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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99개-158화 (158/203)

158화

내가 다시 눈을 뜬 건 한낮이 지나갈 때쯤이었다.

기절을 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잠에서 깬 몸 상태는 절정이었다.

남아 있는 피곤함 따윈 찾아볼 수 없었고, 머릿속마저 개운해 상쾌한 기분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경직된 몸을 풀어 주며 시스템을 살펴보았다.

[둔기 마스터리 레벨 8.]

눈앞에 떠오른 글자를 보니 절로 헛숨이 나왔다.

이 믿을 수 없는 결과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레벨이 오른 것도 기쁘지만 그보단 과정이 너무 놀라웠다.

고작 3일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엄청난 과정을 생략하며 레벨을 올려 버린 것이다.

마치 처음으로 돌아간 것 같은 숙련 속도가 아닌가.

동시에 밀려오는 신기함과 설렘에 멍하니 시스템을 바라보았다.

성장 가속 배율은 무려 300%.

앞으로 배율은 계속해서 증가할 테니 수련 속도는 더욱 빨라질 것이다.

‘이게 진짜 되네.’

내가 만들어 놓고도 믿을 수 없는 결과였다.

덕분에 주인공이었던 둔기 마스터리의 보상은 뒷전으로 밀려 버렸다.

정신을 차린 나는 찬찬히 보상을 살펴보았다.

역시나 내용은 대미지 20% 증가.

지금까지 누적된 대미지 증가의 총합은 80%에 이르렀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고유 스킬 제작에 관련된 중요한 보상이 남아 있었다.

[스킬 제작을 시작하시겠습니까?]

혹시나 싶은 마음에 실패했던 내용들을 다시 시도했다.

즉사라든가, 비처럼 쏟아지는 검기 같은 것들 말이다.

결과는 3일 전과 다르지 않았다.

즉사는 나의 능력을 탓했고, 검기의 비는 부족한 원기의 레벨을 핑계 삼았다.

사실 큰 기대는 안 했다.

즉사 같은 허무맹랑한 건 호기심에 찔러본 내용일 뿐, 원기를 사용하는 스킬에 가능성을 두고 있었다.

‘레벨만 오르면 된다는 건데.’

하여 일단은 묵혀 두기로 결정했다.

당장 써먹겠다고 수준을 낮출 이유는 없으니까.

원기를 회전시킨 나는 금빛 광채를 뿜어내며 막사를 걸어 나왔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그런데 바로 훈련 시작하시려는 거예요?”

처음으로 마주한 겨울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질문했다.

“노느니 뭐라도 하는 거지.”

“그 난리를 치고요? 안 힘들어요?”

“전혀.”

태연하게 답하는 나의 말에 녀석은 질린다는 듯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나는 최대치로 원기를 뿜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목표는 원기의 레벨을 2로 끌어 올리는 것.

최대치가 얼마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2레벨은 돼야 뭔가 그럴듯한 걸 만들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따라서 원기는 계속 유지해야 할 터. 가볍게 몸을 푸는 사이 어디선가 테오가 나타났다.

“어라, 바로 훈련하시는 거예요?”

그러고는 겨울과 똑같은 표정으로 비슷한 말을 내뱉었다.

그 뒤로 반투족 3인까지.

“원래 이런 건가, 아니면 원기라는 것이 특별한 건가.”

모습을 드러낸 부족장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통 3일 내내 기운을 뽑아 쓰면 뭐가 됐건 소진될 법도 한데 말이야. 그대는 참으로 신기하군.”

“맞아요. 사실 그 정도로 사용했으면 탈진하는 게 정상이죠. 3일간 계속 유지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예요.”

부족장과 테오는 멀쩡한 나를 두고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았다.

정작 당사자인 나는 괜찮은데 말이다.

“보유한 기운의 총량도 문제지만, 그보단 집중력 소모가 엄청나거든요. 그걸 견뎌 냈다는 게 대단한 거죠.”

칭찬을 주고받을 사이가 아님에도 테오는 계속해서 나를 추켜세웠다.

그만큼 내가 한 일이 어려운 일이란 얘기겠지만.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몸풀기를 마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원기 운용에 있어 시스템의 도움이 컸던 탓이다.

낭비되는 기운이 없도록 철저히 관리됐으니 나는 기본기 수련 자체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오전에 베르가 다녀갔었다. 오후에 작전 회의가 있다고 하더군. 3시에 시작한다고 했으니 시간 맞춰서 가라.”

“확인.”

이어진 별의 소식을 끝으로 나의 하루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 *

회의를 다녀온 나는 부관급 인원들을 막사로 불러 모았다.

공성전의 일정이 다시 잡힌 탓이었다.

“인근 영지에서 마법사들 몇 명이 지원 나왔나 봐. 내일 아침에 다시 공격을 시도하기로 했어.”

회의 내용을 간략하게 전하자 이후 막사 안은 자연스레 소란스러워졌다.

“잘하면 이번에 균형이 깨지겠군요.”

“하지만 사라센에서도 보충된 마법사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죠. 흑마탑을 괴멸시켰다고는 하나, 본래 그들은 공성 마법사들이 아니니까요. 마법 부대의 증원도 예측 범위 안에 넣어야 할 것입니다.”

깨질듯 깨지지 않는 적의 보호 마법은 이렇듯 브라함을 곤란하게 만들고 있었다.

“도대체 저쪽에 얼마나 숨어 있는 거지? 보호막이고 뭐고, 스승님이 가서 갈라내면 안 되나?”

오가는 부관들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푸념하듯 중얼거렸다.

아닌 말로 빅터의 무위가 공성 마법보다 약할 것 같지 않아서다.

칼질 한 번이면 성벽도 무너뜨리고 남을 양반이 아닌가.

수평인 지금 상황에 빅터가 나선다면 균형이 틀어지지 않겠냐는 얘기였다.

“지금까지 안 하는 걸 보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겠지.”

“맞습니다. 백작님께서 공격을 하려면 일정 거리까지 다가가야 하는 데, 적이 그걸 가만히 기다릴 리 없지요. 보호 마법이라는 게 한 번에 부서지는 것도 아니고… 그사이 쏟아지는 마법을 보호해 줄 장치가 없다면 시도하기 힘든 방법입니다.”

그러한 나의 생각에 부족장과 부관이 이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너무 소극적으로 느껴진다.

우리 마법사들은?

그 사람들이 빅터를 도우면 되잖아?

…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뒀다.

맞서는 힘이 팽팽해서 빅터를 투입하는 건데, 거기에 마법사의 힘을 돌려 버리면 말짱 헛일이 아닌가.

균형은 다시 이전 상태로 돌아가게 될 게 자명했다.

“조금의 차이인데 말이죠. 그게 참 쉽지 않고 아쉽습니다.”

일단 다른 묘책이 생기기 전까진 이런 힘 싸움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뭐, 그렇게 됐다니까.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회의를 마무리한 나는 막사를 나와 훈련을 시작했다.

금빛의 원기를 요란하게 두르고.

부아악―

거대한 해머를 회초리처럼 휘둘렀다.

정신없이 이어지는 금색의 잔상들… 해머에 실리는 원기가 늘어나자 빛의 꼬리는 더욱 길게 늘어졌다.

“뭐야, 또 시작인가.”

뒤늦게 나타난 술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팔짱을 낀 채로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하루 종일 해머만 내리치니 꼭 물레방아에 매달린 방아 머리 같군.”

“시끄러.”

이깟 핀잔에 물러서면 술이 아닐 터.

“기왕 하는 거 앞에 절구라도 놓고 때려라. 겸사겸사 밀가루라도 만들면 좋지 않겠나.”

녀석은 조잘거리며 내 앞을 지켰다.

그런 술의 잡담에 겨울이 끼어들었다.

“아니면 떡을 올려도 좋겠네요. 쿵떡쿵떡… 아, 떡볶이 먹고 싶다.”

“떡? 그것도 곡식 이름인가?”

“아니요. 곡식 가루를 찐 거예요. 그걸 망치로 두들기면 부드럽고 쫄깃해지죠.”

“흠, 떡이라… 왠지 야릇하게 들리는군. 쿵떡쿵떡이라니…….”

언제부턴가 두 녀석은 시답지 않은 얘기로 죽이 맞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너희도 훈련해. 놀면 힘이 생기냐, 마력이 생기냐. 시간을 낭비하지 마. 죽고 나면 후회할 시간도 없을 테니까.”

그에 나는 진심을 섞어 모두에게 말했다.

자신의 목숨을 지킬 수 있는 건 스스로의 능력일 테니까.

전란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진실이었다.

“쯧, 영감쟁이가 따로 없군.”

쓰게 혀를 찬 술은 툴툴거리며 돌아섰다.

하지만 녀석은 쌍도끼를 꺼내 들었고.

“빈둥대지 마라 굼벵이들아.”

부족장과 별을 채근했다.

본인의 훈련은 시작됐다 이거다.

“미친놈.”

썩은 표정을 짓던 별은 구석으로 걸어가 대검을 뽑아 들었다.

그런 그녀의 앞으로 부족장이 다가섰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무기를 맞대며 대련을 시작했다.

막사 인근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변했다.

왜 그런 것 있잖은가.

굳이 따라할 필요는 없지만, 가만 있자니 눈치 보이는 것 말이다.

멀뚱히 서 있던 부관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부대 전체가 훈련 상태로 돌변했다.

누구의 강요도 없었건만, 병사들 모두가 개인 훈련에 참여했다.

물론 진심은 아닐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칼을 뽑아 든 사람이 대다수일 테지만, 이런 시간들이 모여 스스로의 목숨을 지키게 될 거라 믿는다.

인간의 몸은 정직하니까.

육체가 인정하는 것은 오로지 순수한 노력뿐이다.

“거기 오와 열을 맞춰라!”

어수선하게 진행되던 개인 훈련은 시간이 흐르자 단체 훈련으로 이어졌다.

맨 앞에 서서 소리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술.

저 녀석이 왜 저기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훈련해서 남 주나!”

“모두 내 거다!”

“처맞고 후회해 봤자!”

“난 이미 뒈졌다!”

술의 선창에 맞춰 병사들은 광기 어린 목소리로 장단을 맞췄다.

저런 건 또 언제 맞춘 건지.

참으로 특이한 방면에 능력이 있는 놈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부작사부작 뭔가를 잘도 만들어 낸다.

게다가 녀석은 겨울을 통해 이세계의 문명까지 접하고 있었다.

아재 개그라는 것도 그렇고, 지금은 허리를 흔들며 고래고래 소릴 지르고 있다.

“훈련 중에 군가 한다! 군가는 멋진 싸나이! 요령은 죽도록! 군가 시작! 한나, 두울, 쎄엣, 넷!”

“머싯는!”

“머싯는!”

“싸나이!”

“싸나이!”

“만코 만취만!”

“어이! 어이!”

도대체 겨울에게 무슨 노래를 배워 온 건지, 녀석은 병사들과 함께 으악 거리며 노래를 불렀다.

덕분에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고.

“역시 군가가 있어야 군대라고 할 수 있죠.”

겨울은 곁으로 다가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군대 간 오빠가 생각나는군요. 지금쯤 병장이 됐을 텐데… 잘 지내고 있으려나.”

그러고는 덤덤한 표정으로 가족 얘기를 꺼냈다.

덕분에 하고자 했던 내 말은 쏙 들어가 버렸다.

“사람은 착한데 좀 어리바리하거든요. 그래서 가족들이 걱정을 많이 했죠. 처음 면회 갔을 때 질질 짜서 엄마가 많이 속상해하고 그랬네요.”

“군대에 면회도 가나 봐?”

“네. 제가 살던 곳의 남자들은 의무적으로 가야했거든요.”

“아, 영주가 징집령을 내리면 모이고 그러는 거구나?”

“그거랑 비슷하긴 한데. 18개월만 다녀오면 되는 거예요. 한 번 다녀오면 끝이죠.”

이곳과 다른 이세계 군대 얘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미사일 한 방이면 저런 성은 폭삭 무너질 텐데.”

“미사일?”

“네. 폭약 같은 건데요. 이곳에서 쓰는 포탄하곤 차원이 달라요. 도시 하나 정도는 그냥 날아가 버리거든요.”

“엄청난 마법이구나.”

“뭐, 그런 셈이죠. 마법과 과학은 한 끗 차이라고 하니까요.”

허풍 같은 녀석의 말을 들으며 한편으론 궁금하기도 했다.

도시를 날려 버리는 포탄이라니.

우리의 상식으론 도저히 상상되지 않는 위력이었다.

대포라는 건 성벽에 매달린 장식품에 불과했으니까.

사용되는 순간이라면 보호 마법이 사라진 직후 잠시뿐이었다.

왜냐고?

보호 마법이 사라져야 포탄을 날릴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훨씬 강한 적의 마법이 비처럼 쏟아지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포탄을 날릴 틈이 어디 있겠나.

포탄이라는 건, 마법이 없는 대상과 싸울 때나 사용 가능한 무기였다.

문제는 그런 대상이 없다는 것.

마법이 없이 성으로 공격해 오는 건 몬스터뿐일 것이다.

그러니 장식품 취급을 받을 수밖에.

“하지만 이곳의 사람들은 맨몸으로 그런 힘을 만들어 내잖아요. 이곳이야 말로 정말 신기한 세상인 거죠.”

원기로 가득 찬 해머를 보며 겨울은 어깨를 으쓱였다.

도시를 날려 버리는 힘이라…….

영 이루지 못할 꿈은 아닐지도 모른다.

나에겐 특별한 기회가 남아 있으니까.

[고유 스킬 제작.]

눈앞에 떠 있는 시스템 문자를 보며 나는 조용히 눈을 빛냈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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