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이게 다 뭐지? 방송 같은 건가.”
정신이 든 남자는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이어서 젊은 여인이 고개를 들었고.
“여기가 어디죠?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설명을 좀…….”
겁먹은 얼굴로 부탁을 했다.
끝이 아니었다.
차례로 몸을 일으킨 사람들은 저마다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소리를 질러 댔다.
“어, 난 집에 있었는데.”
“꺄악! 누, 누구세요!”
“하, 시발…….”
반응은 늘 그랬듯 다양했다.
두려워하는 사람부터 화를 내는 사람까지.
그렇게 한바탕 소란을 떨고 나면 현실을 자각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체념과 순응이다.
간혹 도발적인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소환자들의 대부분은 이쯤 되면 생각한다.
어떻게 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까.
“쉴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세요.”
하여 그들은 낯선 사람이 내민 손을 조심스레 마주 잡는다.
자신은 안전할 거라고 믿으며.
“특별한 사람은 없는데 소환된 인원이 크게 늘어났습니다.
“그런 것 같구나.”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으셨습니까?”
감색 로브의 사네는 이동하는 소환자들을 보며 넌지시 물었다.
“한 명 있긴 했지.”
“혹시 두 번째 소환된 여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능력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더구나.”
갈색 로브의 사네는 공감하는 표정을 지었다.
로이드가 말하는 여인의 능력은 마력 충전.
그의 생각과 여인의 능력이 일치한다면 상황은 급격하게 달라질지도 모른다.
“마력을 회복시키는 능력 같던데… 에르텔의 마력도 채울 수 있을까요?”
“그걸 알아봐야겠지.”
소환에 사용되는 마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따라서 에르텔에 있는 마력 역시 그만큼 소실되고, 자연 회복까진 몇 개월의 시간을 요구했다.
로이드가 한겨울을 찾았던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
소환의 기회는 자주 찾아오지 않고, 결과는 장담할 수 없는 탓이다.
그러나 겨울의 마법을 사용하면 결과물의 수준이 높아졌다.
대미지 증가 대신 마법의 질을 상승시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탐탁지 않을 경우 리를 죽여 일주일 전으로 회귀했으니, 실로 완벽한 조합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 모든 번잡함을 줄여 줄 도우미가 새롭게 모습을 드러냈다.
‘마력 충전이라.’
이제껏 발목을 잡아 왔던 근본적인 문제가 조금은 가벼워질지 모른다.
[인과율의 기울기.]
인간계 95%
100%에 이를 경우 신들의 맹약이 집행됩니다.
소환을 끝낸 로이드는 떠오르는 메시지를 보며 눈을 빛냈다.
목표까지 이제 한 걸음.
‘이제 머지않았다.’
저 숫자가 가득 차는 날 인마대전이 재림하게 될 것이다.
지구로 갈 수 있는 게이트와 함께.
* * *
골짜기로 향한 적의 기병은 보이지 않았다.
흔적만 요란했을 뿐.
수 갈래로 나눠진 흔적들은 이곳저곳으로 흩어지며 추적에 혼선을 주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정신없이 이어진 흔적들을 보며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러다간 보이는 모든 자국을 쫓아야 할 판이었다.
“매복 부대를 버리다니, 결단과 판단이 굉장히 빠른 놈입니다.”
다른 말로는 냉정한 거고.
“계속 쫓을 겐가, 아니면 본대에 합류할 겐가.”
부관의 말을 듣던 클레어는 나를 바라보며 이후 계획을 물었다.
“계속 쫓아야죠.”
나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추격을 결정했다.
“흠, 상황이 꽤 복잡해 보이는데, 저 흔적들을 다 쫓을 생각인가?”
“아니요. 흩어져선 이놈들을 잡을 수 없을 겁니다.”
막연한 느낌이지만, 나의 예감은 경고하고 있었다.
“무슨 뜻이지?”
“핵심 전력이 아직 안 나왔거든요.”
적장은 물론이고, 안개와 함께 사라진 놈도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머리를 잘라 내야 손발이 나대지 못할 터.
“어설프게 밟아 두면 불씨는 다시 살아나니까요.”
목표를 정한 나는 손짓으로 술을 불렀다.
“구분해 낼 수 있겠어?”
“어떤 걸 말하는 건가.”
“무거운 말굽 자국을 알아보겠냐고.”
“그야 일도 아니지.”
“그럼 그걸 찾자. 거기가 진짜다.”
남은 적 병력에 비해 흔적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발자국을 일부러 늘린 거야. 말을 나눠 타고 빈말은 다른 길로 끌고 간 거지.”
이유를 묻던 술은 나의 대답에 코끝을 훔쳤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갈래 길을 바라봤다.
“그럴듯한 추리군.”
증거로, 모든 갈래 길이 동일한 규모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제껏 추격해 오던 형태 그대로.
분신술을 한 게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나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고.
“흠, 이쪽에 찍힌 자국들이 유독 깊이 패어 있군. 이 길로 간 것 같다.”
술은 굽이도는 길을 가리켰다.
* * *
육천에 이르는 사라센 탈환군은 카리프의 강군에 의해 완벽하게 제압당했다.
절반에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했고, 생존한 인원은 카리프에 투항했다.
육천 명으로 시작한 군대가 이천 명에게 항복한 것이다.
실로 기이한 이 현상은, 카리프를 필두로 한 신인류. 즉, 완벽한 강화 인간이 만들어 낸 기적 같은 업적이었다.
기습도 뭣도 아닌 정면 승부.
삼백에 이르는 신인류들은 이십 배가 넘는 적을 맞아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보여 줬다.
“가시죠. 준비됐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자하르는 들뜬 얼굴로 카리프에게 말했다.
그가 이토록 신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오늘은 포로들의 전향 의사를 확인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분위기는 어떻던가.”
“나쁘진 않은 것 같습니다.”
상황을 묻는 카리프의 말에 자하르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마 대부분 전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신인류 계획에 대해 엄청난 관심을 보였으니까요.”
“다행이군.”
“사라센의 강화 인간 따위를 보다가 신인류를 봤으니 놀랐겠지요. 그사이 설득은 충분히 된 것 같습니다.”
속사정을 말하는 자하르의 얼굴엔 자신감이 가득했다.
바빌리안을 점령한 이후, 자하르는 포로로 잡힌 군인들에게 선택지를 주었다.
포로가 되어 전쟁이 끝나길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제대로 된 강화를 받아 신인류가 될 것인지.
안 하면 죽는다가 아닌, 선택의 자유를 주었다.
자하르의 강화 인간은 자의식이 멀쩡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강제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닐뿐더러 자칫하면 미래의 적을 만들게 될 뿐이었다.
하여 그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전향하시겠습니까? 우리와 함께한다면 당신들은 더욱 강해지고, 당당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 대답을 들으려 왔다.
“정말 우리의 이성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여기 계시는 카리프 님을 비롯해 저희 정예병 모두가 강화를 진행 중인 신인류입니다. 보시다시피 정상적인 사고와 행동을 하고 계시지요.”
흐트러짐 없는 자하르의 대답에 질문을 던진 포로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강해지는 걸 싫어할 군인이 있을까.
강화라는 작업은 성장이 멈춘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나 이성을 잃는다는 것.
그들의 발목을 잡는 건, 전투 인형이 되어 버린 사라센의 전우들이었다.
“흑마탑에서도 처음엔 이상 없다고 말했소. 하지만 강화를 받은 사람들은 변해 갔고, 그들이 변한 것은 기밀 유지를 위한 침묵이라며 변명했소.”
“참으로 조악한 거짓말이군요.”
“그렇소. 소문이 돌아 지원자가 줄어들자, 사마르는 범죄자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소.”
“허허, 참으로 말종 같은 인간이군요. 저도 한때 사마르와 일해 봐서 압니다. 아주 이기적이고 못된 놈이죠. 양심이라는 게 없는 인간입니다.”
포로의 하소연을 들으며 자하르는 고삐를 당기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말로 이들의 마음을 꺾을 완벽한 순간이니까.
“사마르의 강화 인간은 실패작입니다. 여기 계신 카리프 님이 진짜 강화 인간이지요. 놈에게 도망친 저희는 끈질긴 노력 끝에 연구를 완성해 냈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은 이미 그들을 경험했지요.”
잠시 틈을 둔 자하르는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하던 말을 이어 갔다.
“이 사람들이 진짜 강화 인간입니다. 여러분들이 꿈꾸던 부와 명예에 먼저 다가간 전사들이죠.”
그에 포로들의 눈이 이채를 띠기 시작했고.
“다음은 여러분들 차례입니다.”
자하르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 * *
순조롭게 이어지던 추격은 어느 순간 정체되었다.
선명하던 흔적이 옅어지기 시작하더니 물가를 지난 이후로는 아예 사라졌기 때문이다.
“개울을 타고 이동한 것 같군. 흔적을 찾으려면 범위를 크게 넓혀야 할 것 같다.”
하여 풍 형제가 나섰다.
이유는 녀석들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능력 때문이었는데.
“붉은 멧돼지의 후각은 2㎞ 바깥의 냄새도 구분하지. 맞바람이 불어 주면 5㎞ 이상도 가능하다.”
설명을 마친 술은 4조로 나눠 탐색을 시작했다.
남은 인원들은 개울가를 벗어나 탐색조를 기다렸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오냐.”
“원거리 마법 중에 먼 곳에서 시작되는 거 있잖아요. 술자의 몸에서 날아가는 거 말고요.”
“그래, 그런 게 있지.”
“어떤 원리인지 궁금해서요.”
테오에게 돌풍을 넘긴 클레어는 나의 질문에 흔쾌히 대답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말이다.
“마력이나 오러나 몸 안에 힘을 넣어 두고 뽑아 먹는 건 똑같다. 그러난 사용 방법은 다르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고 있느냐?”
막간을 이용한 클레어의 마법 강의는 질문으로 시작됐다.
“흠, 오러는 그 자체를 사용하고, 마력은 마법의 재료로 이용되는 것 아닌가요?”
“그래, 맞다. 오러는 몸에 직접 사용하고, 마법사들의 마력은 다른 현상의 원료로 사용되지.”
으쓱할 것도 없다.
기본적인 문답이니까.
마나를 수련했다면 가장 먼저 배우는 내용이고, 따라서 나는 기초 지식을 확인받은 것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글은 읽을 줄 아냐? 대충 이런 질문을 받은 셈이다.
“마법의 종류를 시전 방식으로 나누면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내 몸에서 출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특정 지점에서 시작되는 것이지. 네 녀석이 궁금해하는 게 후자의 경우다.”
“네, 맞아요.”
나는 맞장구를 치며 클레어의 말에 호응했다.
“보통 이런 경우엔 목표와 나 사이의 거리, 그리고 마법이 시작될 높낮이를 세 점으로 연결한다.”
“세 점으로요?”
“그래. 그렇게 연결된 라인에 마력을 흘려 넣어 발동시키면 해당 위치에서 마법이 시작되지.”
“흠… 그 라인이라는 건 어떻게 만드는 건가요?”
“심상 속 이미지로 만든 가상의 길이다. 빠르게 연상해서 유지하려면 상당한 재능과 훈련이 필요하지. 쉬운 과정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꼬치꼬치 캐물었다.
마치 마법사가 된 듯 말이다.
“왜, 이참에 마법이라도 배울 생각이더냐?”
질문에 답해 주던 클레어는 호기심 가득한 나를 보며 반문했다.
마법 쓰는 기사라…….
할 수 있다면야 당연히 해 보겠지만, 내가 이러는 이유는 그런 거창한 목적이 아니었다.
[둔기 마스터리 레벨 8.]
성장 가속이 생긴 이후로 숙련도의 증가가 무섭도록 빨라진 탓이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스터리 레벨이 오른 뒤에 찾아올 고유 스킬 제작 때문이었다.
‘실제로 구현시킬 수 있다면.’
그야말로 나는 필살기를 얻게 되는 것이다.
시작 지점과 방향을 알 수 없다는 것.
테오와 대련을 통해 피해자의 답답함을 알게 됐다면, 뻐큐와 싸우며 그것이 주는 이점을 체험했다.
그러니 궁금한 것이 많아질 수밖에.
“갑자기 호기심이 생긴 게냐.”
기특한 눈으로 바라보는 클레어의 물음에 나는 질문으로 답을 대신했다.
“제 원기와 마력이 비슷하다고 하셨잖아요.”
“유사한 느낌이지.”
“그래서 그래요.”
뭔가 될 것 같아서 이러는 거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