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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99개-152화 (152/203)

152화

산샤크.

한때 파사테라고 불렸던 고대 왕국의 수도는 은둔자의 협곡 끝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조각이라고 해야 하나.

보이는 도시 건물 전체가 절벽을 깎아 만든 공예품이었다.

건축물인데 건축한 것이 아닌.

모든 건물이 절벽과 이어진 이 도시는 공동체라는 이름에 걸맞는 완벽한 하나의 덩어리였다.

“이렇게 만드는 게 더 어려웠을 것 같은데.”

독특한 이들의 건축양식은 중심으로 들어갈수록 더욱 정교했다.

감탄이 더욱 짙어질 수밖에.

간간히 보이는 야생동물들을 뒤로한 채 우리는 목적지인 작은 건물에 도착했다.

아니, 땅굴이 맞는 건가?

하여간 천칭이 조각된 건물 앞에 선 나는 삭아 버린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인적 끊긴 건물 특유의 냄새.

인공의 향이 사라진 내부에는 쿰쿰한 흙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겉보기엔 작은데 들어오니 크네요.”

내부를 둘러본 겨울은 신기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겉과 속이 이렇게 다르다니.

외부에서 가늠했던 실내의 모습은 이토록 긴 복도와 넓은 공동을 예상하지 못했다.

하기야 계속 파고들어 가면 건물이 커지니 겉으론 확인할 방법이 없을 터.

확장성 하나는 가히 최고라 할 수 있었다.

“딱히 눈에 띄는 게 없군.”

뒤따라 들어온 부족장은 감흥 없는 말투로 소감을 전했다.

달리 보탤 말도 없었다.

보이는 건 그저 빈 공간뿐이었으니까.

그나마 특별한 것이 있다면 벽에 붙어 있는 모자이크 정도?

“바깥에 있던 천칭과 똑같이 생겼군.”

역시나 눈 좋은 술이 먼저 알아보고 복도 끝으로 향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다가선 벽 주변엔 아무것도 없었고, 시선이 갈만한 곳이라곤 두 개의 원형 바닥과 뿔 없는 소의 머리가 조각된 벽이었다.

“이 바닥이 수상한데.”

진중한 표정을 지은 술은 시선을 내려 바닥을 응시했다.

네모난 바닥재 사이로 보이는 유별난 무늬.

타일 조각으로 모자이크된 천칭 그림 아래로 둥근 바닥이 마주 보고 있었다.

실체화된 천칭이랄까.

벽에 그려진 천칭 바닥이 그곳으로 이어진 것 같았다.

그러나 특이점은 거기까지.

뭔가 이어질 것 같았던 모자이크와 바닥은 별다른 변화를 드러내지 않았다.

“아저씨, 저 좀 들어주세요.”

덧없는 고민 중인 나에게 겨울은 까닭 모를 부탁을 했다.

눈높이를 올린다고 달라질 풍경이 없을 텐데…….

뾰족한 해법이 없던 나는 겨울을 들어 어깨 위에 올렸다.

“벽으로 가 주세요. 천칭 중앙으로요.”

그러고는 녀석이 가리키는 곳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높아진 겨울의 시선이 마주한 것은 뿔 없는 소머리 조각상.

“좀 더 가까이요.”

이어진 겨울의 부탁에 나는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러자 겨울은 손을 뻗어 조각상의 어딘가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소의 귀와 정수리의 중간쯤일까?

작은 손가락을 바삐 움직이던 겨울은 기어코 둥근 타일을 뜯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럴 줄 알았지.”

그에 겨울은 가방을 열어 낯익은 물건을 꺼내 들었다.

“뿔?”

“맞아요. 수드라 지하에서 싸웠던 그 소의 뿔이에요.”

질문에 대답한 겨울은 천칭 가운데 조각된 소머리에 뿔을 끼워 넣었다.

딸각!

저게 왜 저렇게 잘 들어맞는 건지.

소뿔을 챙겼던 이유는 그저 놀라운 강도 때문이었다.

한데 이런 용도로 사용될 줄이야.

“어드벤처 게임 유저라면 이 정도는 기본이죠.”

신전 지하를 나올 때와 같은 말을 하며 겨울은 나머지 뿔도 끼워 넣었다.

딸각!

드르르르르르―

“아이쿠!”

그 순간 술은 갑자기 올라온 바닥에 걸려 꼴사납게 넘어졌다.

마력의 샘에서 보았던 그 모습처럼 말이다.

움직이는 바닥과 인연이라도 있는 건지, 녀석은 둥근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을 문질렀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원형 바닥을 벗어났다.

조금 더 올라가는 바닥.

하나 나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반대쪽에 있던 둥그런 바닥이었다.

‘분명히 내려갔지?’

술이 넘어져 있을 때만 해도 다른 원형 바닥은 좀 더 높이 올라가 있었다.

그것이 뜻하는 게 무엇이겠나.

“이거 양쪽 무게를 맞추라는 것 같은데.”

나는 높낮이가 다른 원형 바닥을 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여 우리는 양쪽으로 나뉘어 무게 중심을 맞추기 시작했다.

부족장과 테오, 그리고 별.

술과 테오와 나.

그것도 안 돼 나와 부족장이 자리하고 별이 따라 들어왔다.

결론은 모두다 실패.

혹시나 싶은 마음에 두 여자와 내가 올라가자, 놀랍게도 저울은 완벽하게 균형을 맞추었다.

“범인은 별이었군.”

“남자 셋이 합친 무게와 똑같다니.”

그에 술과 부족장은 별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닥쳐라. 네놈들이 부실한 거다. 그러고도 남자라고 할 수 있는가!”

발끈한 별이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고, 그에 술은 벌게진 얼굴로 반격에 나섰다.

“웃기지 마라! 네놈의 가슴이 필요 이상으로 크게 자란 거다.”

“하찮은 놈! 그래서 네 녀석이 인기가 없는 것이다. 이반의 반이라도 닮아라. 그러면 축제 때 혼자 잠들진 않을 테니까!”

“우습군. 너처럼 겉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니 뭘 알겠나. 위대한 반투족의 남자를 저런 덩치만 큰 녀석과 비교하지 마라. 남자의 크기는 신장이 아닌 다른 곳으로 승부하는 것이다!”

어이없는 술의 말에 나와 별은 동시에 소리쳤다.

“새끼손가락 주제에.”

“건방진 놈!”

전자는 별이었고, 후자는 나였다.

감히 내 앞에서 크기를 논하다니. 당장 뛰어 내려가 서열 정리를 하고 싶었지만, 어린 소녀가 있는 관계로 참았다.

“저는 신경 안 씁니다, 별님!”

그 틈을 타 추파를 날리는 테오.

“쭉 신경 쓰지 마라. 내 스타일 아니니까.”

돌아온 별의 대답에 녀석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여야 했다.

“어른들의 싸움은 야하군요.”

지켜보던 겨울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다 알겠다는 저 표정이라니.

하기야 생긴 게 아이 같아서 그렇지 나이는 17살이 아니던가.

“다들 시끄러! 내 해머랑 별이 들고 있는 대검 때문이잖아.”

으르렁대는 둘을 갈라내며 나는 소머리를 바라봤다.

튀어나온 머리통이 아래로 내려가는 걸 봤기 때문이다.

드르르르르르―

내려오던 소머리가 움직임을 멈추자, 우리가 서 있던 원형 바닥이 하강을 시작했다.

철컹!

둔중한 소리와 함께 벌어지는 소의 주둥이.

둥그런 바닥을 벗어난 나는 소머리로 다가가 벌어진 입에 손을 넣었다.

“천칭?”

안에서 꺼낸 물건은 모자이크 모양과 같은 천칭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사용하기엔 너무나 작았고, 작동하지 않도록 고정되어 사용할 방법도 없었다.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질문한 겨울을 비롯해 모두의 얼굴에 의문이 가득했다.

그냥 주웠다면 모를까.

이런 기관 장치를 통해 얻은 물건이니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필시 사용처가 있을 터인데.

― 인과율의 추가 기울었다.

마력의 샘에서 보았던 환영 속의 대화가 계속해서 입안에 맴돌았다.

천사와 악마가 올라탄 저울.

이 천칭이 의미하는 것은 ‘인과율의 추’이며, 그것은 신들이 정했다는 영원한 맹약임이 분명했다.

이 땅의 주인을 가리켜 금역의 수호자라 칭한 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을 터.

사라진 아호멧 왕조는 인간계와 마계 사이에서 큰 역할을 담당했을지도 모르겠다.

바다를 건너와 이세계인을 소환한 현자처럼 말이다.

“아무튼 특별한 물건인 건 확실한 것 같네요. 아직 반나절 정도 여유 있으니 다른 곳도 간단히 살펴보고 돌아가요.”

천칭 건물을 나온 우리는 왕궁으로 들어가 이곳저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소박한 느낌이려나.

생각보다 작은 규모의 왕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밑천을 드러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렇게 버려진 게 100년 전이니 뭐가 남아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다.

몬스터가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일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평화마저도 신전에 들어선 순간 헛되이 사라졌다.

“저게 뭐야.”

우리를 맞이하고 있는 건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수였다.

전체적인 생김새는 네발짐승.

그러나 비늘로 덮인 몸통에 뾰족한 머리가 달려 있으며, 벌어진 입에서는 갈라진 혀가 튀어나와 있다.

이 무슨 끔찍한 혼종인 건지.

펜리르의 몸에 비늘을 두르면 딱 저런 모습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정체모를 몬스터의 등장에 모두가 할 말을 잃던 그때.

“무슈슈…….”

기괴한 놈의 모습을 바라보며 겨울이 낮게 중얼거렸다.

“뭐 하슈?”

“뭐 하긴 뭘 뭐해요. 무슈슈요. 산샤크를 수호하던 신이 키우던 신수에요.”

면박으로 시작된 겨울의 설명은 급기야 신수라는 걸로 마무리되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황궁 도서관에서 봤어요. 산샤크 지명 찾았을 때요.”

말하는 분위기를 보아하니 덧없는 소린 아니었다.

놈의 신체적 특징도 명확하잖은가.

겨울이 읽은 내용이 무엇인지 몰라도 상식적인 표현이었다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비늘에 쌓인 네발짐승.

열 글자도 채 안 되지만 그걸로 설명은 충분할 테니까.

“아참, 칼은 소용없다고 했어요.”

“왜?”

“마루 머시기라는 신이 축복을 해 줘서 비늘을 베어 낼 수 없대요.”

이어진 추가 설명에 나는 시큰둥하게 고갤 끄덕였다.

관계없는 얘기니까.

“줘패는 건 상관없잖아?”

어차피 나는 날붙이를 쓰지 않는다.

따라서 내가 관심 있는 건 녀석의 껍데기일 뿐.

새로운 방어구 재료의 등장에 나는 눈을 빛내며 앞으로 나섰다.

놈과의 거리는 열 발자국 내외.

간격을 가늠한 나는 녀석의 반응을 지켜보기로 했다.

뭐가 됐건 받아쳐 주면 될 터.

원기를 활성화시켜 금빛의 테두리를 만들어 냈다.

느릿하게 움직이며 고개를 비트는 무슈슈.

손에 쥔 해머에 원기를 실으며 놈의 다리에 집중했다.

도약을 위한 사전 동작이 잡히는 순간, 나의 해머는 놈의 뾰족한 주둥이를 박살 내 버릴 것이다.

하지만 놈의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고.

슈아아아아악―

난데없이 늘어난 모가지가 내 얼굴을 향해 들이닥쳤다.

환술 같은 건가?

갑작스레 좁아지는 놈과의 간격에 나는 반격할 틈을 놓친 채 급하게 해머를 들어 올렸다.

콰득―

섬뜩하게 들려오는 녀석의 입질 소리.

믿기지 않는 무슈슈의 선공에 초반 기세를 완전히 빼앗기고 말았다.

원기가 생긴 이후 첫 출전인데 말이다.

“깜짝 놀랐네.”

되돌아가는 놈의 머리를 보며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예상치 못한 공격 수단에 휘둘린 탓이다. 한데 너무 여유부리는 것 아닌가?

공격 직후 그렇게 늦게 돌아가는 걸 가만 놔둘 리가 없잖은가.

파밧―

느긋하게 움직이는 놈의 대가리를 향해 직선으로 달려 나갔다.

한데 이건 또 왜 이러는 건지.

“젠장!”

원기로 가득 찬 나의 몸은 폭발하듯 튀어 나가 통제를 잃어 버렸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움직임.

무슈슈의 머리를 노렸건만, 나의 두 발은 놈을 지나치고 말았다.

치켜든 해머를 휘두를 틈조차 놓쳐 버린 것이다.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니 지켜보는 사람이야 말해 뭐 하겠는가.

“엥?”

들려오는 맹한 소리를 무시하며 나는 그대로 달려 나갔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다리라도 때려 부숴야 할 것 아니겠나.

말뚝처럼 서 있는 놈의 앞무릎을 향해 금빛 해머를 내질렀다.

하나 가볍게 뛰어 피하는 녀석.

뭘 보고 피했는지 몰라도 나의 공격은 허공을 가로질렀다.

그렇다고 방심하면 쓰나.

놈의 머리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순간, 한 번 더 튀어 나간 나의 두 다리는 녀석의 코앞으로 나를 데려다주었다.

놈의 정체가 진짜 신수인지는 모르겠지만.

“뒈졌어…….”

금빛을 두른 나의 해머는 녀석의 뾰족한 주둥이를 향해 사납게 들이쳤다.

이어서 들려오는 말도 안 되는 굉음.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거짓말처럼 날아간 놈의 몸뚱어리가 신전 벽을 때려 부수며 처참히 처박혔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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