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흑마탑에 진입한 우리는 미리 지정된 위치에 따라 빠르게 위아래 층으로 흩어졌다.
일반적인 구조에 따르면 지하에 있는 시설은 무언가를 감금하거나 재료들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따라서 주력 인원은 흑마법사들의 활동 지역인 상층으로 향했고, 다수의 오러 유저들이 병사들과 함께 지하 수색을 진행했다.
“사라센의 흑마법사들은 공격형인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미리 준비하세요.”
곁을 달리던 테오는 선두에 선 나에게 주의를 당부했다.
대련 상대였던 나의 모습을 기억하는 탓일 것이다.
하지만 금빛의 원기를 두른 나는 그때의 내가 아니다.
이젠 마력에 대응할 수 있으니까.
클레어가 했던 말처럼, 이제 내 몸에는 마법을 상대할 수 있는 기운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비록 오러와는 형태가 다르지만.
“전방에 마법…….”
원기를 머금은 나의 해머는 날아오는 마법을 가볍게 튕겨 내 버렸다.
너무나도 손쉽게 말이다.
적의 마법을 무마시킨 나는 말끝을 흐리는 테오를 지나 술자를 향해 날아들었다.
콰드득!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사라진 흑마법사.
“이젠 완전히 숙련된 것 같군.”
뒤를 따라온 별은 부럽다는 듯 말을 건넸다.
하지만 나는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도움을 받는 느낌이라고 할까.
나의 경험과 역량에 비해 주어지는 결과가 너무 좋았던 까닭이다.
‘시스템 때문인가.’
원기를 움직이는 건 나였지만, 과정은 내 능력 이상으로 세밀하게 제어되고 있었다.
그저 결과를 전해 주던 모습을 벗어나 함께 최선의 결과를 만드는 것.
이유야 알 수 없지만, 시스템의 역할이 적극적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렇다 이거지…….”
거부할 이유가 없잖은가.
해머를 바로잡은 나는 상층을 향해 더욱 빠르게 달려 나갔다.
놈들이 반응할 작은 틈조차 허락하지 않으며.
콰아아아아앙!
벽과 벽 사이를 뚫고 닥치는 대로 잡아 족쳤다.
이렇게 요란을 떨어도 되나 싶을 만큼, 우리는 거침없이 흑마탑을 들쑤시고 다녔다.
“조금 자중해야 하는 것 아닐까 싶군. 이러다 바깥에서 알게 되면 큰일 나지 않겠나.”
또 다른 층으로 오르는 사이, 부족장은 근심 어린 말투로 염려를 전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답은 내가 아닌 테오가 대신했다.
“보통 마탑들은 여러 가지 실험 때문에 결계를 이중 삼중으로 칩니다. 그중에는 방음 결계도 있지요. 뭔 짓을 해도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더 해도 된다는 얘기인 건가?”
“외벽만 부수지 않는다면야 쉽게 눈치채진 못할 겁니다.”
그러니 더욱 세게 날뛸 수밖에.
마법을 쳐 낼 수 있는 지금, 나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이 탑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폭군처럼 달려 도착한 마지막 층.
구석에 몰린 남자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질문은 내가 할 테니 너는 네, 아니요, 둘 중 하나만 대답해라. 알겠지?”
그러고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놈에게 규칙을 설명했다.
“닥쳐라! 감히 이곳을 습격하다니,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틀렸어.”
“커억!”
“네, 아니요, 둘 중 하나만 쓰라고.”
주절주절 떠들어 대는 놈의 얼굴에 솥뚜껑만한 귀싸대기를 날렸다.
그 한 방에 주저앉는 남자.
쓰러진 녀석은 머리를 처박은 채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에 지켜보던 테오는.
“설마… 속박의 주술?!”
반신반의한 말투로 똑같이 중얼거렸다.
그사이 남자의 주문은 더욱 크게 변해 버렸고.
“귀 막고 돌아서요! 그 주문을 들으면 안 됩니다!”
사색이 된 테오는 고함을 치며 두 귀를 틀어막았다.
진작 말해 주든가.
이미 다 들었는데 이제 와서 뭘 어쩌라고…….
“어둠의 율법에 따라 지금부터 영원히 너의 모든 것을 속박하노라!”
주문을 마친 남자는 고개를 치켜들며 두 팔을 벌렸다.
하지만 상관없다.
[상태 이상 저항으로 인해 속박이 거부되었습니다.]
놈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으니까.
눈앞에 떠오른 선명한 문자를 보며 나는 남자의 멱살을 조용히 움켜잡았다.
“이게 시키지 않은 짓을 하네?”
어? 하는 표정의 남자.
뜨악, 하는 놈의 뺨을 향해 두툼한 손을 휘둘렀다.
“커허억!”
비명과 함께 붉은 피가 허공에 뿜어졌다. 눈이 풀린 녀석의 머릴 잡아 나는 간단하게 질문했다.
“마탑주는?”
너희의 두목은 어디 있냐고.
“다, 닥쳐라.”
“말귀를 못 알아듣네.”
“크어어어억!”
반항하는 놈의 턱을 사과를 쥐듯 움켜잡았다.
“마탑주는 어디 있나?”
“네놈들에게 알려줄 성 싶으냐!”
콰지직―
악다구니하는 놈의 대답에 나는 움켜쥔 놈의 턱을 부숴 버렸다.
“말할 생각 없으면 그냥 죽어.”
어차피 다 죽을 목숨.
우리의 목적은 이곳에 있는 모든 생명의 말살이었다.
“철수하면서 잔당들을 처리합니다.”
돌아선 나는 다시 아래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비명과 소란스런 움직임.
여전히 살아남은 흑마법사의 잔당들은 되돌아가는 나의 손에 무참하게 사라졌다.
“이럴 때는 정말 가차 없군.”
“여기서 100명을 잡으면 바깥에 있는 수십만을 살릴 수 있으니까.”
목숨값에 크고 작음이 어디 있겠냐만, 이 전쟁은 분명히 놈들이 시작했다.
그러니 대가 역시 놈들의 몫.
아래로 향하던 나의 눈에 다급하게 올라오는 병사의 모습이 보였다.
“지하 감옥에 괴인들이 감금돼 있습니다.”
마주한 병사의 말에 반문하지 않았다.
괴인의 존재는 마인일 테니까.
지하로 내려간 나는 익숙한 모습을 덤덤히 바라보았다.
아리안의 옹달샘 마을에서 본 것과 같은 형상.
“이들은 사람이 아닙니다. 모두 처단하세요.”
병사들을 향해 가차 없이 섬멸을 명했다.
이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닐뿐더러 몸속에 있는 마석은 강화 인간의 재료로 사용된다.
남겨 둬 봤자 불행의 씨앗만 키울 뿐.
모조리 해치운 뒤, 마석까지 회수해 흑마탑에서 철수했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18분.
제2흑마탑을 초토화 시킨 우리는 들어왔던 뒷산을 통해 집결지로 향했다.
* * *
“경미한 부상자 2명 외 전원 무사히 귀환했습니다.”
작전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낙오된 병사들은 없었고, 부상자 두 명은 가벼운 찰과상이 전부였다.
“연구실 및 재료 창고에서 회수한 마석이 220점, 강화 중이던 적 병력 60명 및 거주 중이던 흑마법사 47명 전원 섬멸했습니다.”
“수고했습니다. 이 시간부로 신속하게 아케른으로 복귀합니다.”
전투 보고를 받은 나는 복귀를 명령했다.
섬멸한 흑마법사 47명.
우리가 알고 있던 정보와 정확하게 일치했고, 이는 제2흑마탑의 기능 정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제2흑마탑 점거 완료.
강화 인간 및 흑마법사 전원 섬멸.]
베르에게 소식을 전한 나는 흩어지는 부대원들을 따라 어둠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다음 날 저녁.
간단한 저녁 식사를 마치고 펜리르에 기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습관이 될 것 같은 포근함이랄까.
적지에 들어온 신세를 잊을 만큼 표현하기 힘든 만족감이 묘하게 가슴을 채웠다.
딸랑―
이름 모를 별구경은 청명한 종소리와 함께 잠시 뒤로 미뤄 뒀다.
품안을 뒤적거린 나는 사각으로 접힌 양피지를 꺼내 전달된 내용을 살펴보았다.
발신자는 베르.
내용은 당연하게도 빅터의 승전보였다.
그쪽의 사정 또한 우리처럼 완벽한 승리를 거둔 모양이다.
“그대의 스승인가.”
“어, 이기고 돌아오는 중인가 봐.”
“그렇군.”
소식을 접한 별은 덤덤하게 반응했다.
당연하다는 느낌?
애초에 그 영감이 출정한 순간, 승패의 행방은 이미 결정 난 것과 다름없었다.
브라함 흑마탑을 공격했을 땐 고작 30여 명으로 초토화시킨 양반이다.
물론 흑마법사의 숫자와 환경의 차이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빅터의 승리는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였다.
숨 못 쉬면 죽는다와 뭐가 다르겠나.
펼쳐 든 양피지를 반으로 접어 감흥 없는 아군의 소식을 뒤로했다.
한데 그 순간.
딸랑―
접힌 양피지에서 맑은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뭐지.”
전하지 못한 내용인가 싶어 양피지를 다시 펼쳤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발신자는 로제였는데, 적혀 있는 내용이 너무 뜬금없었다.
[마론 후작이 역모를 계획했대요.]
첫 만남부터 꼬였던 페이소스 가문이 결국 엄청난 사건을 저질렀단 얘기였다.
어쩐지 인상이 더럽더라니.
개차반 같던 노이의 심성은 그냥 유전이었나 보다.
하나 흉흉한 소식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재상과 금고 담당자가 에르텔을 훔쳐 갔다고 하네요.]
국가급 보물인 에르텔이 도난당했다는 것이었다.
한데 재상이란 작자가 뭐가 아쉬워서 그런 짓을 했다는 걸까.
그랬다고 하니 믿고는 있지만, 범인의 직책을 보면 도무지 범죄 사실이 인정되지 않았다.
“골치 아프게 됐네.”
상황이 다를 뿐.
아리안의 사정도 브라함 못지않게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여기서 멈췄으면 좋았을 것을.
마지막을 장식한 로제의 메시지는 읽는 나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그것은 제논 백작의 투병 소식.
시한부라는 내용은 이미 알고 있었으나, 막상 현실로 다가오니 남일 같지 않게 느껴졌다.
나름 우여곡절을 함께 나누지 않았던가.
상심에 빠져 있을 로제의 심경이 흐트러진 글씨 속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무슨 말을 전해야 할까.
위로를 해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막상 전할 얘기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럴 땐 뭐라고 말해야 하지.”
긴 한숨을 내쉰 나는 난감한 얼굴로 양피지를 바라봤다.
적당한 격식이 있을 텐데 말이다.
“이긍, 멋진 말을 찾으니 할 말이 없는 거죠.”
상황을 파악한 겨울은 얼굴을 구기며 답답하다는 듯 대답했다.
“무슨 경사 났다고 멋진 말을 해요. 이럴 때 필요한 건 그저 공감이라고요.”
“공감?”
“네. 다 필요 없고 그냥 한마디면 되는 거라구요.”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그걸 몰라서 이렇게 전전긍긍하고 있잖나.
“상대가 얼마나 힘들지 공감해 주는 거예요. 예를 들자면, ‘곁에 있어 주지 못해 미안해요.’ 이런 거죠.”
아씨… 얘기를 들을수록 점점 더 헛갈린다.
뭐가 이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건지.
내가 경험했던 주위의 사람들은 ‘한잔해’라는 말로 감당키 힘든 슬픔을 달랬다.
하기야, 거친 남자들의 방식과 귀족 영애의 방식은 여러모로 다르지 않겠나.
[도움이 필요하면 얘기하세요. 내가 도와줄게요.]
힘들어 할 로제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고작 이 정도뿐이었다.
* * *
“에휴, 싱숭생숭하구먼.”
“뭐가 말인가.”
“전쟁 말이네. 이쪽이야 아직 잠잠하지만, 브라함 국경 쪽에선 크게 벌어진 것 같다고 하더군.”
리베와 사라센을 잇는 국경 초소의 병사들은 현재 진행 중인 전쟁에 대해 걱정스런 마음을 드러냈다.
전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긴 하지만, 언제까지 이럴 거란 보장은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 당장은 평화롭다.
출국하는 사람이 늘어난 게 좀 귀찮을 뿐.
“아닌 말로, 적들이 이쪽을 향해 들어온다면 방법이 없잖은가? 그때는 꼼짝할 틈도 없이 여기서 몰살당하게 될 걸세.”
진저릴 치는 남자의 말에 다른 초소 병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에 동참했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말인 탓이었다.
브라함의 병력이 대수림을 돌아온다면 이곳은 생지옥으로 변할 터였다.
이곳의 국경은 영지의 성이 아닌 초소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또한 사라센이 자초한 상황이었다.
본래 국경은 이곳보다 훨씬 안쪽이었고, 주인 없는 영토를 삼키다보니 어느새 지금의 위치가 국경이 돼 버린 것이다.
따라서 적이 침입할 경우 속수무책으로 뚫릴 수밖에 없었다.
바로 지금처럼.
초소를 지키던 병사는 멀리서 다가오는 먼지구름에 눈을 비비며 일어섰다.
“저, 저게 뭔가?”
그러고는 무언가 잘못 되었음을 본능적으로 깨닫기 시작했다.
굳이 설명하자면 당장 도망쳐야 한다는 정도.
하지만 초소를 버리고 내뺄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니던가.
가늠할 수 없는 흙먼지를 보며 두 남자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사이 거리는 점차 좁혀지기 시작했고.
“시부럴…….”
초소를 지키던 병사는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목숨을 예감해야 했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