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원기라는 새로운 힘은 이미 만들어진 길을 따라 몸 안 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마른 땅에 물이 스며드는 느낌이랄까.
마나보다 무거운 이 기운은 차분한 흐름을 가진 녀석이었다.
하지만 사용을 위해 어딘가를 거칠 필요도 없고, 성질을 변화시킬 이유도 없다.
그저 존재하는 자체로 최종형인 기운.
시스템은 원기에 대해 이렇게 정의하고 있었다.
[원기 : 레벨 1]
사용자의 활동 전반에 걸쳐 작용하는 고유 에너지.
숙련도에 따라 보유량과 출력이 증가한다.
요컨대 오러나 투기에 상응한다는 얘기가 아니겠나.
자세를 바로 한 나는 곳곳에 스며든 원기를 순환시켜 마나를 다루듯 제어했다.
그런 나의 선택은 정확했고, 행위에 대한 반응은 즉각적으로 일어났다.
“와, 금색… 일단 분위기에서 먹고 들어가네요.”
아예 다른 형태로.
체외로 표현된 원기의 색상은 관념처럼 남아 있던 오러의 잔재를 말끔하게 지워 버렸다.
푸른색이라는 고정관념을 날려 버린 밝은 금색.
파괴를 위한 기운의 색으론 너무 고급스러운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종교적인 느낌 있잖은가.
성스러운 그런 거.
“성자 이반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군.”
실제로 별은 종교 단체에 나온 사람 같다고 말했다.
로브만 걸치면 말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따로 남아 있었다.
체내의 기운을 외부로 돌리는 것.
“이건 좀 어렵네.”
다시 말해, 무기에 원기를 담는 일이었다.
결과는 계속된 실패.
혼자 머릴 싸매던 나는 결국 테오에게 도움을 청했다.
“글쎄요. 마법은 술식을 통해 마력을 방출하지만, 오러는 보다 직관적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도 모르겠다.
체계적인 수련을 거치지 않았으니 테오의 설명을 들었다 한들 전혀 연상되지 않았다.
“제가 듣기로는 짜내는 느낌이라고 하던데…….”
어쩐지 저렴한 분위기의 힌트였으나 내용은 이해하기 쉽게 다가왔다.
짜낸다.
아직은 몽글몽글한 느낌이지만, 실마리를 잡은 건 확실한 것 같았다.
해머를 쥔 손잡이 위로 얇은 금빛이 오르내리고 있으니까.
일행들의 관심과 도움을 한 몸에 받으며 원기 방출 수련은 계속 되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됐다!”
금빛에 휘감긴 해머를 보며 겨울은 박수와 함께 폴짝거렸다.
빅터처럼 예리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모두의 기대를 받기엔 부족하지 않았다.
나는 정면에 놓인 집체만 한 바위를 겨냥했고.
“가즈아!”
겨울의 기합과 함께 움켜쥔 해머를 휘둘렀다.
쿠아아아아아아아앙!
뒤를 이어 들리는 요란한 소리.
심장을 치는 굉음과 함께 눈앞에 있던 거대한 바위가 폭발하며 날아갔다.
깊게 패어 버린 일격의 흔적은 덤.
“아저씨도 되네요…….”
넋이 나간 겨울을 시작으로 반투족의 탄성이 뒤를 이었다.
“이런 게 한두 시간 수련으로 되는 건가?!”
“사람이길 포기했군.”
혀를 내두르던 부족장과 술은 사라진 바위로 다가가 부서진 잔해를 들어 올렸다.
캉―
그러고는 도끼를 휘둘러 조각난 바위를 내리쳤다.
“흠, 그대가 특별한 걸로 하지.”
멀쩡한 돌덩일 보며 술은 미련 없이 고갤 끄덕였다.
하지만 내 귀엔 들리지 않았다.
이 순간이 오기를 얼마나 꿈꿔 왔던가!
“아저씨 울어요?”
나는 솟구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과 콧물을 줄줄 흘렸다.
* * *
찔찔이.
훌쩍이.
감격에 겨워 흥분한 대가는 얄궂은 별명으로 돌아왔다.
그런들 어떠하랴.
나도 이제 빅터처럼 검기를 펑펑 쏘아 댈 수 있는데.
“보오오온― 크래셔!”
사방으로 날리는 바위를 보며 헤벌쭉 입꼬리를 잡아당겼다.
이름뿐이던 기술이 드디어 제대로 된 모습을 갖췄기 때문이다.
“이제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군. 이러다 사라센 놈들에게 걸릴지도 모르겠다.”
흥분한 나를 향해 부족장은 걱정스럽게 말을 건넸다.
“쯧쯧… 아직까지 안 걸린 게 신기하지. 저게 제정신 박힌 사람이 할 짓인가?”
부족장의 말을 이어받은 술은 툴툴거리며 혀를 찼다.
그에 나의 시선은 지나온 발자취를 살피기 시작했다.
일직선을 뚫려 있는 바위 언덕길.
난장판이 된 모습들을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걸 다 내가 했다고?”
“그럼 우리가 했겠나. 몽유병 환자처럼 밤새 난리친 걸 벌써 잊었단 말인가!”
고개를 돌린 술은 미친놈을 보듯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말 어지간히 좋았나 보다.
뭘 했는지 잊을 만큼 날뛴 걸 보니 말이다.
“그나저나 계획보다 하루 반이 빠른데, 이대로 가도 상관없는 건가.”
술을 지나쳐 온 별은 시간을 살피며 일정을 확인했다.
“아, 그래. 예상보다 빨리 도착하긴 했지.”
목적지까진 이제 하루 반.
먼저 가는 건 상관없으나 하루 이상을 기다리는 게 문제였다.
미리 모습을 드러내 좋을 게 없잖은가.
최대한 약속 시간에 맞춰 나타나는 게 불필요한 문제를 최소화할 수 있을 터였다.
“이쪽에서 하루를 더 머물다 넘어갈까?”
“뭐 하러 시간을 버려요. 왕의 대로가 이 근처잖아요. 하루 반 일정이면 은둔자의 협곡도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은데 거기나 다녀오죠.”
일정을 늦추자는 나의 말에 겨울은 더욱 바쁜 일정을 제안했다.
슐타나 나크시딜의 마지막 활동 지역이자 아호멧 왕조의 옛 수도.
금역의 수호자였던 그들의 땅 역시 모험의 냄새가 폴폴 풍기는 곳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 오기도 쉽지 않잖아요.”
전쟁 중에 쉽게 오갈 수 없는 건 당연한 얘기니까.
어차피 여유로 생긴 시간이니, 알차게 쓰자는 겨울의 말도 나쁘지 않은 선택지였다.
“좋아. 그럼 산샤크로 가 보자고.”
하여 우리는 목적지를 잠시 변경했다.
* * *
“그게 무슨 말입니까? 에르텔이 사라졌다니요. 대관절 왕실의 금고를 누가 손댄단 말입니까?”
“플린츠 재상과 금고 책임자인 바슈롬 백작이 결탁한 모양입니다.”
눈을 키우며 반문하는 반크스에게 궁내성 주류관인 앙리 후작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아니, 왜요? 그걸 가져가서 무얼 하겠다고… 애초에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있습니까?”
“글쎄요. 지금으로선 목적과 동기가 명확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의아해하는 반크스에게 앙리 후작이 해 줄 수 있는 말은 고작 이 정도였다.
이반과 로제가 구해 카슈타르 가문의 이름으로 기증된 기물.
부족한 국력을 메우기 위한 귀중한 보물이 왕국의 2인자와 금고 책임자에게 어이없이 도난당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사건의 내용 자체도 그러하지만 이유를 유추할 수 없다는 것이 더욱 큰 문제였다.
향후 어떤 일로 이어질지 가늠할 방법이 없는 까닭이었다.
“다른 나라에 매각할 생각일까요?”
“아무래도 그것이 가장 유력한 이유겠지요. 왕도 귀족인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의견을 묻는 반크스의 말에 앙리 후작은 근심 어린 표정으로 답했다.
바꿔 말하자면 에르텔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건 없다는 얘기였다.
휘하에 마법사가 없다면 그저 커다란 돌조각에 불과할 뿐, 사병을 소유할 수 없는 플린츠 재상과 바슈롬 백작에겐 그림의 떡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왜…….
무슨 이유로 왕국의 보물을 훔쳤단 말인가.
생각을 거듭할수록 사건의 행방은 더욱 묘연하게만 느껴졌다.
“혹시 사라센으로 팔아넘기려는 걸까요?”
“현재로서는 그곳이 가장 의심스럽지요. 마침 전쟁까지 시작됐으니까요.”
문답을 주고받은 반크스와 앙리였지만, 그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얼마나 대단한 대가를 받았기에 왕국을 배신한 걸까.
재력과 지휘라면 지금도 충분히 남부럽지 않은 이들이었다.
그래서 더욱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동기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국왕님께 가 봐야겠습니다.”
“조금 전까지 제가 모시다 나왔습니다. 진노하시며 자리를 물리셨으니 부르실 때까지 기다리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앙리 후작의 말에 반크스는 일어서다 말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표현하기 힘든 배신감과 상실감.
똑똑―
반크스는 심란한 마음을 감추며 노크 소리에 반응했다.
“들어오시게.”
문을 열고 들어온 병사는 한 장의 서신을 내밀며 돌아 나갔다.
반크스의 손이 정체불명의 인장을 뜯어냈다.
그러고는 속에 든 편지를 꺼내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마론 후작의 역모에 대해 알려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뜬금없이 거대한 편지의 전문에 반크스는 잠시 읽는 걸 멈추었다.
역모라니.
벌어진 일의 향방조차 갈피를 못 잡고 있는데 이건 또 무슨 얘기란 말인가.
[왕실 중심 구도에 반기를 든 페이소스 가문은 오래전부터 반역을 준비해 왔습니다.
소위 강화 인간이라는 존재였죠. 그들은 그것으로 혁명을 일으키려 했습니다…….]
투서의 내용이 드러날수록 반크스의 얼굴은 점차 흙빛으로 변해 가기 시작했다.
이반을 통해 알게 된 이후 최근 들어 흔적이 사라진 이들.
쾅!
그들의 목표가 반역이라는 사실에 반크스는 테이블을 내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사이 강화 인간을 사들였다니.’
단서를 놓친 무력감과 마론에 대한 분노가 정신없이 교차하며 반크스를 괴롭혔다.
심지어 편지의 마지막엔 마론 후작의 아들 노이마저 강화 인간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었다.
의심만으로 흘려들을 수 없는 중차대한 사안.
반크스는 선 조치, 후 보고의 절차를 따르기로 했다.
“먼저 일어서겠습니다.”
서신을 내려놓은 반크스는 냉기를 흩뿌리며 집무실을 나섰다.
* * *
왕의 대로는 생각보다 가까웠다.
그곳을 통해 이어지는 은둔자의 협곡 또한 마찬가지로, 길이 끊겼다는 걸 제외하면 거리 자체는 멀지 않았다.
갑자기 환경이 바뀌었다고 해야 하나.
“왜 은둔자의 협곡인지 알겠네요.”
산샤크로 향하는 이곳의 지형은 황무지에서 정글로 갑자기 모습을 바꾸었다.
흡사 대수림을 보는 것 같은 기분.
길 같지 않은 길을 바라보며 겨울은 푸념하듯 소감을 전했다.
하지만 길은 문제되지 않았다.
탁탁탁―
펜리르와 풍 형제는 그저 그런 탈것이 아니었고, 그 위에 타고 있는 사람들 역시 평범한 인간들이 아니었다.
“여긴 바위가 무너져서 길이 완전히 막혔…….”
콰아아아아앙!
“아, 이곳은 나무가…….”
콰지직―
발 닿는 모든 곳을 길로 바꾸며 나와 펜리르는 은둔자의 협곡을 지나갔다.
그렇게 닥치는 대로 전진하길 수 시간.
“제대로 찾아온 것 같군.”
내 곁에선 부족장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잊혀진 도시를 바라보았다.
본격적인 탐험은 이제부터였다.
이 많은 건물 중에 어디를 먼저 털기 시작할 것인가.
“아무래도 신전이 아닐까요?”
“내 생각도 그렇다.”
“어쩌면 슐타나 나크시딜의 집일 수도 있지.”
“그걸 어떻게 찾아요?”
“아니면 왕궁일 수도 있다.”
“음, 왕궁일 가능성도 높겠네요.”
일행들은 얼굴을 찡그리며 단서가 있을 곳을 추려 냈다.
느긋하게 하나씩 뒤지고 다닐 상황은 아니니까.
우선은 가장 크고 상징성이 있는 대신전을 먼저 확인해 보기로 했다.
그 다음은 왕궁.
이후론 인근의 거대한 건축물 위주로 탐색의 범위를 넓히기로 했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의견을 일축하며 낮은 건물을 가리켰다.
“저기가 우리의 목적지 같네.”
“근거는?”
그에 지켜보던 별이 되물었고.
“건물 지붕에 있는 조각상.”
나는 손을 뻗어 건물 위를 가리켰다.
커다란 천칭 위에 올라탄 천사와 악마의 모습.
“저건 ‘인과율의 추’야.”
마력의 샘에서 본 환영과 수드라 신전 지하 벽화를 떠올리며 나는 막연하게 확신을 드러냈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