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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99개-156화 (156/203)

156화

어둠 속을 걷던 빅터는 걸음을 멈추고 숨을 들이켰다.

터질 것 같은 근육에 핏빛 안개를 두른 남자.

“크… 역시 이쪽으로 오길 잘했어. 예감이 좋더라고.”

빅터는 공기 중에 떠도는 혈향을 느끼며, 놈의 몸을 갈라냈던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네놈은 그때…….”

“맞아, 내가 그놈이야. 당신에게 반으로 쪼개졌던 그놈.”

모습을 드러낸 거체의 남자는 비릿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한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표정을 보아하니 잊고 살았나 보네? 난 엄청 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죽었어야 할 녀석이 버젓이 살아 빅터의 눈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마무리가 덜 되었건 건가.”

“아니, 당신 공격이야 끝내줬지. 그냥 내가 좀 집착이 강해.”

혼잣말처럼 되뇐 빅터의 말에 남자는 농담을 주고받듯 가볍게 대답했다.

“뭐 하는 놈이더냐.”

그에 빅터는 싸늘하게 정체를 물었고.

“노인네라서 기억력이 부실하군. 그때 내가 확실하게 알려 줬는데.”

빈정거리던 거체의 남자는 가운데 손가락을 펴 눈앞에 들어 올렸다.

“뻐큐라고 했잖아. 기억 안 나?”

이제야 떠오르는 놈의 말장난.

일전에 목숨을 거둘 때도 녀석은 이렇게 중지를 내밀며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쯧…….”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붉게 피어오르는 안개를 보며 빅터는 검을 뽑아 들었다.

“아, 바로 칼부터 뽑는 건가? 뭐, 그것도 나쁘진 않지만 그래도 안부 정도는 물어볼 수 있는 거잖아?”

“닥쳐라.”

“크… 내가 이래서 노인네를 싫어한다니까. 그냥 자기 기분만 생각해요. 상대방 기분은 신경도 안 쓰고.”

푸념하듯 지껄이던 놈은 붉은 안개 속에서 장검을 뽑아냈다.

그와 동시에 분출하는 빅터의 오러. 예기를 띈 백색의 오러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퍼져 나갔다.

탐색전 따윈 없었다.

시작과 동시에 두 사람은 절기를 뽑아 내며 극렬하게 부딪쳤다.

콰가가가가가각―

빅터의 검기가 지면을 훑으며 날아갔고, 놈은 붉은 검을 휘둘러 걷어 냈다.

또다시 이어지는 빅터의 참격.

이번에는 위에서 아래로 내리긋는 거대한 검기였다.

쿠아아아아앙!

놈이 서 있던 자리가 계곡처럼 갈라졌다.

쉬지 않고 몰아친다.

어쩌서 살아 있는지 모르겠지만 다시 눕히면 그만 아닌가. 빅터는 처음부터 강하게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좋아! 이거지!”

하지만 그럴수록 놈의 얼굴엔 희열이 가득했다.

말도 안 되게 강하든가.

아니면 그냥 미친놈이든가.

빅터의 경험상 저런 놈들은 둘 중에 하나였다.

물론 녀석은 전자에 가까웠지만.

카아아앙!

흐릿한 잔상을 남긴 놈은 빅터의 눈앞에 나타나 붉은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막아 낸다.

유연하게 이어지는 두 사람의 공방은 약속 대련처럼 정교했다.

미리 연습이라도 한 듯.

완벽한 합을 이루며 칼끝을 주고받았다.

“…….”

빅터의 입술이 굳게 다물어졌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건만, 그사이 놈의 실력은 격변했다.

밀리지 않는다.

작은 언덕이 사라지고, 거대한 구덩이가 여기저기 생겨났다.

일대의 지형이 바뀔 만큼 절기가 난무하는 와중에도 붉은 놈의 검은 흔들리지 않았다.

“몸풀기는 끝났고… 이제 본 게임으로 들어가야지?”

피식거리며 중얼거린 녀석의 주위로 핏빛 안개가 자욱해졌다.

이전과 다르다면 ‘퍼져 나갔다’가 아닌 ‘피어올랐다’는 것.

일정 영역을 두고 핏빛 안개는 한 순간에 공간을 채워 버렸다.

피할 틈조차 없었다.

이러니 마법 부대가 절멸했겠지.

쓰게 혀를 찬 빅터는 몸에 두른 오러를 더욱 농밀하게 유지했다.

저릿하게 피부를 자극하는 붉은 안개 속에서 놈의 거체가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역시 버티는군. 오러 마스터가 헛 껍데기는 아닌가 봐.”

기척 없이 나타난 놈의 위치는 빅터의 등 뒤였다.

동시에 날아드는 두 사람의 검.

카아앙!

짧은 쇳소리를 남기며 놈의 모습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이쯤 되면 캑캑거리며 쓰러지는데 말이야. 다들 마른 생선처럼 쪼그라든다고.”

자욱한 핏빛 안개 속에서 놈의 목소리가 울렸다.

공간 전체가 말을 하는 느낌일까.

주위를 잠식한 붉은 안개는 그 자체로 놈과 동화된 것처럼 보였다.

점점 더 짙어지는 혈향과 살기.

멀리 떨어져 있던 그레시이조차 머리를 누르며 얼굴을 찌푸렸다.

“크으윽…….”

다른 병사들은 말해 뭐 하겠나.

요란한 소리에 이끌려 온 병사들은 짙은 혈향과 살기에 머리를 감싸 쥐며 고통스러워했다.

그나마 오러가 있는 경우였다.

오러조차 없는 병사들은 무릎을 꿇고 기절하듯 주저앉았다.

싸울 의지는커녕, 체념에 가까운 모습으로 자신의 목숨을 내려놓았다.

죽을 순서를 기다리는 기이한 광경.

“물러서라!”

그 모습을 바라보던 빅터는 크게 외치며 오러를 모았다.

그러고는 안개 속으로 더욱 깊이 걸어 들어갔다.

병영에서 멀어진 빅터는 걸음을 멈추고 검을 치켜들었다.

공기의 흐름이 일순간 정지했고.

초월검 제1식 난무.

빅터는 붉어진 전방을 향해 큰 호를 그었다.

슈아아악―

바람을 가르는 검기의 파동이 폭발하듯 퍼져 나갔다.

발화점이 되어 버린 빅터는 휘둘러진 검을 들어 한 점을 향했다.

그러고는 수십 갈래의 형을 남기며 칼부림을 시작했다.

절제의 미학이라 불리던 빅터의 검은 그곳에 없었다.

절정에 이른 백색의 오러가 전방위로 치솟기 시작했고, 핏빛 안개가 사라지며 놈의 모습이 드러났다.

거대한 몸에 가득한 크고 작은 자상.

일그러진 놈의 얼굴에서 평정심이 지워졌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시작일 뿐.

아랑곳없는 빅터의 비기는 계속해 이어졌다.

초월검 제2식 영혼 베기.

그에 맞서는 놈의 주위로 핏빛 안개가 몰리며 두꺼운 방패를 만들어냈다.

스걱―

준비 과정이 무색할 만큼 고요한 참격.

하지만 결과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숨을 멎게 만들었다.

갈라진다.

그리고 끝도 없이 이어진다.

장엄한 공성 마법 같은 빅터의 절기는 대지를 매운 암반을 쪼개 깊은 계곡을 만들었다.

인간의 힘이라 할 수 없는 경이로운 모습.

그러나 빅터의 표정은 여전히 차갑게 굳어 있었다.

“하, 역시…….”

공격을 막아 낸 놈은 거대한 방패를 거두며 고개를 저였다.

인간을 넘어선 자의 공격과 그것을 받아 낸 자의 싸움.

상상을 넘어선 인외의 결과 앞에 지켜보던 병사들은 참았던 숨을 내쉬며 탄식을 질렀다.

“무슨 노인네 힘이 이렇게 세.”

투덜거리던 놈은 안개를 뿜어 거대한 창을 만들었다.

창대를 고쳐 잡은 놈은 점멸하듯 사라져 빅터의 앞에 나타났다.

콰드드드드드드득!

검과 창이 맞닿으며 섬뜩한 소리를 만들었다.

격돌한 두 사람의 주위로 매서운 칼바람이 불었고, 뻗어 나가는 오러의 충격파는 일대를 환하게 밝혔다.

“이러니 잊을 수가 없지. 크크크.”

사납게 웃어 재끼는 놈의 창이 잔상을 만들며 빅터를 노렸다.

녀석은 무기를 가리지 않았다.

검에서 창으로 바뀌었음에도 놈의 공격은 여전히 강하고 날카로웠다.

결이 다른 무기를 이토록 능수능란하게 다루다니.

콰가가가가각!

보기 드믄 남자의 능력에 빅터는 내심 놀라워했다.

하지만 놈의 기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죽어.”

냉소와 함께 날아든 놈의 거대한 창은 크기를 더욱 키워 빅터의 목을 노렸다.

저릿한 살기가 폭풍처럼 몰아치며, 펼쳐진 핏빛 안개가 화살이 되어 비처럼 날아들었다.

운신할 틈조차 허락지 않는 포악한 공격.

기로에선 빅터의 눈에 사나운 안광이 번뜩였다.

여기까지 오게 될 줄이야.

빅터의 검 끝에 서린 백색 오러가 소용돌이치며 솟아올랐다.

초월검 제3식 격노.

스윽―

고요히 그어진 횡 베기 하나로 모든 것이 역행하기 시작했다.

노구의 목숨을 노리며 날아오던 거대한 창과 핏빛 화살.

콰가가가가가가각!

터무니없던 살기와 비릿한 웃음마저도, 티 없이 청명한 빅터의 오러 앞에 바스러지듯 사라져 갔다.

“크으으으으윽!”

무기를 잃은 놈의 손이 필사적으로 앞을 가로막았다.

하나 소용없다.

이미 시작된 격한 분노의 파동은 마주한 모든 것을 지워 버리며 파도처럼 일대를 집어삼켰다.

거대한 놈의 몸뚱어리도 그대로 삼켜지는가 싶던 그 순간.

“이래서 노인네가 싫다니까.”

먼지처럼 흩어지던 놈의 몸뚱어리는 핏빛 안개 속으로 흡수되듯 사라졌다.

하나 여전히 남아 있는 짙은 혈향과 안개의 흔적.

“해치우신 겁니까?”

“아니다. 그저 자리를 피한 것 같구나.”

승리를 묻는 그레이시의 말에 빅터는 고개를 저으며 불확실한 답을 내놓았다.

저 멀리 보이는 안개 속 어딘가에 숨어 있을 터.

“그사이 아주 성가신 놈이 되었어…….”

빅터는 말끝을 흐리며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오른손으로 시선을 돌렸다.

“상처가 꽤 깊어 보입니다.”

다가온 그레이시는 빅터의 팔을 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이런 걸로 죽기야 하겠냐만.

저 커다란 상처를 바라보자니 다가오는 세월의 무게가 새삼스레 느껴졌다.

“이제 싸움은 자제하셔야겠네요. 전성기는 지난 모양입니다.”

그레이시는 치유 마법을 시전하며 진심이 섞인 농담을 전했다.

본인도 그렇게 느낀 걸까.

나이를 탓하는 그레이시의 말에 빅터는 달리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나저나 분명히 죽었는데 어떻게 된 걸까요. 이렇게 되면 불사의 몸이라는 얘기잖습니까.”

“글쎄다. 놈이 두르고 다니는 안개가 능력의 근간인 것 같더구나.”

치유된 팔을 둘러본 빅터는 놈이 사라진 어둠을 바라보았다.

* * *

일방적인 승리를 예상했던 전쟁의 향방은 브라함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유야 어찌됐건 말이다.

브라함의 연이은 승리로 인해 전선은 제나르를 중심으로 포위하듯 형성되어 있었다.

그에 사라센의 황제 네자르 하부카드 2세는 격양된 표정으로 소리쳤다.

“고작 이런 꼴을 보이려고 짐을 설득했단 말인가!”

사실 아침까지만 해도 이만큼은 아니었다.

그저 심기 불편한 분위기 정도?

그런 황제의 심경에 불을 지른 건 따로 있었다.

다름 아닌 바빌리안의 함락 소식.

보고를 접한 황제는 극대노하여 대장군을 불렀다.

이 전쟁을 부추긴 원흉 중에 하나이자, 사마르와 함께 황제를 설득한 막심 투르크만이었다.

“아직 끝난 것도 아니잖습니까. 심기를 가라앉히시고 조금 더 지켜보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시작이 반이라 하지 않소. 개전부터 이렇듯 엉망인데, 무얼 더 기대한단 말이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무릇 과정이란 것은 좋을 때도 있고, 편치 않을 때도 있는 법입니다. 소신과 사마르 경을 믿고 기다려 주시지요.”

대장군 막심은 분노하는 황제를 살살 어르고 달래며 진정시켰다.

꽤나 익숙한 모습이랄까.

황제를 대하는 태도가 유연한 이유는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사제의 관계 때문이었다.

대장군이란 직함과 황가의 검술 스승.

떼려야 뗄 수 없는 전형적인 관계인 것이었다.

“그렇게 믿은 보답이 이 모양 이 꼴 아니요! 계획이 있다면 짐이 납득할 수 있도록 말해 보시오.”

“일단 남부 전선이 악화되었으니 저는 남부로 향하겠습니다.”

채근하는 황제의 말에 막심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북부가 점령당한 건 의외였습니다만… 고작 2천도 안 되는 병력이잖습니까. 무스크 장군을 보내 정리시키고, 소신은 남부 전선에 직접 나서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엔 확실한 게요?”

“세상에 정해진 건 없는 법입니다. 원하는 결과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지요. 폐하의 영광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두루뭉술하게 답한 대장군 막심은 감정 없는 미소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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