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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99개-149화 (149/203)

149화

모두가 떠나 텅 비어 버린 벌목장 마을 바통.

스산한 거리 한쪽에 자리한 낡은 건물 안에서 반가운 표정을 한 두 남자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나눴다.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로이드 님.”

먼저 인사를 건넨 사람은 비쩍 마른 몰골의 후리후리한 남자였다.

그리고 그는 마주한 남자를 보며 로이드라고 불렀다.

“그러게 말입니다. 사실 이곳으로 오면서 얼굴을 잊었을까 걱정했습니다.”

“어찌 제가 로이드 님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저에게 이런 기회를 만들어 주신 은혜,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남자는 살갑게 답하는 로이드에게 고개를 숙여 정중히 예를 갖췄다.

가식 없이 흘러나오는 존경과 감사의 모습.

“은혜랄 게 있나요. 모든 게 다 자하르 님이 노력하신 결과입니다.”

로이드의 입을 통해 나온 남자의 이름은 다름 아닌 자하르였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세상이 어디 노력만으로 되는 겁니까. 노력의 가치가 얼마나 허망하고 보잘것없는지는 사마르만 봐도 잘 알 수 있지요. 인간은 누구나 열심히 살고 보람을 얻길 바랍니다만, 안타깝게도 보상은 내가 아닌 타인을 통해 돌아온다는 것이 함정입니다. 저는 그 함정에 아주 제대로 빠졌었지요. 그런 저를 구해 주신 것이 바로 로이드 님이 아닙니까. 그러니 저는 은혜를 입은 게 맞고, 따라서 로이드 님은 저의 은인이 되시는 겁니다.”

한때 주점이었을 이 좁은 건물내부는 뽀얗게 내려앉은 먼지만 남아 시간의 흐름을 전하고 있었다.

이렇게 버려진 지 수년쯤 됐을까.

같은 처지였던 자하르가 로이드를 만난 시기도 대충 이곳과 비슷할 터였다.

거듭된 연구 실패로 사마르의 눈 밖에 나던 그때.

갈 곳을 잃은 자하르에게 연구의 실마리를 준 사람이 바로 로이드였다.

* * *

수년 전 어느 날.

이곳과 비슷한 작은 주점에서, 로이드는 술 취한 자하르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인간이 강한 이유는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이거늘… 섭리에 반하는 곳으로 향하니 일이 풀리지 않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고는 세상을 관조하듯 무심이 읊조렸다.

“제가 무슨 일을 하는 줄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글쎄요. 함께 일하는 사람은 잘 알고 있습니다.”

퉁명스런 자하르의 반문에 로이드는 느긋하게 대답했다.

그것이 둘의 첫 만남이었고, 자하르는 소문으로 접했던 로이드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브라함 흑마탑의 수장이자 사마르의 협력자.

우연히 마주친 로이드는 자하르의 연구에 조언을 시작했다.

인간의 이성을 없애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질문으로 시작된 로이드의 조언은 실패할 수밖에 없던 이유로 이성의 말살을 꼽았다.

“강해지기 위해 무언가 포기해야 하는 것부터가 잘못된 전제입니다. 하물며 그것이 ‘생각’이라면 시작부터가 잘못된 것이죠. 그것은 당신들이 알고 있는 마인과 다를 바 없지 않습니까?”

자하르는 강화 인간을 연구했지만 결과적으론 마인을 만들고 있던 것이었다.

그것도 진짜가 아닌 열등한 종으로.

“진짜 마인을 본 적 있습니까?”

이어진 로이드의 말에 자하르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마인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진짜라는 말을 붙이니 말문이 막힌 탓이다.

“마족과 인간이 뒤섞인 것이 진짜 마인입니다.”

그런 자하르에게 로이드는 마인에 대한 올바른 정의를 내려 주었다.

인간의 모습에 마기가 흐르는 사람들.

로이드가 말한 마인은 인간과 똑같이 행동하고 생각하며, 감정을 공유하는 지적 생명체였다.

그저 마기를 사용한다는 것이 다를 뿐.

“당신들이 알고 있는 건 마인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언데드 같은 모습은, 마인이 아닌 마물이었다.

“그럴 수가…….”

“당신과 사마르는 잘못된 길을 찾고 있던 것이지요.”

자하르가 연구하던 강화 인간도 결국은 인간을 강하게 만들어 마물을 만드는 것에 불과했다.

그 실수를 바로잡아 준 것이 로이드였고, 그를 통해 만나게 된 것이 카리프라는 남자였다.

* * *

“문득 떠오르곤 합니다만, 도대체 카리프는 어떻게 만나신 겁니까?”

생각하면 할수록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디서 그런 완벽한 실험체를 찾아냈을까.

“적당한 오지랖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군요. 이것저것 관심이 많다 보니 그리됐습니다.”

복수를 향한 카리프의 집념과 자하르의 집착은 사마르가 모르는 사이 커다란 결실을 맺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뒤에는.

“로이드 님의 혜안은 짐작조차 할 수 없군요.”

“그런 것 없습니다. 그저 주어진 대로 열심히 살아가는 것뿐이지요.”

말없이 상황을 만들어 온 로이드가 있었다.

“한데 카리프에겐 왜 설명해 주지 않으셨습니까?”

“본래 인간이란 쉽게 얻는 것에 감사하지 않는 법이니까요. 그가 받은 고통의 크기가 그의 집념을 키운 것입니다.”

해명을 듣는 자하르의 눈에 감탄과 경외가 서렸다.

구전처럼 떠돌던 현자를 마주한 느낌이랄까.

로이드가 소개한 카리프는 고통의 시간을 감내하며 완전한 강화 인간으로 거듭났다.

이성이 말살된 가짜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로.

이렇듯 로이드가 예견한 미래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착실하게 구현되고 있었다.

사마르의 강화 인간 제작이 선을 넘을 것이라는 예측과 이어질 전쟁까지.

심지어 로이드는 아리안에 있는 욕망 덩어리마저 자하르에게 알려 주었다.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마론 데 페이소스.

로이드의 조언으로 알게 된 마론 후작은 진짜 강화 인간 계획에 아낌없는 후원을 약속했다.

그리고 오늘.

“마론 후작은 언제 온답니까?”

“이제 도착할 때가 됐습니다. 안 그래도 로이드 님을 무척 만나고 싶어… 아, 마침 들어오는군요.”

로이드와 자하르에게 엄청난 선물을 안겨 주려 이곳에 나타났다.

다가올 암울한 미래는 생각도 못한 채 말이다.

“저희가 늦었습니다.”

적당히 예를 표한 마론 후작의 뒤로 퉁퉁히 살이 오른 남자와 의심 많게 생긴 노인네가 따라 들어왔다.

“이분은 재상이신 플린츠 공이시고, 그 곁에는 왕실 금고 담당인 바슈롬 백작입니다.”

마론의 소개와 함께 퉁퉁한 남자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재상이라고 소개 받은 플린츠 후작이다.

나름 왕국의 2인자가 아니던가.

마법사 나부랭이들과의 인사는 그 정도면 충분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로이드도 마찬가지였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듣자하니 귀국에 에르텔이 있다던데… 제가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겁니까?”

형식적인 안부를 던진 로이드는 지체 없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재상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크흠, 맞소.”

그에 마론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군요. 그러면 이 손을 한번 보시지요.”

마론 후작의 대답을 들은 로이드는 미소를 지으며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반대쪽 손까지.

“뭐가 보입니까.”

양손을 들어 올린 로이드는 느긋한 표정으로 마주한 세 사람에게 물었다.

“흠, 그야 당연히 손바닥 아니겠소. 달리… 허허, 이건 에르텔 아니오?!”

“네. 세 분께서는 그것을 저에게 가져오시면 됩니다.”

떠오르는 환영을 발견한 세 사람을 향해 로이드는 친절한 설명을 더했다.

순간 탁해지는 세 남자의 눈동자.

“이 사실을 입 밖에 내시면 세 분의 머리는 폭죽처럼 터지게 될 겁니다.”

제 모습으로 돌아온 세 남자는 말없이 일어나 주점의 문을 걸어 나갔다.

* * *

닭장 속에는 닭이 산다.

그리고 외양간에는 보통 소가 살고 있다.

그렇다면 마구간에는 뭐가 살고 있을까.

“당나귀만 한 돼지라니.”

아케른 성의 마구간엔 말 대신 멧돼지가 살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고 있는 몬스터 멧돼지가.

“이 녀석들 이름은 뭐야?”

그런 신통한 놈들을 보며 나는 술에게 이름을 물었다.

“이 녀석은 태풍이고, 저 녀석은 폭풍이다. 그리고 저 뒤에 있는 놈이 돌풍, 그 옆에 있는 녀석은 광풍이지.”

이름을 묻는 나에게 술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설명했다.

태풍, 폭풍, 돌풍, 광풍이라고.

“이야… 다 같이 모이면 재난 문자 장난 아니겠네요.”

그에 겨울은 알 수 없는 말로 소감을 표현했다.

좋거나, 혹은 황당하거나.

저렇게 모르는 말이 나왔다는 건 둘 중에 하나란 얘기였다.

녀석의 속마음이 무엇인지 알 순 없지만, 이것 하나 만큼은 확실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림은 진짜 특이하네.”

보는 맛은 있다고.

펜리르까지 곁에 서 있으니 이곳은 완벽한 대수림이 되었다.

“다 데리고 갈 거야?”

“그럴 생각이다.”

“번거롭지 않겠어?”

“한 마리만 두고 갈 수도 없잖나. 일단을 데려갈 생각이다. 아니면 저 녀석을 타라고 하든가.”

나의 물음에 답하던 술은 테오를 바라보며 말을 끝냈다.

“…….”

테오 손가락이 자기 자신으로 향했다.

의아한 표정은 덤.

“타고 싶어서 그렇게 쳐다보는 거 아닌가?”

멍하게 서 있는 테오를 보며 술은 아님 말라는 듯 얘기했다.

하지만 나는 녀석의 말에 딴지를 걸었다.

“먹고 싶어서 봤을 수도 있지.”

솔직히 멧돼지를 보며 탈것을 연상시키는 게 정상은 아니니까.

앞 글자에 ‘멧’이 있건 없건, 돼지를 보고 떠올릴 수 있는 궁극의 상상은 지글지글 기름이 떨어지는 통구이라고 생각한다.

한데 그런 나의 생각이 틀린 것 같다.

“저, 저도 탈 수 있는 겁니까?”

테오는 잔뜩 흥분한 얼굴로 술에게 되물었다.

“그러면 제가 탈 수 있는 건 어떤 녀석인가요. 이 녀석입니까?!”

이렇게 적극적으로 말이다.

지켜보던 술은 고개를 저으며 끝에 있는 녀석을 가리켰다.

“태풍과 폭풍은 나와 부족장이 탈 거고, 광풍은 별이 탈 거다. 그대는 그 옆에 있는 돌풍을 타면 된다.”

“광풍과 돌풍이 나란히…….”

설명을 듣던 테오는 혼자 히죽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하는 짓을 보니 아마 별과 같이 돼지를 타고 달린다는 것에서 오는 기대와 흥분…….

아, 그런데 돼지를 탄다니까 되게 이상하네. 이거 왜 이렇게 입에 안 붙지.

어쨌거나 안장을 수선하는 술의 손은 바쁘게 이어졌다.

부족장과 별 역시 자신의 안장을 확인하며 불편한 부분을 다듬기 시작했다.

덩달아 기웃거리는 테오.

곁을 오가는 별을 보며 녀석은 점검과 힐끔거림을 무한 반복했다.

지켜보자니 왠지 짠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점검을 마친 우리는 시간을 확인하며 출정을 준비했다.

인원은 늘어나 250명.

이동하는 경로는 총 다섯 군데로, 네 개의 길은 평범했고, 나머지 하나는 오지를 돌아서 가는 길이었다.

길이 아닌 경로가 포함된 이유라면 거대한 늑대와 안장을 매단 멧돼지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눈에 띌 수밖에 없을 테니까.

이런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끌고 가는 이유는 전투 상황에서 빛을 내는 몬스터의 공격 본능 때문이었다.

그 어떤 환경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

이걸 정신력이라고 표현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펜리르는 기대 이상으로 자기 몫을 훌륭하게 해 줬다.

붉은 멧돼지에게 바라는 것 또한 몬스터 특유의 공격성이었다.

지금 당장만 하더라도, 저 돼지 4형제는 거대한 펜리르를 앞에 두고도 태연하게 서서 킁킁대고 있었다.

심지어 움찔거리며 시비를 걸기도 했으니, 크기만 더 자란다면 전투용 탈것으로 손색이 없을 터였다.

문제는 사람의 말을 잘 따를 것이냐… 이건데.

“야, 어디 가?!”

시험 삼아 올라탄 술의 돼지는 성벽을 향해 냅다 달려가기 시작했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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