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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99개-165화 (165/203)

165화

패잔병 수색을 마친 나는 제나르 성으로 돌아왔다.

깔끔하게 마무리되지 않아 찝찝하기는 했지만,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주고 돌아왔으니 후방 침략에 대한 염려는 한숨 돌렸다고 볼 수 있었다.

브라함의 다음 목적지는 모하비.

이곳을 점령하면 알함브라가 나오고, 그 다음은 사라센의 수도인 엘 하즈라가 나온다.

전쟁의 승패가 상대의 왕조를 끝내는 것이라면, 목표는 이제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놓여 있다.

“작전은 제나르와 동일하게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효과는 이미 증명되었으니까요.”

“그 작전은 이미 노출되었으니 다른 쪽으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선 공성 마법으로 부딪혀 보고 다음 단계를 논하도록 하지요.”

“그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시작은 동일하되 뚫을 수 없는 상황을 가정한 것입니다.”

작전 회의에 참여한 켄드릭은 성가신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게 도대체 몇 번째인지.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루드겐의 태도는 반대를 위한 반대가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선은 집중할 수 있는 내용만 다룹시다. 작전이 많아지면 공연히 헛갈리고…….”

“사람들을 돌대가리 취급을 하시네.”

결국 참지 못한 나는 루드겐을 향해 쓴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어지간해야 들어 주지.

“무슨 대단한 작전이라고 헛갈리네 마네……. 이게 그렇게 어려운 얘깁니까? 공성 마법에 실패하면 본대 사정거리 바깥으로 철수한다. 그리고 보호 마법의 지원과 함께 빅터 크로제와 이반이 공격에 나선다.”

이런 대비책조차 숙지하지 못할 대가리면 지휘관 노릇은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 건가.

“아니, 이딴 게 어려우면 나가서 보초나 서야지 왜 여기에 있습니까. 그리고 노출된 작전? 적이 보호 마법 쓸 거 몰라서 우린 공성 마법 날리나요? 실없는 소리나 할 거면 그냥 앉아 계세요. 시간 아까우니까.”

“지금 그걸 말이라고!”

“그럼 당신이 나가든가.”

“큭…….”

“여기서 주둥이 털지 말고 당신이 나가서 점령시키면 되잖아.”

나는 서슬 파란 눈을 치켜뜨며 루드겐을 노려보았다.

진짜 후려치기 일보 직전인 상황.

“매전장마다 가장 늦게 출전하는 주제에 다른 사람 견제는 더럽게 꼼꼼히 하시네요. 당신 밥그릇 뺏을 생각 없으니 적당이 합시다. 보기 추하니까.”

차라리 덤비라는 심정으로 가차 없이 내뱉었다.

굳게 다문 루드겐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회의실의 분위기는 얼음장처럼 냉랭해졌다.

“흠, 틀린 말은 아니지만, 너무 거칠구려. 어차피 같은 목적을 향해 가고 있으니 이런 일로 얼굴 붉히지 맙시다, 이반 공.”

결국 지켜보던 스벤 총사령관이 입을 열었다.

하나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스벤은 은근슬쩍 루드겐을 챙기며 나를 책망했다.

“아니죠. 어딜 목숨 걸고 싸우는 사람과 밥그릇 챙기는 사람을 같은 목적이라고 하십니까.”

완전히 열려 버린 나의 분노는 스벤을 향해 거침없이 뿜어져 나왔다.

안 그래도 참기 힘든데.

죽이고 싶은 두 놈이 나불거리니 인내심의 한계가 바닥을 드러냈다.

“흥분을 가라앉히는 게 좋겠구나.”

폭주하던 나의 감정은 빅터의 만류로 제자리를 찾아갔다.

“흐음…….”

그에 스벤은 깊은 침음을 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루드겐을 바라보며 쓰게 혀를 찼다.

고스란히 전해지는 불편한 심정.

본전도 못 찾은 오른팔의 행동에 스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전투는 3일 뒤 아침. 작전은 제나르 공성과 동일하게 가겠소.”

작전을 결정한 스벤은 언짢은 표정으로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렇게 회의는 종료되었고, 나는 가장 먼저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 * *

“죄송합니다.”

“죄송한 걸 아는 인간이 그런 짓을 하나?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시비를 걸어도 사리 분간은 해야 할 것 아니야!”

“면목 없습니다.”

“꼴 보기 싫으니 당장 나가게!”

분노한 스벤의 고함에 루드겐은 쫓겨나듯 회의실을 벗어났다.

이 나이에 이게 무슨 망신인 건지.

머릿속 가득한 무안함과 수치심이 원망할 대상을 찾아 날뛰고 있었다.

그런 그가 찾아낸 화살 받이는 이반.

리베의 철광산부터 시작해 여러모로 계속 얽혀 들고 있었다.

마치 작정하고 노리는 것처럼 말이다.

새파랗게 젊은 아리안의 귀족 놈은 사사건건 부딪치며 루드겐을 바보로 만들고 있었다.

‘건방진 놈.’

복도를 걷는 루드겐의 눈은 연병장으로 향하는 이반의 모습을 쫓았다.

갑자기 나타난 돌부리 같은 놈.

이제야 권력의 중심으로 향하나 싶었는데, 생전 처음 보는 녀석이 나타나 공적을 독차지 하고 있었다.

이래서야 다가올 논공행상에 걸림돌이 될 건 빤한 일.

‘열심히 날뛰어라.’

결과를 차지하는 건 이 몸이니까.

멀어지는 이반을 보며 루드겐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 * *

서쪽과 동쪽을 잇는 제나르 성은 사라센 남부의 요충지였다.

원활한 보급로 구축을 위한 거점 도시이자, 방어의 핵심이 되는 전략 도시. 따라서 국경의 다른 성처럼 비워 둘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수비 병력이 주둔하는 것은 물론이요, 부서진 성벽을 복구해 수성에 들어가야 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래저래 작은 문제가 겹치다 보니 예정보다 늦어졌습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진군은 내일 하려고 했으니까요.”

브라함 각지에서 모인 영주의 군대가 반파된 제나르 성에 집결했다.

그들을 맞이하는 사람은 빅터와 켄드릭 부관.

“나름 시간을 맞추려 했는데, 이렇게 쉽게 함락시키실 줄은 몰랐습니다. 역시 아케른의 무위는 수준이 다른 듯합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제나르의 영주와 흑마탑주는 어떻게 됐답니까. 여전히 소식이 없는 겁니까?”

“영주는 공성 마법에 사망했고, 퇴각에 성공한 흑마탑주는 아직 연락 두절 상태입니다.”

빅터는 차분하게 영주들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러고는 켄드릭을 향해 가벼운 손짓을 보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오늘 중으로 인수인계를 끝내려면 할 일이 많으실 겁니다.”

“허허, 벌써부터 걱정이구려.”

그에 켄드릭은 영주들을 이끌고 내성으로 이동했다.

“아참, 이곳은 괜찮습니까?”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지…….”

“몬스터요. 요 며칠 전부터 창궐하기 시작했는데 다들 난리랍니다. 영지 외곽은 고블린 때문에 돌아다니기도 힘들 지경이지요.”

“영지뿐입니까? 함부룩은 대수림 몬스터가 들어와 한바탕 소란이 있었다더군요.”

내성으로 향하던 영주들은 호들갑을 떨며 자국의 소식을 전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걸 보면 상황이 좋지 않은가 봅니다?”

“말도 마시오.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와 있긴 하지만, 지금 영지 사정이 좋지 않아요.”

아무렴 전쟁만 할까.

켄드릭은 적당히 걸러 들으며 정색하는 영주들을 바라보았다.

본래 이런 얘기들은 부풀려지기 마련인 탓이다.

“엄살이 아니라 여기저기서 이상 징후가 보이고 있소. 좀 더 지켜봐야 알겠지만, 상황이 나빠진다면 전쟁에 집중하기 힘들지도 모르오.”

그러나 영주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진지했다.

흘려듣기엔 좀 과하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적의 수도가 이제 코앞이니 힘내 봅시다.”

선전을 다짐하는 그들의 얼굴에 착잡한 심경이 묻어 있었다.

어쨌거나 이제 이곳의 수비는 그들에게 이관될 터.

각지에서 모인 후속 부대가 제나르 성에 당도하자, 스벤의 제국군은 이동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 * *

“눈 안 아파요? 그렇게 노려보면 눈에서 피날 것 같은데.”

겨울은 신기한 동물을 보듯 나를 보며 갸우뚱했다.

왜 안 그렇겠나.

벌써 한 시간째 이러고 있으니 무슨 말인들 나올 때가 됐다.

“아직도 이러고 있군.”

“저렇게 째려보면 마법이 나가는 건가?”

“그럴 리 없죠.”

“한데 왜 저러고 있는 건가.”

“글쎄요.”

“왠지 무섭군.”

“왜요?”

“맛이 간 애들 보면 하루 종일 벽보고 중얼거리잖나.”

“아…….”

“젊은 나이에 벌써 저렇게 되다니. 세속인 치곤 쓸 만했는데.”

이렇게 말이다.

겨울을 비롯한 반투족과 테오는 번갈아 가며 나의 주변을 얼쩡거렸다.

평소라면 한소리 했겠지만, 지금은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뭔가 중요한 기로에 선 느낌이랄까.

클레어에게 배운 마법 이론이 깨달음을 앞두고 있었다.

마치 터지기 직전의 재채기처럼.

‘조금만 더!’

나는 먼 곳에 있는 목표를 향해 원기의 선을 만들었다.

원거리 마법의 요령이다.

목표까지 이제 1미터.

“젠장!”

가상의 선을 타고 흐르던 원기는 마지막 한 점을 앞두고 흐트러지며 끊어졌다.

쉽지 않다.

마력과 오러의 가장 큰 차이가 바로 이것이었다.

길게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

오러의 성질은 이렇게 유연하고 섬세한 작업에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원기는 마력의 흉내를 내고 있다.

그래서 미치겠는 거다.

아예 안 되면 포기하겠는데, 될 듯 말 듯 하니 더욱 집착하게 된다.

물론 이런다고 마법이 발동하는 건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노력을 반복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고유 스킬 제작.

[이해도가 매우 부족해 구현시킬 수 없습니다.]

이해도라는 글자가 주는 희망 때문이었다.

모하비에 도착한 당일 밤.

계속된 기본기 훈련으로 둔기 마스터리의 레벨이 9레벨로 올라갔다.

보상으로 주어진 건 신체 능력 25% 증가였고, 누적된 수치는 70%였다.

거기에 또 다른 성장 보상으로 고유 스킬 제작 회수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

나의 선택은 경직 효과였다.

중첩시킬 수 없다고 했지, 안 된다는 말은 없었으니까.

따라서 제작을 진행시켰고, 마지막 확정 단계에서 취소를 선택했다.

[스턴, 레벨 1.]

둔기에 공격당한 대상은 10%의 확률로 1초간 경직됩니다. 레벨이 증가할 때마다 확률 증가.

다 좋은데 확률형 스킬이었기 때문이다.

이 부분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의견이 필요했다.

내 생각이 아닌,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이.

“술, 너와 내가 싸운다고 가정을 해 보자.”

“왜?”

“아니, 그냥 그렇다 치자고.”

“시른데.”

“싫어도 싸워!”

평화를 사랑하는 술과 나는 그렇게 가상의 결투를 벌였다.

“만약 내 공격을 받을 때마다 10%의 확률로 1초간 몸이 경직된다고 치자.”

“기분 더럽겠군.”

“그리고 다른 공격은 너와 내가 멀리 떨어져있는데 갑자기 네 머리 위로 해머가 떨어지는 거야!”

“개 황당하겠군.”

“개? 여기서 개가 왜 나와?”

“겨울이 알려 줬다. 뭔가를 크게 강조할 때 사용한다더군.”

“아… 그래서 결론은?”

“후자가 더 위험할 것 같다.”

부족장과 별의 의견도 확인한 결과, 마법을 응용한 원거리 스킬로 방향을 바꿨다.

나의 손에서 뻗어 나가는 것이 아닌, 먼 지점에서 바로 시작되는 방식으로.

마치 배틀 메이지처럼 말이다.

그러나 결과는 이해도 부족.

불가, 또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도가 관건이었다.

시스템이 원하는 제작 조건은, 개념이 아닌 최소한의 실전 능력이었다.

‘어쨌든 희망은 있다는 얘기잖아.’

하여 눈알이 빠지도록 먼 곳을 노려봤다.

결과는 당연히 실패.

몇 번 더 시도해 보고 안 되면 뒤로 미뤄 두려 했다.

경직 효과 역시 원했던 스킬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어진 시스템 문자에 나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이해도가 부족해 구현시킬 수 없습니다.]

매우 부족에서 부족으로 내용이 바뀐 탓이었다.

이러니 집착이 시작될 수밖에.

이 시점부터 나의 목표는 세 점을 잇는 것뿐이었다.

남은 거리는 고작 1미터.

저것만 이어 주면 나는 대륙 역사상 최초로 마법을 사용하는 기사가 되는 것이다.

이름 하야 마검사!

하지만 남은 1미터의 벽은 너무도 멀고 험했다.

10미터 가까이 보내 놓고는 마지막 고비를 넘기지 못했다.

“쯧, 이게 왜 안 되는 거지.”

계속되는 실패에 나의 얼굴은 짜증으로 가득해져 갔다.

내가 모르는 요령이 있는 건가?

아니면 클레어에게 다시 물어봐야 하나?

여유 있게 시작한 수련은 조급함으로 점철되어 갔다.

한데 그 순간.

“굳이 멀리 보내야 해요?”

지켜보던 겨울은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이해도만 올라가면 된다면서요. 거리를 줄이면 되겠네.”

아주 간단하게 해법을 제시했다.

젠장…….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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