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원하는 내용을 떠올리세요.]
시스템 문자를 본 나의 머리는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지정한 장소에 떨어지는 광역 강타.
스킬 제작은 순조롭게 이어져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원하는 스킬의 형태를 떠올리세요.]
이 순간을 기다렸다.
원거리 마법의 백미라면 시선을 자극하는 화려한 모양 아니겠나.
‘원기로 이뤄진 거대한 해머.’
나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금빛 해머를 상상하며 결과를 기다렸다.
이 또한 무난하게 통과.
이제 스킬 제작은 마지막 단계인 결과물 확인으로 넘어갔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가고.
[천벌.]
완성된 원거리 스킬은 웅장한 이름과 함께 정체를 드러냈다.
천벌이라니.
도대체 얼마나 강하기에 저런 엄청난 명칭을 적용한 걸까.
기대에 가득 찬 나의 시선은 이어진 설명문에 고정됐다.
[천벌 : 레벨 1.]
원기로 이뤄진 충격파.
레벨에 따라 해머의 개수 증가.
이렇게만 봐선 알 도리가 없지.
우뚝 솟은 바위를 보며 스킬을 발동했다.
하지만 무반응.
[명령어, 또는 시동 행위가 필요합니다.]
새로 만들어진 스킬은 생각만으로 발동되진 않았다.
정체성은 지키자 이거지.
설명을 확인한 나는 다시 한번 스킬을 발동했다.
목소리를 낮게 내리깔며.
“천벌.”
손에 든 해머를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목표물 위로 떠오른 금빛 형상.
콰르르르르르릉!
원기로 이뤄진 투명한 해머는 지축을 울리며 내리 꽂혔다.
그야말로 장관.
“지렸다…….”
곁을 지키던 겨울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 또한 마찬가지.
아니, 함께 있던 사람들 모두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 멋있으니까.
밤하늘을 밝히는 화려한 모습에 너나 할 것 없이 넋을 잃었다.
결과는 말해 뭐 하겠나.
해머에 찍힌 바위는 가루가 되어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폭발하는 광역 강타와 달리, 천벌은 직진하는 힘이 주력인 기술이었다.
진흙 바닥을 내리찍는 기둥 같다고나 할까.
‘저런 해머가 더 생긴다고?’
구현된 새로운 절기를 바라보며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 떨어진 해머의 직경은 대략 세 걸음 남짓.
10m에 이르는 광역 강타에 비하면 턱도 없을 만큼 좁은 범위였다.
하지만 개수가 늘어난다면?
저런 공격이 숫자를 늘려 떨어져 내린다면?
“마침 다 모여 계셨네요.”
두근대는 나의 상상은 등 뒤에서 울리는 목소리로 인해 멈춰야 했다.
커다란 짐을 지고 온 세 명의 남자들.
“부탁하신 작업이 완성되어 왔습니다.”
남자들이 이고 온 물건들은 다름 아닌 방어구였다.
“아, 무슈슈 비늘갑옷?! 이제야 완성되었군요!”
“네. 진지도 계속 옮기는 데다, 병사들 방어구 수선을 겸하다 보니 예정보다 늦어졌습니다. 어디에 놓을까요.”
“여기 막사 안에 놔 주세요.”
방어구 장인들은 들고 온 방어구를 나의 막사로 옮겼다.
“이거 재질이 기가 막히더군요. 가볍고 얇은데, 강도가 어마어마합니다.”
“그 정도인가요? 좋은 소재라는 건 대충 알고 있긴 했는데.”
“좋은 소재 정도가 아니죠. 어지간한 판금 갑옷은 비교조차 못할 겁니다.”
장인들은 방어구를 바라보며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하기야 산샤크의 수호신이 키우던 신수라고 하지 않았나.
신의 축복을 받은 무슈슈의 비늘은 날붙이로 베어 낼 수 없다고 했다.
물론 상대에 따라 다르겠지만 말이다.
어쨌건 판금 갑옷보단 낫다는 얘기니 희소식이라 할 수 있었다.
“다행스러운 소식이네요.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공성도 무탈하시길 바랍니다.”
인사를 마친 장인들은 성큼 걸어 막사를 빠져나갔다.
남아 있는 건 나와 반투족, 그리고 겨울과 테오.
인원수와 비례하는 고급스러운 방어구가 막사 안을 채우고 있었다.
“이걸 무슨 색이라고 해야 하지? 회색? 검은색?”
“그러면 검회색 아니에요? 쥐색인가?”
“그냥 검은색과 회색인데.”
전부 다 맞다.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달라지고 있으니까.
무슈슈의 비늘로 만든 갑옷은 회색이기도 하고 검은색이기도 했다.
“색이 무슨 상관이야. 튼튼하면 됐지.”
나는 새로 맞춘 갑옷을 들어 하나씩 착장을 시작했다.
일단 가볍다.
굴담비 가죽에 비한다면, 이것은 그냥 종이옷 같은 느낌이다.
“엄청 가벼운데?”
“그러네요. 정말 가벼워요.”
왜소한 겨울이 가볍다고 할 정도니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지 싶다.
“이건 정말 특이한 느낌이군요. 마법사가 비늘 갑옷이라니.”
가볍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게다가 무슈슈의 비늘은 충분히 여유가 있었고, 남은 물량으로 겨울과 테오의 흉갑도 함께 제작했다.
흉갑이라고 하긴 좀 그렇고.
그냥 긴 조끼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아무튼.
“다들 멋있네.”
착장을 완료한 녀석들의 모습은 든든하고 강해 보였다.
정예 중에도 최정예 같은 느낌 있잖나.
특히나 반투족은 멧돼지의 색상과 어울려 더욱 강인해 보였다.
“술 아저씨는 진짜 용됐네요. 앞전 갑옷은 깡통 로봇 같았는데.”
모르는 말이 나왔지만, 무슨 뜻인지는 알 것 같다.
술을 바라보는 겨울의 표정이 모든 걸 다 말해 주고 있으니까.
방어구 하나로 녀석의 모습은 극적으로 뒤바뀌었다.
그게 어디 술에게만 한정된 얘기였을까. 부족장과 별 역시 특별하게 변한 건 매한가지였다.
이제야 뭔가 완벽해진 느낌.
시끌시끌한 소란은 밤늦도록 이어지고 있었다.
* * *
“바스코는?”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군. 마법사들은 다들 모여 있나.”
“네. 대기 중입니다.”
보고를 접한 사마르는 유적의 한 구석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이제 사용 가능해진 것입니까?”
“그래, 마력이 다 회복됐다.”
사마르는 에르텔이 담긴 상자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이것을 꺼낸 게 몇 개월 만이던가.
바스코를 소환한 이후 사용을 위해 손을 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로이드님 없이 가능할까요?”
“그 영감이 잘하긴 하지만, 이 상황에서 어찌 부르겠나. 결과가 어찌 되든 우리끼리 해낼 수밖에 없다.”
상자를 개봉한 사마르는 에르텔을 꺼내 작은 제단 위에 올려놨다.
그러고는 넓은 공터를 누비며 둥그런 마법진을 그렸다.
필요한 인원은 12명.
다행스럽게도 의식에 필요한 흑마법사들은 모두 건재했다. 마법의 특성상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각자의 자리로 이동해라.”
사마르의 지시에 따라 흑마법사들은 마법진 곳곳으로 향했다.
이제 남은 자리는 단 한 곳.
중앙에 있는 작은 원으로 에르텔을 든 사마르가 천천히 걸어갔다.
“현자의 기억에 따라 엘라흐의 권능을 청하노니, 이는 태초로부터 이어진 맹약이요, 인세의 권리로다…….”
의식의 단계가 깊어지며 마법진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12명의 마력이 중앙으로 몰려들었고, 에르텔의 마력과 함께 이글거리며 끓어올랐다.
소환을 위한 주문이 절정을 향하며 유적지 내부는 공명하는 소리로 진동했다.
마침내 열리기 시작한 검은 공간.
게이트라고 불리는 이계의 문은 칠흑 같은 입을 벌려 다른 차원을 연결했다.
입구를 감싼 마력의 피막이 출렁거렸고, 벌어진 틈 사이로 낮선 복장의 사람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 사마르의 시선은, 그들이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시스템 문자.
[인과율의 기울기.]
인간계 99.9%
100%에 이를 경우 신들의 맹약이 집행됩니다.
이제껏 보지 못했던 생소한 내용의 문자였다.
‘인과율의 기울기라니?’
이름부터가 불길한, 정체 모를 이것은 마지막을 앞둔 상태로 정체를 드러냈다.
이 낮선 내용은 뭐란 말인가.
로이드와 함께 치른 의식이 수십 번이거늘. 그동안 사마르는 한 번도 이런 문자를 본 적이 없었다.
‘설마, 의식의 집행자만 볼 수 있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이제 와서 보일 이유가 없잖은가.
그 외에 의심스런 정황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지?”
“이봐요.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저희에게 이 상황을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두리번거리는 이세계인을 보며 사마르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 지경이 되도록 몰랐다는 건, 일부러 감춰 왔다는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신들의 맹약이 무엇이기에 로이드는 이 사실을 감춘 걸까.
떠올릴 수 있는 모든 가설을 대입해 봐도 금발 노인네의 생각을 읽어 낼 수가 없었다.
“사마르 님?”
“…….”
“사마르 님? 의식을 마무리하셔야 하는데요?”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사마르는 날카로워진 시선을 돌려 마법진 가운데를 바라보았다.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남녀의 무리.
“의식을 마무리하지.”
생각을 갈무리한 사마르는 더 이상 반응 없는 게이트를 닫기 위해 마력을 뽑아냈다.
하나 그 순간.
“사마르 님! 한 사람 더 넘어옵니다!”
물결치는 마력 피막 사이로 중년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마르의 눈앞에는.
[인과율의 기울기.]
인간계 100%.
인과율의 추가 기울어 신들의 맹약이 집행됩니다.
내용이 변한 시스템 문자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하지만 사마르는 이내 고개를 돌려야 했다.
“어, 이게 왜 저절로?!”
“사마르 님! 게이트가 이상합니다!”
“뭐야, 이거 왜 이래?”
마무리하지 않은 마법진이 스스로 소멸을 시작한 탓이었다.
이 또한 처음 보는 광경.
연이어 펼쳐지는 낮선 모습에 사마르와 흑마법사들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갈피를 못 잡고 헤매는 사이 마법진과 게이트는 자취를 감췄다.
“저희가 실수한 겁니까?”
“의식이 잘못된 건가요?”
모여든 흑마법사들은 애먼 사마르를 붙잡고 질문을 퍼부었다.
하나 그들이 원하는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들려온 건 칼칼한 남자의 목소리뿐.
“마석을 찾아왔다. 강화 인간인지 뭔지 후딱 해치우자고.”
매복지를 다녀온 바스코는 피 묻은 마석들을 한 움큼 꺼내 들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했고.
“뭐야. 표정들이 다들 왜 그래?”
여전히 멍한 마법사들은 사마르와 바스코를 번갈아 볼 뿐이었다.
어떤 명령이든 해 달라는 말일 터.
걸어오던 바스코는 눈살을 찌푸리며 사마르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시비 걸듯 입을 열었다.
“분위기가 왜 이런지 묻고 있잖아. 내 말 안 들려? 이 몸이 질문하면 대답부터 해야 할 것 아냐.”
역시나 돌아온 대답은 영문 모를 침묵과 긴장감뿐.
“하, 지금 뭐 하자는…….”
“쉿.”
투덜대는 바스코의 말을 막으며 사마르는 희미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르렁거리며 들려오는 작은 소리.
“이게 무슨 소리지?”
들릴 듯 말 듯한 이 소리는, 숨넘어가기 직전의 호흡처럼 헐떡거리며 이어졌다.
그사이 소리는 더욱 커져 이제는 확연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저쪽에서 나는 것 같은데.”
뒤늦게 눈치챈 바스코는 강화 인간들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이것들 왜 이러지? 이놈들 뭔가 이상한데? 눈깔이 맛이 갔어.”
가까이 다가간 바스코는 고개 숙인 강화 인간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완전히 풀려 버린 동공.
자아를 잃었다는 건 알고 있으나, 지금은 그 이상이었다.
시체 같은 상태랄까.
“눈알이 전부 새빨갛잖아. 와서 좀 봐봐.”
얼굴을 구긴 바스코는 고개를 돌려 사마르에게 말했다.
그러나 사마르는 얼어붙어 버렸고.
크르르르르르…….
바스코의 등 뒤로 짐승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