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강화 인간들의 진영이 벌어지면서 놈들을 공격할 수 있는 공간이 크게 확장되었다.
일대일 구도였던 전투의 양상이 일대 다수로 변형된 것이다.
따라서 수적 우위의 상황이 시작되었고, 비로소 카렌 성의 병사들은 덧없는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아니, 늦출 수 있었다.
적어도 공격과 방어의 횟수는 늘어났을 테니까.
말하자면 단칼에 죽던 병사들이 몇 합씩은 주고받다가 쓰러졌다는 얘기다.
따라서 나를 비롯한 몇몇에 집중되었던 놈들의 공격은, 이제 곳곳으로 흩어져 수많은 허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물론 그 허점을 공략하는 건 다른 문제겠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한층 자유로워진 나와 별은 더욱 깊숙이 파고들며 놈들을 분리시켰다.
그렇게 거침없이 밀고 들어가던 그때.
거대한 도끼로 아군을 학살하는 무표정한 남자를 발견했다.
지금껏 마주한 놈들과는 차원이 다른 모습. 놈은 선혈이 낭자한 도끼를 들어 눈앞에 선 남자를 정확히 반으로 갈라 버렸다.
뿜어내는 기운도 심상치 않다.
한눈에 봐도 차이가 나는 놈의 탁한 오러는, 주위에 몰려 있는 수많은 강화 인간 중에서도 유달리 눈에 띄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6성은 이미 넘었다는 것.
날뛰는 놈을 저지하기 위해 전진하는 속도를 더욱 끌어 올렸다.
가로막는 놈들을 날려 버리며, 마침내 나의 해머는 놈의 도끼를 향해 날아들었다.
콰가가가각!
어쭈?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나의 해머를 막아 내다니.
녀석의 육중한 도끼는 휘둘러진 나의 해머를 쳐 낸 뒤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렇다고 태연하다는 건 아니다.
다른 놈들에 비해 잘 버텼을 뿐, 놈이 한 수 아래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갓 7성에 오른 느낌이랄까.
단계별 차이가 큰 7성급 이상에서는 초입과 중반은 어마어마한 격차를 보여 준다.
더군다나 나는 겨울의 마법까지 받은 상태.
녀석이 선방했다 하여, 나와의 격차가 좁혀지는 일은 없다는 얘기다.
쩌어억!
바로 이렇게 말이다.
이어지는 연속 공격을 막던 놈은 별안간 내지른 나의 발차기에 콧잔등이 함몰돼 버렸다.
그에 놈의 움직임이 주춤거렸고.
콰아악!
연이어 날아든 해머에 정수리마저 함몰되었다.
하지만 놈의 생명은 꺼지지 않았으니.
콰지직!
비척대며 도끼를 휘두르던 놈의 얼굴에 다시 한번 해머가 들이쳤다.
그제야 무너지는 놈의 몸뚱어리.
쓰러진 놈의 뒤로 난도질당한 아군의 시체가 줄을 이었다.
“이겨도 이긴 게 아니네.”
이렇게 많은 피해가 있으니 뒷맛이 쓸 수밖에.
이제와 할 수 있는 건 이 싸움을 최대한 빨리 끝내는 것뿐이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불필요한 희생을 최소화할 수 있을 테니까.
널브러진 아군의 시체를 타 넘으며 저항하는 강화 인간의 방패에 날카로운 피켈을 때려 박았다.
* * *
“후…….”
마지막 강화 인간이 쓰러지고 난 뒤, 나는 시체의 산을 이룬 벌판을 보며 긴 탄식을 내뱉었다.
치열한 전장은 사라졌고, 적들이 있던 자리엔 잔혹한 흑적만 남은 탓이었다.
“당분간 고기는 못 먹겠군.”
“나도…….”
전쟁이 처음인 부족장과 술 역시 불편함을 느끼는 건 마찬가지였다.
오죽해야 넘길 것 아닌가.
여기부터 저 끝까지.
나의 시선이 닿는 모든 곳이 사람들의 시체로 가득했다.
전투 당시엔 아무 생각이 없었건만, 이 참담한 후유증은 끝나고 나서야 찾아왔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더 많이 죽여야 이기는 게 전쟁이 아닌가. 우리는 그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다.”
곁에 있던 별은 어딘가를 바라보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녀석이 바라보는 곳은 가까운 곳에 있는 작은 바위 앞.
그 바위에 손을 얹은 채 구역질 중인 남자는 다름 아닌 테오였다.
“우웨엑!”
이번만큼은 테오를 놀릴 수 없었다.
전장을 뒤덮던 광기가 사라진 지금.
이 끔찍한 장면에 일조했다는 기묘한 감정은, 이겼다는 기쁨과 동시에 무거운 뭔가를 나에게 남겼다.
테오가 느끼는 감정 또한 다르지 않을 터.
전쟁이 처음인 우리는 이 기분 나쁜 감정 역시 이겨 내야 할 과제였다.
“그나저나 강화 인간이 대단한 건 인정해야겠군. 우리 측의 피해가 말도 안 되게 크다.”
“그러게.”
주변을 살피는 부족장의 얘기에 나는 짧은 말로 심정을 대신했다.
심각했다.
사라센의 강화 인간 부대는 섬멸됐으나, 아군 피해 역시 무거웠다.
불평등한 목숨의 교환.
100명에 가까운 놈들을 상대하기 위해 아군이 입은 피해가 무려 1,000명에 이른다.
그 짧은 시간에 입은 피해가 그 정도다.
만약에 우리가 지원을 나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성벽이 뚫려 놈들이 진입했다면 이후의 상황을 카렌이 감당할 수 있었을까?
애초에 에르텔이 없었다면?
아케른은 마법사를 지원하지 못했을 것이고, 지원을 못 받은 성은 보호막이 무너졌을 것이다.
그 뒤는 말해 뭐 하겠나.
본래 이 전쟁은 이길 방법이 없던 전쟁이었다.
[카렌 성 방어 성공.
사라센 측 사망 병력 3천 가량.
마법 부대 전멸.
강화 인간 부대 전멸.
아군 피해 1천 이상.]
베르에게 메신저를 보내고 답장을 기다리는 사이.
“고작 100명 때문에 1,000명 이상이 죽었다고?”
“그게… 적 병력이 워낙 강한지라.”
뒤늦게 모습을 드러낸 루드겐은 병사의 보고를 받으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가. 정예 병력이 나갔는데 뭘 어쨌기에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건가?!”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인상을 찌푸린 루드겐 마이어는 손을 휘적거리며 병사의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듣기 싫다는 듯 짜증을 섞어 말했다.
“시답잖은 변명할 생각이라면 가서 시체나 치워라.”
“죄송합니다.”
이어지는 핀잔에 병사는 고갤 숙이며 물러섰다.
“저게 무슨 개소린지.”
듣고 있던 나는 훅하고 치미는 분노에 죽일 듯이 루드겐을 노려보았다.
“뭐라? 개소리?”
한데 뭐가 잘못된 것 같다.
로제의 특기인 그거.
너무 열받은 나머지 나도 모르게 마음의 소리가 튀어 나간 모양이다.
“지금 내게 개소리라고 말한 것이오?”
얼굴을 붉힌 루드겐은 노기 서린 목소리로 나에게 따져 묻기 시작했다.
어지간히 크게도 말했나 보다.
저 거리에서 들은 걸 보면 말이다.
“거, 6성씩이나 되는 사람이 전장의 상태도 모르니 하는 말 아닙니까. 이 정도로 끝난 걸 다행으로 알아야지.”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냥 하고 싶은 말을 나오는 대로 뱉어 버렸다.
“아, 고작 6성이라 못 알아본 건가. 막눈이라서? 쯧… 지휘관이 저모양이니 병사들만 고생하지.”
“지금 말 다한 거요?! 아리안의 남작이라고 한들 이곳은 엄연히…….”
“감사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당신이 해야 할 말이지. 그렇게 따질 게 아니라.”
“크흠.”
떨떠름해하는 루드겐을 보며 나는 눈썹을 끌어 올렸다.
“뒈질 뻔한 걸 살려 줬는데 감사는커녕 눈알을 희번덕거리다니. 브라함의 귀족은 도리라는 것도 모르나 봅니다.”
말문이 막힌 루드겐은 입술을 떨며 분을 삭였다.
무슨 말을 해도 우스운 꼴을 당할 테니까.
부정하자니 무식한 놈이 되고, 수긍하자니 자존심이 밟히는 상황이었다.
딸랑―
하지만 놈은 운이 좋았다.
[번츠는 아직 접전인 상황.
도착 전에 방어선이 무너져 함락 당했으나, 재탈환 진행 중.
번슈타인 위기.
상황이 허락한다면 지원 요망.]
저 하찮은 놈과 실랑이 벌일 상황이 아닌 탓이었다.
“아무튼, 몸조심하고 있어요. 나중에 따로 볼 날이 올 테니까.”
치를 떠는 루드겐을 지나치며 나는 속삭이듯 낮게 중얼거렸다.
* * *
사라센이 기습한 전선은 국경을 마주한 전 지역이었다.
설마 했는데 이렇게까지 전선을 확장시킬 줄이야.
지원을 위해 도착한 번슈타인은 외성 한곳이 부서진 채 불안한 싸움을 이어 가고 있었다.
사실상 성문을 활짝 열어 둔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
반응이 늦었던 번슈타인은 공성 마법에 직격당하며 외성이 무너져 버렸다.
심지어 그 공격에 영주는 부상을 당했고, 뒤늦은 방어 마법으로 저항했으나 결과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보호 마법마저 무너지려던 순간, 켄드릭 등장으로 인해 번슈타인은 함락의 위기를 벗어 날 수 있었다.
그러나 적의 마법에 대항하기엔 이곳 마법사들의 역량이 모자랐다.
그렇다고 아케른에 지원을 요청할 수도 없다.
이미 가용할 수 있는 인원은 모두 끌고 나왔기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강했다니.
상정 범위를 넘어선 사라센의 무력에 켄드릭은 최악의 결과를 떠올리며 차선책을 강구했다.
“적의 마법 공격이 너무 강합니다. 보호막이 버티는 것도 이제 한계인 것 같습니다!”
울고 싶은 아이 뺨 때린다고.
전황을 보고하러 온 병사는 가뜩이나 심란한 켄드릭에게 더욱 무거운 소식을 전했다.
“정면으로 맞서는 건 포기해야 할 듯합니다. 마력 싸움에서 밀립니다.”
“그렇습니다. 계속 이렇게 버티다간 최후에 사용할 실드까지 못쓰게 될지 모릅니다.”
의견을 모으던 번슈타인의 부관들은 부상당한 영주를 대신해 켄드릭에게 의견을 전했다.
이들이 하고자 했던 말의 내용은 수성의 마지막 단계.
즉, 마법 싸움에서 패한 이후의 대책이었다.
그 시작은 보호구역의 축소.
마력 소모가 큰 광역 보호막을 걷어 내고 작은 실드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부터 적의 공성 마법은 거세질 것이고, 집중되는 공격을 견뎌 낸 뒤 적 보병을 성으로 불러들여 싸운다.
이렇게 되면 적의 범위 마법 공격은 더 이상 날아오지 못한다.
마법진을 떠난 마법은 피아 구분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긋지긋한 마법에서는 벗어나겠지만, 이후론 백병전이 시작된다.
소위 말하는 함락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보통 이렇게 될 경우 수성 측의 패배가 대부분 확실시 되지만, 번슈타인의 부관들은 역으로 제안했다.
여기서 관건은 실드 마법.
마력을 보존하지 못한 채 보호 마법이 무너질 경우, 실드 마법조차 제 기능을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병력의 피해는 늘어나고, 결과는 당연히 함락으로 이어진다.
그러한 이유로 번슈타인의 부관들은 광역 보호막 포기를 제안했다.
그나마 전황을 뒤집을 유일한 활로가 백병전인 까닭이었다.
“좋소. 그렇게 해 봅시다.”
고민하던 켄드릭은 번슈타인 부관들의 생각에 동의했다.
이후의 과정은 백병전을 위한 병력 보존과 실드 마법으로의 전환.
광역 보호막에 지원된 마법사들이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며 마력을 줄여 나가는 것이었다.
“실드가 형성될 지역으로 병력을 이동시켜라.”
부관들의 명령에 번슈타인의 병사들은 바쁘게 자리를 옮겼다.
이제부터 정문 수비 같은 건 의미 없는 짓이 된다.
적들이 성으로 들이닥칠 때까지 실드 안에서 버티는 것 뿐.
이후론 들이닥친 적들과 결사의 항전을 벌여 승리를 쟁취해야 했다.
“각 구역으로 병력 이동 완료!”
“실드를 위한 마법사 배치 완료!”
연이어 들리는 준비 소식에 켄드릭을 비롯한 부관들은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 곧 지옥이 펼쳐질 터.
“실드 발동!”
부관의 명령과 함께 성안 곳곳에서 마법진이 떠올랐다.
“실드 형성이 완료되면 보호 마법진에 있던 인원은 순차적으로 이탈한다!”
긴장된 얼굴로 마른침을 삼키는 마법사들.
지정된 장소로의 이동이 늦어지면, 자신의 목숨은 장담할 수 없게 되는 까닭이었다.
모두가 초조히 실드의 완성을 기다리던 그 순간.
“적의 공성 마법이 멈췄습니다!”
영문 모를 병사의 외침에 켄드릭은 무너진 성벽 앞으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마법이 날아오던 적의 최후방을 향해 시력을 집중했다.
초조와 긴장으로 점철된 시간이 지나갔고.
“적 후방에 지원군이다!”
마법 부대를 관통하는 기병들을 보며 켄드릭은 숨이 넘어갈 듯 크게 소리쳤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