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예정에 없던 패퇴에 사마르의 낯빛이 어두웠다.
성을 빼앗긴 것도 어이없는데 매복마저 역습을 당해 버렸다.
색적 마법에 간파당한 것일까.
아니다.
광범위하게 퍼지는 마력의 파장을 아군이 몰랐을 리 없다.
문제가 있었다면 방심했다는 것.
사실 뒤를 밟혔을 거란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흔적의 조작은 기본이요, 혹시 모를 추격에 대비해 곳곳에 척후를 세워 둔 탓이었다.
그게 오히려 독이 됐다.
적당한 장소를 찾은 사마르는 휴식을 취할 겸, 계곡 양쪽으로 매복을 시켰다.
그리고 자신은 잔여 병력과 함께 계곡 끝에서 휴식을 취했다.
눈먼 적이 뒤를 쫓다 걸려들면 행운인 거고, 그렇지 않다면 적당히 쉬다 퇴각을 이어 갈 요량이었다.
한데 적에게 먼저 당하다니.
갑작스런 적의 공격에 지원하러 갈 틈조차 없었다.
더군다나 최고의 전력인 바스코는 부상을 입어 회복 중이었다.
엎친 데 덮친다고.
7성으로 승급된 인원 또한 안정화에 문제가 생겼다.
제나르 성에서부터 발생한 문제였으니 계속 방치할 수도 없는 상황.
자칫하다간 폭주할 위험마저 도사렸다.
사마르는 눈물을 머금고 퇴각을 결정했다.
이대로 전투를 진행하기엔 전장에 있는 제3의 존재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 빅터 외에 8성급이 하나 더 있었다.
바스코에게 치명상을 입혔던 남자가 추격대에 있었고, 놈의 기운을 느낀 바스코는 사마르에게 위험을 알렸다.
분하지만 선택지가 없었다.
기습을 해 온 적의 수준이 8성급 기사라면, 이미 그곳은 파탄이 났을 게 자명했다.
하여 사마르는 감춰진 유적지로 남은 부대를 이끌었다.
“안정화는 어떻게 되었는가.”
“퇴각 중엔 불안했으나, 지금은 자리 잡아 가고 있습니다.”
경위를 보고하는 흑마법사의 말에 사마르는 유적 한편에 모여 있는 강화 인간들을 바라보았다.
너무 급하게 서두른 걸까.
몇 명의 병사가 7성에 이른 직후, 조금씩 이상한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지금은 상태가 좋아진 것 같지만, 보통의 몸으로 버틸 수 있는 건 7성이 한계인 듯싶었다.
‘본체의 영향이 큰 것인가.’
멀쩡히 버텨 낸 카리프에 비해 다른 이들은 버거워했다.
게다가 놈은 자아도 유지하지 않았던가.
덕분에 카리프는 잠적했고, 이후 녀석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다만 한 가지.
바빌리안의 함락 소식을 들었을 때 묘하게 거슬리는 느낌을 받았다.
‘설마 카리프는 아니겠지.’
막연하게 놈을 떠올렸지만, 이내 생각을 접었다.
멸문한 가문의 아들이 이천의 병력을 어디에서 구했겠는가.
현시점에선 우회한 브라함의 정예라고 보는 것이 가장 합당했다.
그게 아니라면 용병이든가.
그 또한 과한 숫자이기에 결국 상상의 끝은 브라함이었다.
“강화에 대해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야.”
생각에 잠겼던 사마르는 바스코의 질문에 고개를 돌렸다.
“시술을 받는 데 조건이 필요한가?”
“그런 건 따로 없네.”
“그렇다면 나도 가능하겠군.”
바스코의 질문은 뜻밖에도 강화였다.
“시술은 할 수 있는데, 이곳엔 지금 마석이 없다.”
“흠, 널린 게 마석인데?”
사마르의 답을 들은 바스코는 강화 인간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조금 어렵겠군. 다른 곳에서 찾아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다른 곳이라면?”
“끝난 전장을 찾은 게 빠르지 않겠나.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으니 한숨 돌리고 찾아보면 되겠군. 썩거나 사라지는 게 아니니까.”
대답을 마친 사마르는 유적의 출입구로 다가가 환술 결계를 설치했다.
* * *
본래 시끄러운 곳을 꼽으라면 술집과 용병 조합일 것이다.
심지어 작은 사건이라도 생겼다 하면, 벌통을 뒤집어 놓은 듯 순식간에 달아오르곤 한다.
특히나 이곳.
“의뢰 정보가 잘못됐잖아! 이게 어딜 봐서 4성급 의뢰야? 이것 때문에 전멸할 뻔했다고!”
리베의 용병 조합은 요즘 들어 더욱 떠들썩했다.
하루에 한 두 번씩.
매일 비슷한 사건이 생기고 있는 탓이었다.
“정보는 정확해요.”
“정확한데 왜 몬스터의 수준이 5성급이야?!”
“저희도 알아보고 있는 중이니까 기다려 보세요.”
“언제?! 사람들 죄다 송장되고 나서? 조합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하지. 진즉에 알고 있었어야 하잖아!”
몬스터의 정보가 변했기 때문이다.
개체 수도 부쩍 늘어났고, 강함의 수준이 아예 달라졌다.
“당분간 의뢰를 중지하든가 해야겠군요. 이대로 가다간 큰 사고가 이어질 것 같습니다.”
조합장 한스는 실랑이 중인 용병을 보며 듀란에게 말했다.
“그게 좋을 듯합니다. 카잔에선 사망 사고도 몇 차례 발생한 모양입니다.”
“심상치 않은 일이군요.”
그러고는 되돌아온 듀란의 말에 걱정스레 대답했다.
몬스터의 정보가 대량으로 바뀌다니.
수십 년째 이어지는 몬스터의 정보가 신뢰를 잃기 시작했다.
그것이 뜻하는 건 죽음.
새로운 지식이라는 건 목숨을 담보로 축적되기 때문이다.
“몬스터들이 진화하는 걸까요?”
“그럴지도 모르죠. 사람도 계속 발전하는데, 놈들이라고 제자리에 머물진 않을 테니까요.”
질문에 답한 듀란은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사실 원인 모를 이변이 시작된 건 하루 이틀이 아니다.
이미 꽤 오래전부터 조금씩 느껴 왔고, 이제와 수면 위로 떠올랐을 뿐이다.
정확한 이유야 알 수 없지만, 결코 좋은 현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무언가가 연상되었으니까.
“과거에 이런 선례가 있었나요? 저는 처음 접하는 상황이라 도무지 감이 오질 않는군요.”
“흠… 저도 직접 격어 보진 못했지만, 비슷한 경우는 알고 있습니다.”
“비슷하다면…….”
“인마대전이요.”
“네?”
“그 사건의 전조 증상이 지금과 비슷했다고 합니다.”
대륙 최악의 그날과 많은 것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게 무슨…….”
엄청난 듀란의 설명에 한스 조합장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인마대전이라니.
그의 머리로 떠올리기엔 스케일이 너무도 거대했다.
직접 겪어 본 세대는 아니었지만, 그 끔찍한 여파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여기에 새로운 종이 출현한다면 확실해지겠지요. 하지만 그때가 되면 이미 늦었을지도 모릅니다.”
한스 조합장은 그저 마른침만 삼킬 뿐이었다.
새로운 몬스터의 등장.
그것이 주는 파장이 어떨지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만약 거대한 놈이라면?
그에 더해 강하기까지 한다면?
새로운 자료와 대처 방법이 생길 때까지 수많은 목숨이 사라질 것은 불 보듯 훤한 일이었다.
“이걸 어떻게 풀어 가야 할까요.”
“우선 단체장님께 말씀드리고, 조합장님은 용병들의 개인 활동 자제를 공지하세요.”
“그게 되겠습니까? 그들에겐 먹고사는 문제가 달렸는데.”
“그러니 단체장님께 알려야죠. 국가의 지원을 받아서 용병들이 단체로 조사에 착수하는 겁니다.”
“리베에서 용병을 고용하게 하라는 얘기군요.”
“그렇죠. 개인의 의지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흠, 알겠습니다. 제가 게브네 단체장님을 만나 보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한스 조합장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시간을 끈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잖나.
“이럴 때 이반 그 친구가 있다면 큰 도움이 될 텐데… 아쉽네요.”
“전쟁 중이니 어쩔 수 없지요. 모쪼록 빨리 끝나고 돌아오시길 바랄 뿐입니다.”
조합장 한스는 사무실을 나와 의회로 향했다.
* * *
사라센은 대륙 역사의 시작을 함께한 고대 국가다.
최초의 문명이 시작된 곳.
확인되지 않은 유적은 지금도 발굴되고 있으며, 아무 데나 멈춰 땅을 파도 뭔가 하나는 나오는 곳이 사라센이었다.
따라서 인간의 손길이 끊긴 지역이 수두룩하며, 몬스터의 출연 빈도 역시 다른 국가에 비해 활발한 편이다.
대수림과 접경을 이루는 동쪽 지역은 더욱 그러했으니, 퇴각한 적의 흔적을 쫓는 풍 형제와 반투족은 그러한 땅을 지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흔적은 이쪽으로 이어졌는데 못 찾은 건가?”
“안 보인다. 여기서 끊겼다.”
“흐음, 영문을 모르겠군.”
“어라, 다들 여기 계셨군요.”
사방으로 흩어졌던 탐색조들이 한 지점으로 모여든 것이었다.
“분명히 이곳까진 짙은 흔적이 남아 있었는데 여기서 귀신같이 사라졌다.”
“나도 그렇다.”
“그러면 우리 모두 실수를 했다는 건가?”
“그건 아닌 것 같아요. 각자 다른 방향으로 출발했다가 모인 거니 이쪽에 흔적이 집중된 건 맞는 것 같아요.”
의문의 끝을 장식한 건 테오였다.
굳이 반대편으로 걸어간 테오는 은근슬쩍 별의 곁을 서성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무언가 생각난 듯 손바닥을 부딪치며 말을 이었다.
“아참, 이곳으로 오다가 특이한 몬스터를 봤는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냥 지나쳤네요. 여기서 철수할 거라면 가는 길에 다시 한번 확인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특이한 몬스터라고 했나.”
“네. 머리는 염소인데 몸은 사람이었어요.”
“사람의 몸이라고? 그냥 두 발로 선 것이 아니라?”
별은 지하 유적에서 보았던 소머리 몬스터를 떠올렸다.
놈도 이족 보행을 했지만, 두 다리는 완전히 소의 다리었다.
검을 쥐고 있던 손만 발굽이 변형됐을 뿐, 사람의 몸이라기보단 두 발로 선 소라고 보는 것이 바른 표현이었다.
“확실히 사람 몸이었어요.”
하지만 테오가 말하는 것은 확실하게 사람이라고 칭하고 있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크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새로운 몬스터의 출현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크 변종 같은 걸 봤을지도 모른다. 잘 생각해 봐라.”
그에 별은 무감정한 얼굴로 테오의 말에 반문했다.
사람처럼 이족 보행을 하는 몬스터는 이미 많이 존재하는 탓이다.
오크나 오우거 등등.
하지만 그들의 형태는 사람보다는 영장류에 가까웠다.
원숭이나 고릴라처럼 인간의 몸이라 칭하기에는 크게 다른 모습이었다.
손발가락 개수부터가 다르니까.
“발가벗고 있어서 확실하게 봤어요. 완벽한 여자의 몸에 염소의 머리가 달려 있었죠. 처음엔 가면을 쓴 사람인 줄 알았네요.”
그러나 테오의 답은 확고했다.
저 정도로 얘기한다면 정확하게 목격했다는 건데.
“일단 복귀하는 게 좋을 것 같군. 그 염소 머리도 가는 길에 한번 살펴보고.”
* * *
염소 머리 인간의 모습은 아쉽게도 발견할 수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살펴봤으나 특별한 흔적을 찾을 순 없던 것이다.
그렇다고 따로 시간을 낼 순 없는 일.
신종 몬스터의 발견은 우선 순위에서 밀려났다.
“분명히 봤는데… 너무 민망해서 소리까지 질렀거든요.”
“그래서 사라졌나 보군. 그런 건 조용히 훔쳐봤어야지. 쯧.”
술의 핀잔을 끝으로 일행은 이반이 있는 본대로 복귀를 서둘렀다.
그렇게 탐색조의 모습이 멀어진 이후.
바스락.
풀잎 꺾이는 소리와 함께 매끄러운 여인의 나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원색적인 형태.
가늘게 뻗은 여인의 손끝에는 사라센 군복을 입은 병사가 매달려 있었다.
“제발 죽여줘…….”
병사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애원하듯 말했다.
하지만 처절한 그의 부탁은 이뤄지지 않았고.
바스락.
염소의 머리를 가진 여인은 축 늘어진 병사를 질질 끌며 숲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