인들처럼 변해 버린 거지?”
이놈들은 붉은 눈에 검은 핏줄이 올라와 있었다.
옹달샘 마을에 봤던 그놈들처럼 말이다.
거기에 무기까지 휘둘러 대니 전장은 도살장을 방불케 했다.
그 와중에 한 놈이 우리를 향했고.
크와아아악!
벌게진 눈을 뒤집으며 나에게 달려들었다.
거대한 대검을 휘두르는 녀석.
당황의 시간을 끝낸 나의 해머는 놈의 대검을 쳐 내며 날려 버렸다.
그리고 전진.
뒤엉켜 싸우는 적군의 뒤를 느긋하게 해치우며 나갔다.
뭔가 희한한 상황이지만.
“어쨌건 잘됐네.”
지들이 알아서 싸우며 수고를 덜어 주고 있었다.
어차피 다 정리해야 할 놈들이 아닌가. 뭉쳐 있는 놈들을 향해 천벌을 시전했다.
콰아아아앙!
지축을 흔들며 떨어지는 금빛 해머.
넓지 않은 범위임에도 효과는 엄청났다.
전장 자체가 오밀조밀한 탓이었다.
눈 덮인 설원에 발자국을 찍듯, 천벌은 무자비하게 적들의 흔적을 지워 냈다.
앞에 있는 적을 해치우며, 동시에 먼 곳에 있는 적을 말살했다.
“굉장하군.”
이곳저곳에 작렬하는 스킬을 보며 부족장은 혀를 내둘렀다.
왜 아니겠나.
원기가 생긴 이후로 나는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고 있다.
게다나 성장 가속은 이미 600%를 넘어섰으니 다음 스킬 제작도 멀지 않은 얘기다.
숙련도는 지금도 가파르게 오르고 있으니까.
정신없이 싸우는 놈들의 머리 위로 금빛 해머가 쉴 틈 없이 쏟아져 내렸다.
이렇게 쉽게 정리될 줄이야.
피아 구분을 못하는 강화 인간 따위는 예전 화전민 마을의 고블린과 다를 바 없었다.
“남쪽 외성 장악했습니다!”
어느새 목표 지점은 우리 손에 넘어왔고, 이제 내성을 향해 진격할 차례였다.
“뻥 뚫렸군.”
“시원하게 무너져 있네.”
공성 마법에 직격당한 내성벽은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 별과 나는 무너진 성벽을 넘어 첫 번째 내성 문을 지났다.
이곳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마인으로 변한 강화 인간들은 자신의 아군을 학살하며 광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여긴 더 심한데.”
첫 번째 내성벽 너머엔 일반 병사의 모습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보이는 건 미쳐 날뛰는 마인들 뿐.
“이쪽을 맡아 줘.”
별에게 자리를 부탁한 나는 반대편으로 달려갔다.
이 상태라면 아군의 피해도 심각해질 터. 상대적으로 약한 곳을 향해 전력으로 내달렸다.
놈들의 시선을 나에게 모으는 것이다.
크아아아아아!
그렇게 놈들은 몰려들었고.
콰아아아앙!
광역 강타가 작렬했다.
사방으로 비산하는 육편 조각들.
비 오듯 쏟아지는 피와 살을 지나, 또 다른 놈들을 향해 금빛 해머를 내질렀다.
폭발하고.
내리 꽂힌다.
다가올 틈조차 허락지 않는 나의 폭력은 일대를 초토화시키며 더욱 거세졌다.
그렇게 달려간 나는 하나 남은 내성문을 마저 박살 냈다.
이윽고 드러나는 마지막 관문.
“하… 염병.”
그 앞에 선 나는 헛숨을 들이키며 중얼거렸다.
새빨간 눈의 마법사들이 한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심지어 놈들은 시전 준비까지 마친 상태.
“젠장!”
날아오는 마법을 향해 원기가 실린 해머를 휘둘렀다.
어떻게든 될 거라는 생각으로.
퍼어엉!
다짜고짜 휘두른 나의 해머는 놈들이 쏴 댄 마법을 정면에서 튕겨 냈다.
클레어의 말처럼 말이다.
해머가 때려 낸 마법은 벽에 부딪친 공처럼 아무렇게나 날아가 터졌다.
어느 것은 허공으로 향했고.
또 다른 것들은 놈들에게 날아갔다.
되돌아간 마법은 저들의 발끝에서 구현되었다.
치솟는 불꽃이 놈들의 시선을 가리는 순간.
“천벌.”
낮은 목소리로 스킬 이름을 외웠다.
목적지는 녀석들의 한가운데.
허공에 떠오른 금빛 해머는 한 점을 향해 묵직하게 내려 꼽혔다.
콰드드드득―
거기에 한 번 더.
콰아아아아앙!
그리고 또다시.
가을바람에 날아가는 나뭇잎처럼, 밀집 지역을 공격당한 놈들의 대다수는 애먼 불꽃에 휘말려 타들어 갔다.
두려움을 모른다는 것.
눈앞의 적에게만 집중한다는 건 양날의 검과 같았다.
약자에겐 끝없는 공포일지 몰라도.
“미련하네.”
나에겐 통하지 않았다.
인간의 최대 무기인 생각을 포기했으니까.
어느새 다가온 테오의 실드가 나의 머리 위를 지켜 주었고, 마주 오는 마법은 해머에 튕겨 나갔다.
같은 결과의 반복.
이 끔찍한 자살 공격을 끝낸 건 놈들의 뒤로 이동한 클레어의 마법이었다.
점멸하듯 자리를 바꾸며.
무아지경에 빠진 놈들을 하나씩 무력화시켰다.
사살 대상은 제한적이지만 빠르고 확실하게.
마치 암살자의 움직임을 보듯, 클레어는 유려한 흐름으로 적의 후위를 무너뜨렸다.
때를 맞춰 빅터의 부대가 등장했고, 내성 외부의 병력은 완벽하게 정리됐다.
이제 남은 것은 성 내부와 북쪽 및 동쪽 외성을 정리하는 것뿐.
“제가 성내를 정리하겠습니다.”
마지막에 도착한 루드겐이 잔당토벌을 자청했다.
마지막에 숟가락을 얹겠다?
그 속내가 훤히 보여 실소가 나왔다. 남아 있을지 모를 영주와 지휘관을 잡아 공을 세운다.
쥐새끼 같은 놈에게 어울리는 발상이다.
“저는 북측 외성으로 이동하겠습니다.”
모멸적인 시선을 남긴 나는 뒤돌아 새로운 목적지로 향했다.
* * *
[인과율의 기울기.]
인간계 100%
인과율의 추가 기울어 신들의 맹약이 집행됩니다.
“드디어…….”
갑자기 떠오른 시스템 문자를 보며 로이드, 아니, 카론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 날이 오기까지 무려 30년의 세월.
로이드로 살아온 세월을 지우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때가 눈앞에 다가온 것이다.
작고 소박한 가족의 가장이었던 카론으로.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영문을 모르는 감색 로브의 사내는 눈을 키우며 카론에게 물었다.
“다음 단계로 가야 할 때가 온 것 같구나.”
“다음 단계라시면…….”
“금역을 찾아 나서야지.”
그에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궁금한 건 마찬가지. 이제껏 카론의 뒤를 따르긴 했지만, 궁극의 목표는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금역이라면 봉인된 마계의 입구를 말하는 것이 아니던가.
“혹시 말씀하시는 금역이 제가 아는 그곳과 같은 것입니까?”
“그럴 것 같구나.”
“하면, 무슨 연유로 그곳을 가시려는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기 위함이다.”
아리송한 카론의 대답에 사내는 입술을 곱씹었다.
그를 믿고 따르는 마음이야 변치 않겠지만.
“설마… 마계가 다시 열린다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요?”
이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
“열릴 것이다.”
“네에?”
태연히 답하는 카론에게 사내는 얼빠진 소리로 답하고 말았다.
그의 좁은 생각으론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탓이었다.
왜 저렇게 즐거워하는 건지.
혼돈의 세상을 목전에 둔 카론은 만족에 가득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