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다음날 이른 새벽.
개전을 앞둔 브라함의 진지는 동트기 전부터 바쁘게 움직였다.
각 부대의 병사들은 진군을 준비 중이었고, 능선 너머로 해가 떠오를 땐 제나르 성을 마주 보고 있었다.
“그만 좀 움직여라. 정신 사납다.”
수련을 놓지 않는 나를 보며 빅터는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
이게 어디 나 혼자 좋자고 이러는 건가.
“내가 잘돼야 나라가 삽니다.”
나는 아랑곳없이 휘두르는 해머에 힘을 실었다.
그사이 첫 공격이 시작되었고.
콰르르르르릉!
지축을 흔드는 뇌전이 성을 향해 내리꽂혔다.
장관이다.
하늘을 가득 매운 공성 마법은 저래도 되나 싶을 만큼 날아들었다.
그 자체만으로도 웅장하고 살벌하지만.
“저걸 견뎌 내네.”
그러한 공격을 막아 내는 적의 마법은 더욱 대단해 보였다.
저런 걸 24시간 가동시키려면 대체 얼마나 되는 마법사들이 필요한 걸까.
“저거 부셔 보려고 시도한 적 없나요?”
벼락을 튕겨 내는 보호 마법을 보며 빅터에게 질문했다.
“있다.”
“결과는요?”
“실패했다.”
“안 깨지던가요.”
“시간이 오래 걸렸다.”
돌아온 대답은 부관들의 말과 다르지 않았다.
한 방에 어떻게 해 볼 만한 대상이 아니란 얘기였다.
“하긴…….”
이렇게 우르릉 쾅쾅 해 대는 걸 다 막아 내고 있지 않는가.
고위급 마법사 수십 명의 마력이 담겼으니 다른 측면을 봐야 했다.
나뭇가지도 묶어 두면 부러지지 않는 법이니까.
“만약 저하고 둘이서 해 보면요?”
하지만 그것도 상황에 따라 다르지 않겠나.
“흠.”
빅터는 대답 대신 나의 눈을 바라보았다.
* * *
사라센의 북단의 중심지 바빌리안.
제1흑마탑이 있는 곳이자 환락으로 가득 찬 이 도시는 예상치 못한 적으로 인해 점령을 당해 버렸다.
불과 몇 시간 만에.
도시의 주둔군이 자리를 비웠다고는 하나, 남아 있는 수비대는 분명히 존재했다.
한데 결과는 참혹했다.
2천 남짓한 바빌리안의 수비대는 비슷한 규모의 적을 만나 괴멸했다.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허무한 결과였고, 탈환을 위해 출정한 무스크는 심란할 수밖에 없었다.
‘뭐 하는 놈들이지.’
상대의 여력이 파악되지 않기 때문이다.
적의 규모와 전력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건 수많은 선례를 통해 알 수 있는 교훈이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건 사라센의 군부가 아닐까.
그들이야 말로 강화 인간이라는 농축된 전력을 보유하고 있는 까닭이다.
‘강화 인간일 리는 없고…….’
무스크는 본인이 떠올린 생각을 일축하며 도시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예상되는 적의 병력은 2천.
도시에 주둔해 있기엔 인원이 적다.
따라서 성에 들어가 있을 확률이 높지만, 그것이 유불리를 결정짓진 못한다.
바빌리안 성의 구조는 전쟁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성 안에 처박혀 있으면 편할 텐데.’
최소한 매복 병력에게 시달릴 일은 없을 테니까.
척후병을 기다리는 무스크의 얼굴에 불편한 감정이 맴돌았다.
마치 다가올 일을 미리 예견한 것처럼.
본래 어두운 편이던 무스크의 낯빛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그리고 그 순간.
“적 병력 출현!”
영문 모를 무스크의 불안은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추정 병력 2천. 성을 나와 이곳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곳으로?”
“네, 그렇습니다!”
반문하는 무스크에게 병사는 확신에 찬 모습으로 대답했다.
이렇게 되면 둘 중 하나다.
바깥 상황을 아직 눈치채지 못 했던가, 아니면 알고도 나왔다는 것이다.
후자라면 엄청난 자신감의 표현.
누가 와도 이길 수 있다는 명백한 도발이었다.
“전투준비.”
짧은 무스크의 명령에 병사들은 바쁘게 몸을 놀렸다.
머지않아 적의 군대가 모습을 드러냈고.
“마법 부대 공격 준비.”
무스크는 나직하게 선공을 준비했다.
하지만 의미 없는 명령이었다.
“놈들이 돌격해 옵니다!”
“허…….”
공격 대상인 적의 부대는 이미 그곳을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탐색조차 없다니.
모습을 드러낸 정체불명의 적들은 곧바로 전투에 돌입했다.
“이동 경로에 맞춰 공격 마법을 시전하고, 병사들은 전투태세를 갖춰라!”
무스크의 명령과 함께 6,000명의 부대가 대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적의 움직임은 너무도 신속했고.
“적의 최전방에 배틀 메이지 출현!”
놈들은 아군의 마법을 막아 내며 거침없이 진격해 왔다.
왜 이렇게 밀리는 걸까.
심지어 적의 후방에 남은 마법사들은 소수임에도 아군의 마법을 압도하고 있었다.
순간 머리를 스치는 짙은 기시감.
‘강화 인간!’
그제야 무스크는 놈들의 정체가 특별하다는 걸 인식했다.
전신에 두르고 있는 탁한 오러와 강렬함은 분명히 눈에 있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뭔가 다르다.
지능 없는 인간이라 혐오했던 자국의 전투 인형과는 행동 방식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
전술이 있다.
그리고 스스로 움직인다.
“이놈들 정체가 뭐야…….”
상황을 주시하던 무스크는 실성한 사람처럼 혼잣말을 내뱉었다.
이런 괴물을 어떻게 이기라고.
뒤엉킨 적의 병사들은 모두가 탁한 오러를 뿜어내고 있었다.
어림잡아 300명 이상.
갑옷도 제각각인 괴상한 놈들은 순식간에 아군의 대형을 박살 냈다.
첫 격돌에 주력이 소실됐다.
아군의 오러 유저들이 목숨을 잃었고, 마흔 명의 강화 인간 또한 속절없이 쓰러져 갔다.
그 중심에 서 있는 한 남자.
유난히 눈에 띄는 흑색 갑옷의 남자는 믿을 수 없는 무위를 드러내며 대형의 중심을 갈라냈다.
공성 마법을 보는 것 같았다.
휘두르는 칼질 한 번에 지진이 일고 수십의 머리가 허무하게 날아갔다.
질주에 가까운 진군 속도.
적장으로 보이는 흑색 갑옷의 남자는 어어, 하는 사이 본대의 후미를 뚫고 나왔다.
그것도 홀로.
다급하게 방어 대형을 갖춰 보지만 소용없었다.
남자의 검이 내리그어지는 순간, 파도와 같은 탁한 검기가 아군의 몸을 난자했다.
그런대 왜…….
놈의 얼굴이 낯익은 걸까.
신기에 가까운 남자의 무위를 보며 무스크는 기억 속 누군가의 얼굴을 급하게 떠올렸다.
웃는 얼굴로 가문의 땅문서를 맡기던 멸문한 가문의 아이.
“네가 어떻게!”
무스크의 앞에 나타난 이 남자는 자신들이 멸문시켰던 카라얀의 아들 카리프 무스타파였다.
“5성에서 성장이 멈췄을 텐데…….”
서릿발 같은 차가운 시선을 받으며 무스크는 낮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에 대한 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스걱―
반으로 쪼개진 무스크의 머리가 피로 물든 벌판을 구르고 있었다.
* * *
끝없이 이어지는 공방에 보는 것마저 지칠 지경이다.
멋지고 화려한 것도 한두 번이지. 무의미한 소모전에 의문만 늘어나고 있었다.
하여 빅터는 아침에 말한 나의 제안을 수용했다.
“우리 마법사 인원으론 공격과 보호막을 나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회의에 참석한 지휘관들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빅터 공과 이반 공이 직접 타격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 분을 지키기 위해 보호막을 따로 만들어야 할 테니, 필연적으로 공성 마법이 약해지겠지요. 놈들은 즉시 교대 조를 투입시켜 우리의 본대와 두 분께 공격을 할 것입니다.”
특히나 루드겐 마이어의 반대는 집요하게 이어졌다.
“그렇게 되면 공격의 주도권을 내주게 되고, 우리는 계속해서 보호 마법만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공성 마법은 빠른 전환이 쉽지 않으니까요. 주도권이 한 번 넘어가면 되돌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회의의 방향은 루드겐의 생각으로 기울고 있었다.
듣다 못한 나는 결국 짜증스런 표정으로 손을 들었다.
루드겐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발상이 너무 단조로운 거 아닙니까?”
하나의 흐름만 생각하는 그들의 모습이 상당히 거슬렸다.
무엇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 무엇이란 걸 해결하면 되는 것 아닌가.
“전방에 있는 본대를 1/3만 남기고 철수시키세요.”
“그게 무슨 말이요? 본대를 빼면 공성은 어쩌려는 게요?”
“그대로 놔둬서 뭐에 씁니까?”
“뭐에 쓰다니요. 성벽이 뚫리길 기다렸다 점령하는 것 아닙니까. 공성이라는 게 한두 사람 잘났다고 승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루드겐은 일부 철수를 주장하는 나의 말에 예민하게 달려들었다.
“그 성벽이란 게 폭삭 무너지진 않을 거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결국 동시 진입이 가능한 인원은 제한적이란 얘기잖아요. 나머진 당장 필요 없는 인원이란 뜻이고.”
“그러나 모든 병력의 쓰임새는 …….”
“아니, 내가 말하는 건 당장! 지금! 이 순간을 말하는 거죠! 보호 마법을 깨고 성을 진입할 단계엔 30%의 병력만 있어도 충분하다는 겁니다.”
“크흠.”
“하, 답답한 양반이네. 이게 무슨 문제를 일으키는지 몰라서 그러는 겁니까? 불필요하게 많은 병력 탓에 보호 마법 범위만 넓어지잖아요! 마력 소모가 커진다, 이 말입니다. 설명이 더 필요합니까?”
루드겐을 향한 나의 목소리는 더욱 커져 갔다.
어려운 내용도 아니다.
공격 마법을 담당하는 마법사들은 그대로 흐름을 유지하고, 방어 마법을 책임지는 자들만 역할을 축소하자는 말이다.
그렇게 여력이 생기게 되면 그걸로 나와 빅터를 지원하면 될 일.
생각할 필요도 없는 간단한 문제였다.
“아까 한두 사람 잘났다고 승리하는 게 아니라고 하셨는데…….”
설명을 마친 나는 말끝을 흐리며 루드겐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하찮은 눈높이로 세상을 단정 짓지 마세요.”
적의를 가득 담아 놈에게 말했다.
얼어붙어 가는 회의실의 분위기.
“허음, 듣고 보니 이반 공의 제안도 나쁘지 않은 것 같소. 묘수가 있다면야 가릴 이유가 없지.”
헛기침을 내뱉은 스벤 총사령관은 빅터를 힐끔 바라보곤 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 대신 두 분의 책임이 막중해질 터인데… 괜찮겠습니까?”
벌써부터 빠져나갈 구멍을 찾다니.
그 속내가 빤히 보여 피식 실소가 흘렀다.
“최선을 다해 보겠소. 한번 해 봅시다.”
그에 빅터는 점잖게 대답했다.
나야 뭐.
“후…….”
긴 한숨으로 마음을 대신했다.
대답할 가치도 없었으니까.
짜증스런 회의는 그렇게 끝이 났고, 나와 빅터는 보호 마법을 부수기 위해 출정을 준비했다.
* * *
정예 병사 3천을 제외하곤 모두다 최후위로 물렸다.
거리는 대략 500미터 뒤.
적의 사정거리 밖에서 대기하다가 보호 마법이 깨지는 순간 진군할 예정이다.
남아 있는 병사들은 말 위에 올라탄 채 출정을 준비했다.
든든한 천인장과 백인장을 주축으로 한 이들은 난전에 특화된 브라함의 최정예였다.
전열의 선두에 선 나는 펜리르를 술에게 맡겼다.
함께하고 싶지만, 녀석의 움직임에 맞춰 보호 마법을 시전할 수가 없었다.
마법의 범위는 정해져 있고, 마법사는 병사의 움직임을 보며 보호막을 이동시키기 때문이었다.
끼이잉…….
아쉬워하는 펜리르를 달래며 해머를 움켜잡았다.
서서히 다가오는 결전의 시간.
“죽지 마라.”
멧돼지에 올라탄 부족장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너희도 조심해.”
간단히 답한 나는 일렬로 서 있는 녀석들을 바라보았다.
이 특이한 그림이라니.
빠르게 성장한 붉은 멧돼지들은 그사이 어금니까지 자라나 박력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완전히 자라면 1미터가 넘는다고 했나?
하여간 풍 형제들은 펜리르와는 다른 위엄으로 출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녀석들을 바라보던 나의 시선은 천천히 다가오는 빅터에게 향했다.
“준비는 다된 게냐.”
“오래전에요.”
대답을 들은 빅터는 허공을 향해 검기를 쏘아 올렸다.
개전의 신호.
투명한 보호막이 평원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빅터와 나는.
“가자.”
적의 성을 향해 달려 나갔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