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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99개-153화 (153/203)

153화

신에게 받은 축복도 별거 없나 보다.

칼날이 소용없다던 무슈슈는 해머 한 방에 날아가 경련하듯 움찔거렸다.

기회를 놓칠세라.

콰아아아아아앙!

쫓아 들어간 나는 버둥거리는 놈의 머리에 한 번 더 해머를 내질렀다.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린 무슈슈의 머리통.

“신수가 뭐 이래?”

축 늘어진 몸뚱어리를 보며 나는 아쉬움을 토해 냈다.

이래서야 원기를 두른 보람이 없잖은가.

명색이 신이 키우던 놈이라더니 고작 해머질 두 방에 저 꼴이 나 버렸다.

“새로운 유형의 잘난 척이군요. 이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 시시한 척하다니.”

툴툴거리는 나를 보며 겨울은 손을 뻗어 앞을 가리켰다.

허물어지다 못해 뻥 뚫려 버린 석벽.

“멀쩡한 벽에다가 땅굴을 만들어 놓곤 뭔 소릴 하는 거예요?”

팔짱을 끼고 있는 겨울은 기가 차다는 듯 얘기했다.

“그 잘난 척 나도 하고 싶군.”

“나도.”

그에 호응하듯 다가온 별과 술이 겨울의 말을 거들었다.

잘난 척이라…….

무너진 석벽을 바라보며 나는 입가를 쓸어내렸다.

이렇게나 차이가 컸다니.

기존의 공격이 점으로 끝났다면, 이제는 관통과 확산이 추가된 모습이었다.

충격의 여파가 광범위하다고 해야 하나.

심지어 본래 가지고 있던 힘마저도 증폭된 느낌이었다.

한마디로 예전의 내가 아니라는 것.

“이 정도면 8성이라고 봐도 무리 없을 것 같은데.”

앞으로 걸어간 부족장은 동굴처럼 패인 벽 앞에 서서 소감을 전했다.

내가 정말 그런 수준까지 오른 걸까.

혀를 내두르는 부족장의 말에 나는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상황을 돌이켰다.

“다시 대련해 보면 알겠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나는 생각을 접고 무슈슈의 사체로 다가갔다.

나의 수준이야 빅터를 만나면 알게 될 터.

지금은 이 녀석의 부산물을 정리하고 슬슬 돌아가야 할 때였다.

슥슥―

날붙이가 통하지 않는다는 게 허튼 소린 아니었던 모양이다.

무슈슈 비늘은 확실히 단단했고, 칼날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죽은 비늘과 사정이 다를 터.

“다리 좀 잡아 봐.”

부족장과 술에게 사체를 넘긴 나는 가죽 아래에 칼집을 넣어 양손으로 움켜잡았다.

그러고는 이불을 털어 내듯 한 번에 놈의 가죽을 벗겨 냈다.

검은 살덩어리만 남은 무슈슈의 사체.

“먹을래?”

“그닥 안 당기는군.”

식욕을 감퇴시키는 검은 육질을 보며 술은 고개를 저었다.

괴식을 즐기는 녀석에게도 저건 아니다 싶은 모양이다.

“이제 돌아가 볼까.”

회색빛 비늘을 챙긴 나는 펜리르에 올라 알함브라로 향했다.

* * *

“자하르와 아는 사이셨군요. 저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작은 우연들이 겹쳐 인연이 됐지요. 사마르와의 악연이 이런 기연으로 이어지는군요.”

차분한 금발 남자의 대답에 카리프는 드물게 환한 표정을 지으며 반색했다.

그의 삶에 있어 유일한 은인이었던 남자.

이름조차 몰랐던 이 남자를 찾기 위해 얼마나 수소문했던가.

“아무튼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네. 저도 이제야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것 같습니다.”

환대에 답하는 로이드에게 카리프는 긴 한숨을 내쉬며 미소를 지었다.

배신으로 점철된 그의 인생에 찾아온 구원이자 마지막 기회.

로이드로 인해 카리프는 복수의 꿈을 향해 한걸음씩 나아갈 수 있었다.

세상에 남아 있는 유일한 인연이랄까.

“모든 것이 끝나는 날,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카리프는 맹세하듯 로이드에게 말했다.

“별말씀을 다 하시는군요. 저 역시 두 분 덕에 얻은 게 많습니다.”

하지만 로이드는 손사래를 치며 카리프에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곁에 있는 자하르를 바라보며 다시금 대화를 이어 갔다.

“오늘도 그러할 테지요. 그러니 서로 돕는다고 생각하시면 편할 듯합니다.”

“그럼요. 그렇고말고요. 뭐든 말씀만 하시지요. 저와 카리프 님이 아낌없이 돕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말씀만으로도 세상을 다 얻은 것 같군요. 든든합니다.”

인자한 표정으로 받아 주는 로이드.

훈훈한 이들의 대화는 무거운 주제로 이어졌다.

“브라함과 사라센이 본격적으로 붙는다지요?”

“네. 말씀하신대로 상황이 아주 재미있게 돼 가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지금이야 말로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기 좋은 상황입니다, 카리프 경.”

자하르의 말을 받은 로이드는 대화의 상대를 카리프로 바꿨다.

“빅터가 가만히 당하고 있을 위인이 아니지요. 이제 곧 브라함의 역공이 시작될 겁니다.”

“그럴 겁니다. 듣자하니 사라센의 기습이 실패한 모양이더군요.”

“맞습니다. 그러니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어차피 사마르는 제풀에 무너질 테니까요. 위험한 놈들은 브라함에 떠넘기시고 빈집이 된 사라센을 하나씩 거둬들이면 됩니다.”

그에 카리프는 문답을 멈추고 눈을 빛냈다.

자멸로 향해 가는 원수들의 모습에 흥이 돋기 때문이었다.

놈들이 죽을 자리를 찾아 서로 칼을 맞대고 있을 때 카리프는 느긋하게 녀석들의 관 뚜껑을 덮어 주면 된다.

그러니 즐거울 수밖에.

마지막 승자가 될 자신을 떠올리며 카리프는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하나 그것도 잠시일 뿐.

짜릿한 복수를 떠올리던 카리프의 눈에 낯익은 남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후작님. 안 그래도 계속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재상님께서도 함께 오셨군요.”

마론 후작이었다.

뒤를 따라 들어온 남자는 상견한 기억이 없는 초면. 남자는 자하르의 인사를 받으며 조용히 주점으로 들어왔다.

낯선 이들의 입장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연이어 들어온 노인 같은 남자는 커다란 나무 상자를 들고 로이드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말없이 상자를 내려 뚜껑을 활짝 열었다.

“에르텔이 틀림없군요.”

그에 로이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사마르에게 넘긴 것보다 훨씬 더 크고 강한 물건인 탓이었다.

이런 기물이 손에 들어올 줄이야.

“수고하셨습니다. 아주 훌륭한 녀석을 들고 오셨군요.”

순조롭게 흘러가던 로이드의 계획은 뜻하지 않았던 순풍을 만나게 되었다.

모든 게 완벽해진 더할 나위 없는 상황.

“이제 돌아가셔서 조용히 입 닫고 계시면 됩니다.”

로이드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마론 후작을 돌려보냈다.

* * *

알함브라에 도착한 이반은 도시 외곽으로 이어진 작은 산으로 향했다.

흩어진 부대원들이 모이는 집결지이자, 이후 도주로로 사용될 장소가 그곳에 있는 까닭이었다.

지형의 특성은 역시나 외길.

혹시 모를 적들의 추격에 대비해 이곳을 매복지로 사용할 예정이었다.

“부엉이가 수영을 하면?”

“첨부엉첨부엉.”

“후후… 먼 길 오느라 수고했다.”

술의 격려를 받은 병사는 썩은 표정을 지으며 집결지에 들어왔다.

저런 암호는 도대체 언제 만들어 둔 건지.

머리가 어질해지는 저 질문과 답은 겨울과 술이 만들어 병사들에게 전달한 암호였다.

첨부엉이라니.

“아재 개그라고 하죠. 후후…….”

겨울은 자기가 살던 곳의 언어유희를 우리에게 설파했다.

누군가는 기겁하고, 또 다른 이는 무릎을 쳤다.

취향의 문제란 것이다.

그중에도 유난히 좋아하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특히나 술은 연신 히죽거리며 문답을 주고받고 있었다.

“아재 개그가 무슨 말이야?”

“나이 든 사람들의 농담 같은 건데요. 유치하고 억지스러운 매력을 가지고 있죠.”

매력까진 모르겠고, 어떤 느낌인진 알겠다.

“첨부엉첨부엉!”

“크흑! 크핫핫!”

술이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말이다.

‘웃지 말자.’

하여 나는 애써 무표정을 유지했다. 녀석과 같은 감성이란 걸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저씨.”

“응?”

“솔직히 웃기잖아요.”

“…….”

제기랄.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아닌 척하고 있었을 뿐.

피식거리는 겨울의 시선을 무시하며 반복되는 첨부엉을 20번 넘게 지켜봐야 했다.

그리고 확실히 깨달았다.

‘저게 왜 웃긴 거지?!’

결국 나는 아재였던 것이다.

“후후, 좋은 시간이었다.”

만족한 표정의 술을 보자 자괴감마저 들기 시작했다.

하나 어쩌겠는가.

병사들의 절반이 죄다 같은 표정인 것을.

약간의 위로를 느끼며 집결한 병사들에게 이후의 계획을 설명했다.

작전 개시부터 종료까지 예상 시간은 20분.

그 안에 흑마법사 모두를 전멸시키고 이곳으로 돌아오는 것이 작전의 목표였다.

그에 따른 계획은 이랬다.

소수의 인원은 이곳에 남아 마법구를 매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한다.

이후 일부는 도시로 향하고, 나머지는 이곳을 통해 흑마탑 뒤편에 있는 산으로 이동한다.

그곳에서 대기하다가 시간에 맞춰 흑마탑으로 내려간다.

대략적인 계획을 설명한 나는 특정 팀을 지목하며 다음 설명을 이어 갔다.

“도시로 나간 팀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한 1차 저지선이 그들이기 때문이다.

“만일 흑마탑으로 향하는 군대를 발견했을 경우, 주변에 사건을 만들어 이동을 정체시킵니다.”

싸움이 아닌 방해.

흑마탑 점거에 들어간 인원들에게 대처할 수 있는 시간만 벌어 주면 되는 것이다.

“다른 질문 있습니까?”

임무 숙지를 확인한 나는 작전을 개시했다.

* * *

사라센의 수도와 하루 거리인 알함브라는 세련된 건축양식과 여유 있는 분위기가 특징인 적당한 크기의 중형 도시였다.

수도의 장점만 모아 둔 느낌이랄까.

대도시의 번잡함이 사라진 이곳은 문화와 예술이 빈자리를 대신해 오가는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흔하게 오고 가는 예술가들의 공연과 전시물들.

도시를 돌아다니던 이반의 부대원들은 해가 기울기 시작하자 하나둘 흑마탑 인근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이들의 역할은 척후병.

공연단과 구경꾼으로 변한 병사들은 다가올 변수를 사전에 차단하고 저지하는 역할을 맡았다.

현 상황에서 가장 큰 위협은 적의 군대이니까.

다행스럽게도 알함브라의 도시 계획은 제2흑마탑과 군부대의 위치를 정반대에 두고 건설했다.

덕분에 전 병력이 집결하는 건 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그나마도 차단하려는 것이 이들의 목표였다.

그런 그들이 선택한 것은 차력.

“끼요오오옷!”

유랑단에서 자랐다는 병사는 과거의 경험을 살려 약을 팔고 있었다.

정력제 같은 거 있잖나.

“자, 애들은 가고 고개 숙인 어른들만 보시라! 와이프 씻는 소리에 갑자기 잠이 오고, 사지가 부들부들 떨린다면 이 약 한번 잡숴 봐! 시도 때도 없이 불끈거려 움직이질 못해! 집안에 사랑과 우정이 싹트고 늦둥이가 생겨! 맨날 이혼하자던 마누라가 갑자기 사랑한다고 헛소릴 해!”

약장수로 변한 병사는 몰려드는 인파를 보며 천연덕스럽게 외쳤다.

정력제가 필요한 사람들이 이토록 많을 줄이야.

사람이 사람을 모으는 현상이 지속되며, 흑마탑으로 향하는 길가엔 깔깔대는 인파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때마침 곁을 지나가는 순찰대.

“아니, 이게 누구신가! 그 이름도 자랑스러운 알함브라의 순찰대원 아니십니까! 이리 오십시오! 수고하시는 당신들에게 내 긴히 드릴 선물이 있소!”

약장수로 위장한 병사는 큰소리로 외치며 가던 그들의 걸음을 붙잡았다.

“여러분 주목! 우리가 이 약을 먹고 뜨거운 밤을 보낼 수 있는 건, 불철주야 시민의 안전을 책임져 도시를 지켜 주시는 주둔 병사 분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그들의 노고를 그냥 바라보기만 하겠습니까! 3초간 힘찬 박수와 함성으로 우리의 성의를 보입시다!”

사람들은 홀린 듯 박수를 치며 소리를 질렀고, 그에 순찰대는 흑마탑으로 향하던 걸음을 멈춰 세웠다.

“순찰대 여러분 이리 오십시오! 본래 한 병에 20실버씩 받는 약이지만,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공짜로 드리겠습니다!”

“허허! 새파란 친구들에게 그걸 먹였다가 뒷감당은 어쩌시려는 게요!”

“이거 오늘 홍등가가 시끌벅적하겠구먼!”

크게 외치는 약장수를 따라 군중 속에 있던 병사가 바람을 잡았다.

“흠, 지금은 근무 중이라…….”

“잠깐이면 되니 받아 가세요! 날이면 날마다 오는 약이 아닙니다! 군인 양반처럼 젊은 친구가 먹으면 아침까지 그냥 막! 내 얘기 뭔말인지 알죠?! 내가 군인들에게 신세진 게 많아서 이러는 겁니다. 어서 와 받아 가세요!”

뭉그적거리던 순찰대는 마지못한 척 다가왔다.

작전이 시작된 지 10분.

시간을 확인한 병사는 순찰대에게 약을 건네며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몰려든 시민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한목소리로 따라하기 시작하는 사람들.

머리를 긁적이던 순찰대원들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한입에 약을 삼켰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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