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나와 부대의 복귀는 아케른 성이 아닌 제나르였다.
제3흑마탑이 있는 곳이자 적의 주병력이 집결해 있는 곳.
빅터와 내가 흑마탑을 공격하러 간 사이, 스벤 총사령관은 5만의 군사를 이끌고 아케른과 마주한 시에라를 점령했다.
선공을 당했지만, 계획을 변경하지 않은 것이다.
어차피 적의 공격은 무력화됐고, 잠재적인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정예부대가 나섰다.
기다릴 이유가 없던 스벤은 국경의 모든 영주에게 진격을 명했다.
그에 번츠와 카렌, 번슈타인의 영주들은 마주한 국경 지대에 공격을 감행했다.
결과는 대성공.
출정을 시작한 브라함의 군세는 국경을 맞댄 수드라와 파스쿠를 손쉽게 함락시켰다.
병력 보전의 차이었다.
개전 이후 양국의 인명 피해는 판이하게 달랐던 탓이다.
병력 손실이 거의 없던 브라함과 달리 사라센의 손실은 심각했다.
그 차이를 파고드는 건 기본 중에 기본일 터.
스벤 총사령관은 여세를 몰아 하루거리인 제나르로 진격했다.
하나 그의 계획은 변수를 맞이했고, 거칠 것 없던 브라함의 승전은 제나르에서 저지당했다.
도무지 뚫리지 않는 수성 마법 때문이었다.
전황을 전해 듣던 나는 이 대목에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계산이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
“우리 측 마법사들은 모두 무사할 텐데요? 전선에 나온 인원이 얼마인데 단일 세력 하나를 이기지 못했다는 거죠?”
설명을 듣던 나는 애먼 켄드릭을 붙잡고 시비 같은 질문을 던졌다.
피해가 없던 브라함이 아니던가.
마법 싸움을 이기지 못했다는 게 납득되지 않았다.
그러나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고.
“전쟁 시작과 동시에 스벤 총사령관의 마법 부대가 괴멸을 당했습니다.”
적들도 우리처럼 마법 부대를 먼저 노렸던 것이었다.
이 얼마나 어이없는 소식인지.
“네?”
설명을 듣던 나는 얼굴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후위의 방비를 어찌했기에 시작부터 괴멸을 당했다는 걸까.
사라센이야 기습 공격을 하며 방심했다 치지만, 브라함의 입장은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준비를 마친 상대가 아군의 마법 부대를 노리는 건 당연한 순서인 것.
작은 틈조차 허락하지 않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는 기본 지침이었다.
하지만 본론은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
“적들도 정예부대를 운용한 건가요?”
“아니요. 적의 인원은 한 명이었습니다.
괴멸당한 것은 둘째 치고, 그 과정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한 명이요?”
“네. 마법 부대를 몰살시킨 건 한 사람이었습니다.”
스벤의 본대와 합류한 각 영지의 마법사들은 단 한 명의 남자로 인해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다.
“뭐 하는 놈인데요?”
“저희도 알아보려 했지만 놈의 대한 정보는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질문에 답하는 켄드릭 역시 황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빅터를 대신에 아케른에 남았건만 정체불명의 적에게 능욕만 당한 까닭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시간 차랄까.
출발이 늦었던 아케른의 마법 부대는 스벤의 본대에 정시에 합류하지 못했다.
덕분에 몰살은 면했지만, 이후 전선의 균형은 아케른 혼자 유지해야 했다.
하지만 마법사의 부제는 사라센도 마찬가지 아니었겠나.
기습에 실패한 사라센의 마법 부대 역시 괴멸적 피해를 입은 건 동일했다.
따라서 비슷한 인원이 남아 있다고 가정하면 브라함이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에겐 에르텔이 있잖아요. 그런데도 수성 마법을 뚫지 못했다는 건가요?”
마력을 증폭해 주는 에르텔의 존재 때문이다.
“네…….”
그러나 켄드릭은 말끝을 흐리며 나의 질문에 대답했다.
저 침묵이 주는 의미는 크다.
에르텔의 도움을 받았음에도 마력의 총량이 비등했다는 건, 적의 마법 부대 인원이 이쪽의 몇 배가 넘는단 얘기였다.
그렇게나 피해를 입혔건만.
확인되지 않은 적의 저력에 전선은 고착된 상황이었다.
이 모든 일이 고작 한 사람 때문이라니…….
“어제 새벽에도 놈이 나타나 측면을 공격하고 사라졌습니다.”
마법 부대를 전멸시킨 녀석은 간간히 모습을 드러내며 외곽의 부대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구석에서부터 야금야금 갉아먹히고 있는 상황.
대치 상태를 견고히 한 스벤은 빅터의 복귀를 기다리며 버티기에 들어갔다.
그사이 내가 도착했고, 이렇게 마주앉아 황당한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이었다.
“말만 들으면 스승님 수준인데.”
정체불명의 강자는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역시나 강화 인간인 걸까.
하지만 설명을 들어 보면 이성이 없는 사람으론 보이지 않았다.
필시 알려지지 않은 8성급의 강자였을 터.
그렇게 복귀한 첫날밤은 풀리지 않는 의문과 함께 지나갔다.
* * *
다음날 오후.
빅터의 복귀와 함께 총사령관의 회의가 소집됐다.
주요 안건은 확인 되지 않은 절대 강자.
워낙 신출귀몰한 탓에 이길 방법이 없다는 게 경험자들의 중론이었다.
“나타나는 순간 핏빛 안개가 자욱해지더군요. 우왕좌왕하던 병사들이 쓰러지기 시작했고, 안개가 걷힌 뒤에 남은 건 말라비틀어진 시체뿐이었습니다.”
놈과 대면한 병사의 증언에 회의실은 작게 술렁였다.
“병사들의 동요가 심각한 상황입니다. 기세를 반등시키지 못한다면 이어진 전장에도 크게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병사의 증언이 끝나자 번슈타인의 영주가 생각을 전했다.
그 위급했던 기습도 물리쳤건만, 번슈타인의 마법사와 기병들은 정체불명에 남자에게 몰살당하고 말았다.
고작 한 명에게 말이다.
번슈타인 영주의 말에 좌중은 말없이 얼굴만 구겼다.
대안이 없는 탓이다.
“그놈이 핏빛 안개를 뿌렸다고 했느냐.”
침묵하던 사람들 사이로 빅터의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네. 붉은 안개도 피어올랐고, 그 안개로 무기도 만들어 냈습니다.”
“놈의 체격은.”
“장대했습니다. 살면서 그런 거한은 처음 봤습니다.”
인상착의까지 이어지자 빅터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해 갔다.
분명히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
“그놈은 내가 맡도록 하겠소. 다른 안건으로 가십시다.”
표정을 갈무리한 빅터는 회의의 주제를 다음으로 넘겼다.
“그 외에 새로운 소식으론 사라센의 북부가 누군가에게 침공당했다고 합니다.”
“북부라면, 바빌리안 인근을 말하는 것인가?”
“네. 국경이 뚫린 직후 바빌리안이 함락되었다고 합니다.”
“누가 침공했단 말인가?”
“그건 아직 알려진 바 없습니다.”
이후 수차례 문답이 이어졌으나 침략자의 정체는 드러나지 않았다.
역시 세상은 넓다 이건가.
피안개의 신원도 불투명한데 제3의 세력까지 등장했다.
“문제는 목적과 동기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군인지 적군인지 피아 식별조차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계속되는 부관의 설명에 회의장은 또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아군이냐 아니면 잠재적인 적이냐는 얘기였다.
“병력의 숫자는 2천에 불과하나 작은 규모에 비해 엄청난 강군이라고 합니다.”
제각각 떠드는 사람들의 목소릴 뚫고, 부관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흠, 그 인원으로 국경을 넘어 바빌리안을 점령했다면 강군이라 할 수 있겠군.”
“그것도 그렇지만 바빌리안 자체가 전투 없이 함락된 모양입니다.”
“전투가 없었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제1흑마탑이 바빌리안에 있지 않습니까. 그곳에 있던 병사들이 지금 제나르에 와 있을 겁니다.”
“아, 그렇겠군.”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번슈타인의 영주는 반복된 설명 끝에야 상황을 납득했다.
사라센의 기습 공격으로 부상을 당했다더니, 어수선한 분위기는 후유증 탓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원래 좀 아둔하든가.
하여간 회의는 계속되었고.
“적의 적은 아군이라 했으니 우선은 관망하는 것이 어떻겠소?”
갑자기 등장한 제3세력은 일단 놔두기로 결정했다.
목적이야 어찌됐건, 당장은 브라함에게 이득인 까닭이었다.
* * *
“뭐라? 바빌리안이?”
연이은 흑마탑의 소식에 사마르는 분노했다.
하루 차이로 제2흑마탑과 제4흑마탑이 절멸하더니, 이제는 제1흑마탑마저 적의 손에 떨어졌다.
브라함의 전력이 이 정도였나?
하나쯤은 이해할 수 있었다.
빅터가 있으니까.
하지만 세 개가 동시에 초토화되는 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기습 실패도 아직 납득하지 못했는데, 어찌 저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심지어 적의 마법 부대를 섬멸했음에도 여전히 이곳은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중이었다.
이건 필시 뭔가가 있다.
단순히 사람의 문제가 아닌, 외적인 그 무언가가.
그것으로 인해 모든 게 꼬이고 뒤엉킨 것이 분명했다.
“어차피 찌꺼기들만 남지 않았었나? 우리가 이곳에 있으니 상황은 다시 돌아오리라 보는데.”
분노하는 사마르를 향해 바스코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압도적인 능력에서 오는 자신감.
그것을 부정할 수 없기에 사마르는 대꾸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대고 있다는 것이 옳은 표현일 터.
“말만 해. 내가 다 정리해 줄 테니까. 그러니 인상 좀 피라고. 생각도 할 줄 모르는 강화 인간 같은 건 언제든 만들 수 있잖아. 안 그래?”
그런 사마르에게 바스코는 다독이듯 말을 건넸다.
그답지 않은 말투와 내용. 피 맛을 본 바스코는 왜 이러나 싶을 만큼 상냥한 상태였다.
“물론 네가 있으니 전쟁은 다시 우리 쪽으로 기울 것이다. 강화 인간 역시 새로 만들면 그만이고.”
실제로 바스코는 본인의 실력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아니, 살짝 보여 주고 있다는 게 맞을 것 같다. 히죽거리며 놀러 가듯 전장을 다녀왔으니까.
그러니 작정하고 임한다면 어떻게 되겠나. 바스코만 있다면 이 전쟁은 여전히 희망적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마르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브라함과의 전쟁에서 승리한들, 사라센의 황제를 억압해야 한다는 과제가 남은 탓이었다.
그렇지 못한다면 과거의 실수가 반복될 뿐.
브라함을 꺾어 데드릭 황제를 처단하면, 이후론 사라센의 황제 네자르를 제거해야 본인의 꿈에 다가서게 된다.
그러려면 강력한 군대는 필수.
“단순히 이기기만 해서는 제국을 삼킬 수가 없다. 그래서 쥐고 흔들 놈들이 필요하지.”
따라서 강화 인간 제조에 익숙해진 흑마법사의 존재는 사마르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들이 없다면 뒷심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내가 이곳에 있는 한, 흑마법사들이 죽어 나갈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겠으나, 바스코는 사마르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저 기분 좋아 떠드는 말일 터.
“든든하군…….”
하지만 결과는 확신하기에 사마르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 * *
제나르 성을 마주한 브라함의 병력은 포위하듯 넓게 산개해 있었다.
네 개의 문이 있는 제나르 성의 특징 때문이다.
따라서 전장의 틈이 매우 길고 넓은 상황.
그 중간을 매우기 위해 빅터와 이반이 좌우측에 배치됐다.
본대와 양 날개 사이에 주둔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놈의 활동을 얼마나 저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속절없이 당하는 것보단 나은 선택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빅터와 이반이 승리했을 때를 상정한 것이었다.
따라서 적의 정체야 말로 무엇보다 중요할 수밖에.
“바빌리안에서 해치웠던 그놈이 맞을까요?”
“글쎄다. 하는 설명으로 봐선 그놈이 분명한데…….”
그레이시와 빅터는 어두워진 전장을 보며 그놈을 떠올렸다.
대수림부터 추적을 시작해 바빌리안에서 해치웠던 능력자.
반으로 갈라진 몸뚱이로 쪼그라들 듯 사라졌던 거대한 놈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놈은 절명했잖습니까?”
“그랬지. 확실히 끝냈을 터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구나.”
질문에 답하는 빅터 역시 뭐라 고 설명할 말이 없었다.
어찌됐건 추측일 뿐이니까.
이미 죽였던 그놈일 수도 있고, 그와 비슷한 다른 녀석이 수도 있다.
결국 마주쳐야 알 수 있다는 얘기였다.
“한데 아케른으로 가지 않고 왜 이리로 왔는가. 스벤이 알아볼 텐데.”
해답 없는 고민을 접은 빅터는 그레이시에게 질책하듯 말을 건넸다.
스벤과 루드겐은 그레이시의 얼굴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못 알아보더군요. 그저 주름살 몇 개 생기고 수염을 조금 길렀을 뿐인데.”
그레이시는 턱 주위를 쓸어내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풍성하게 자라 엉겨 붙은 수염.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은 그레이시의 얼굴 절반을 가리고 있었다.
저기에 후드를 덮어쓰니 알아보기 쉽지 않을 터.
“그래도 조심하게.”
재차 당부를 전한 빅터는 어둠 속을 향해 다시금 시선을 돌렸다.
한데 저건 무엇일까.
먼 곳을 바라보던 빅터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히기 시작했다.
선명하게 느껴지는 짙은 혈향과 살기.
“아무래도 온 것 같구나.”
낮게 읊조린 빅터는 검을 뽑아 들고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