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뒤를 이어 들이닥친 기병들은 넘어진 보병을 무시한 채 흩어지는 마법사들에게 향했다.
배틀 메이지가 없는지, 이미 죽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었지만.
“크어억!”
남아 있는 마법사들은 변변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허망하게 목숨을 잃어 갔다.
안쓰러울 만큼 일방적인 상황.
근접전에 취약한 공성 마법사는 날뛰는 펜리르 앞에서 더욱 약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녀석의 순발력과 도약력을 예측하는 건 인간에게 있어 너무나도 낯선 영역인 탓이었다.
눈 한번 깜박임에 7∼8m를 날아오는 데, 어떻게 반응하고 공격할 수 있을까.
배틀 메이지가 있다 한들 적응하기 힘든 속도와 거리감일 터였다.
문제가 어디 그 하나뿐이었겠나.
펜리르를 피해 물러선 마법사들에겐 잿빛 해머가 날아들었다.
운 좋게 거리를 벌려 마법을 시전해 보지만, 그 또한 부질없는 짓.
적절한 시기에 도착한 200의 기병들은 흩어진 마법사를 쫓아 남김없이 도륙했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이 2분 남짓.
펜리르와 기병 사이의 거리가 가까웠다면 1분도 채 걸리지 않았을 상황이었다.
이제 남은 마법사는 10여명.
그중에 강화 인간이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지만, 겉으로 보기엔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딱히 티 나는 분위기가 없기 때문이다.
기사들처럼 탁한 오러를 뿜어내는 것도 아니고, 마법에 대한 지식이 얕은 나로서는 외형적인 차이를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하나 특이점이 없는 건 아니었으니.
‘저놈들이 강화 마법사구나.’
배틀 메이지가 아님에도 도망치지 않는 녀석들을 발견했다.
우직하게 서서 느린 마법을 쏘아 대는 몇 명의 마법사들.
수드라에서 마주한 강화 인간들처럼 이놈들도 역시 무감정하게 공격만 시도했다.
그러나 너무 느리다.
느린데 가만히 서 있으니 상대가 되지 못하는 건 당연할 수밖에.
연습용 목각 인형처럼 놈들은 허무하게 쓰러져 갔다.
하지만 나는 놈들이 범위 마법에 특화된 공성 마법사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또한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사실도.
“뒤로 물러나!”
손을 끌어 올리는 무표정한 마법사를 보며 등줄기에 돋아나는 소름을 느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자결이 무슨 대수일까.
조용히 준비를 마친 마법사는 자신의 발밑으로 얼음 지옥을 소환했다.
“끄아아아아아아!”
미처 피하지 못한 기병들의 처절한 비명.
두 팔을 들어 올린 마법사는 솟아오른 얼음에 꿰뚫려 갈가리 찢겨졌다.
“퇴각한다!”
뒤늦게 달려오는 적 본대를 보며 모두에게 퇴각을 지시했다.
그 순간 카렌 성에서는.
그오오오오오오―
방어 마법이 걷히며 공성 마법진이 떠올랐다.
서서히 모습을 갖춰 가는 거대한 마법진.
후방의 상황을 모르는 적의 최전방은 여전히 카렌 성을 주시하며 대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마법 부대가 뭔가 해 줄 거라고 믿는 모양이지만.
‘끝났어, 네놈들은.’
이상함을 느끼는 순간 도망치기엔 이미 늦었을 것이다.
너희의 앞길을 막는 건 아군일 테니까.
뒤를 돌아본 나는 간격을 유지하며 적의 기병을 유인했다.
폭이 좁은 내리막이 길게 이어지는 구간.
언덕을 내려오던 나는 펜리르와 함께 허공을 날았다.
때마침 적의 선두가 구릉으로 진입했고.
파지지직―
매설해 둔 마법구에서 거대한 화염의 파도가 쏟아져 나왔다.
“머, 멈춰라!”
선두에선 기병이 돌아서려했으나 방법이 없었다.
그들이 내달린 곳은 가파른 경사가 이어지는 좁은 내리막길.
“크어억!”
“우와악!”
멈춘 사람과 내려오는 사람들이 뒤엉키며 구릉의 입구는 순식간에 지옥도를 그려 내기 시작했다.
설치 방향과 장소가 관건이라더니.
화르르륵―
사방을 가득 매운 화염은 구릉을 타고 올라가 마주한 모든 걸 집어삼켰다.
완벽하게 수행된 계획이 주는 희열은 짜릿했고, 펼쳐진 광경이 주는 잔인함에 소름이 돋았다.
만감이 교차하던 그때.
콰르르릉―
심장을 치는 굉음과 함께 마른 하늘에서 벼락이 내려 꽂혔다.
수세에 몰려 있던 카렌 성이 대규모 공격 마법으로 방향을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목표는 사라센 군대의 최전방일 터.
먼 하늘 너머로 보이는 섬전들이 구릉 위의 상황을 예상하게 만들었다.
그걸 본 부족장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위에는 난리가 났겠군.”
적의 밀집도가 높으니까.
대충 집어던져도 누군간 얻어맞을 상황이니 부족장의 말처럼 끔찍한 장면이 펼쳐졌을 것이다.
하지만 대열의 밀집이 풀리면 마법의 위력 또한 그만큼 옅어지는 바.
“다시 위로 올라간다.”
이번엔 다른 곳에 위치한 경사로를 통해 흩어지는 적 본진 측면을 노리기로 했다.
이 기회를 잡아 적의 병력을 소모시켜야 추후 사라센 정벌이 수월해지는 까닭이다.
이런 나의 생각이 통한 것일까.
카렌 성의 병력 또한 평원을 향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대형이 무너진 사라센의 군대는 이미 수천의 목숨을 잃은 채 정신없이 후방으로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동요하지 않고 대열을 따르는 무리들이 있었으니.
‘거기 있었구나.’
이번 전쟁의 핵심인 강화 인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위급한 상황임에도 서두르지 않는 침착한 모습.
놈들은 대열을 이끄는 지휘관을 따라 느긋하게 전장을 이동했다.
문제는 그 숫자가 너무 많다는 것인데… 카렌 성에서 날리는 마법은 그들이 아닌, 적병이 밀집한 곳을 목표로 했다.
따라서 최전방에 있던 강화 인간들에겐 아무런 피해도 없는 상황.
카렌의 마법이 보병단을 노리는 사이, 실질적 위험 요소인 그들은 태연하게 걷고 있었다.
심지어 그들은 예상보다 훨씬 많은 인원이었다.
어림잡아 100여 명쯤?
입수한 보고서의 내용보다 두 배나 많았다.
문제는 그런 강화 인간 부대를 향해 진격하는 아군이 있다는 것이었다.
하필이면 강화 인간을 향해.
달려오는 아군이 놈들과 동급이라면 카렌의 병사들은 큰 피해를 입게 될 터였다.
놈들보다 강하다면 모를까.
감정 없는 놈들의 공세를 꺾지 못할 건 불 보듯 빤했다.
5∼6성급 병력이 100명인데 그것을 어찌 상대하겠나.
기술과 전략으로 상대한들 결국 근본적으로 강한 놈이 이기기 마련이다.
그게 싸움의 법칙이고, 강자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였다.
“목표를 바꾼다!”
적의 측면을 노리던 나는 강화 인간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이대로라면 놈들의 측면과 후방을 동시에 공격할 수 있을 터.
속도를 올린 나는 조금 더 빨리 놈들의 측면을 들이받았다.
콰가가각―
사선으로 달리는 펜리르의 위에서 나는 몸을 내밀어 해머를 휘둘렀다.
그에 놈들의 측면이 틀어지기 시작했고.
“돌겨어어억!”
길게 이어지는 외침과 함께 카렌의 정예병이 적의 후방을 때렸다.
카앙!
콰가각― 콰광!
삽시간에 뒤엉키는 전장 위로 카렌 성에서 쏘아 올린 마법이 지나갔다.
먼 곳에서 폭발하는 화염과 뒤집히는 대지.
나의 눈앞엔 몬스터가 되길 자처한 인간과 또 다른 인간들이 처절하게 칼을 맞대고 있었다.
승자와 패자가 쉼 없이 교차한다.
적을 쓰러뜨린 병사는 피 칠갑을 한 채 다른 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승자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의 머리 위로 또 다른 칼이 내리꽂히고, 승자였던 남자는 한순간에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 버렸다.
물고 물리는 쳇바퀴의 연속.
언뜻 보기엔 카렌이 우세해 보이나 실질적은 내용은 그렇지 못했다.
그나마 동급의 기사가 있는 곳만이 접전을 이루고 있을 뿐.
질적인 면에서 밀리는 카렌의 병사들은 병력의 우위를 살리지 못한 채 고전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아군의 숫자가 얼마가 되건, 적과 마주할 수 있는 인원이 한정된 탓이다.
반면 천인장급 간부가 100여명인 적의 부대는, 강화된 능력을 앞세워 카렌의 병력을 밀어냈다.
그야말로 일당백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은 상황.
덕분에 카렌 병사들의 피해만 눈덩이처럼 늘어나고 있었다.
애초에 5∼6성급 부대라는 게 말이 안 되는 거니까.
본대와 단절된 상태였음에도 강화 인간 부대는 오히려 카렌의 병사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우려하던 일이 현실로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절대 강자는 없는 상황.
전장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건 압도적인 무력뿐이다.
바로 나와 같은 사람들 말이다.
콰아앙!
콰각― 콰지직!
대열을 갈라놓은 나는 펜리르에서 내려 난전 속으로 뛰어들었다.
작전 같은 건 없다.
전투의 향방은 이제 개인의 역량으로 넘어갔으니, 각자 싸워 이기는 것이 작전을 성공으로 이끄는 길이었다.
부아아악―
촘촘히 쌓여 있는 놈들 사이로 잿빛 해머가 긴 호를 그었다.
그리고 나는 벌어진 틈을 파고들어 미친 듯이 해머를 휘둘렀다.
닥치는 대로 내려찍고.
쩌어어억!
보이는 대로 때려 부쉈다.
아이의 힘과 기술이 어른에게 통하지 않듯, 강화 인간들과 나는 격이 달랐다.
카리프급을 데려오든가.
이곳에 있는 녀석들로는 나의 광기를 막을 수 없었다.
카렌의 병사들이 이놈들을 막지 못하는 것처럼, 나는 반대의 입장이 되어 강화 인간들을 해치웠다.
그러는 사이 아군의 공격이 점차 살아나기 시작했다.
뒤를 이어 합류한 반투족이 적의 시선을 잡아끌었고, 배틀 메이지인 테오는 자신의 진가를 드러내며 놈들을 유린했다.
유연하게 치고 빠지는 전투 방식.
다수의 적을 앞에 두고도 테오의 싸움은 달라지지 않았다.
“버스트!”
눈앞의 공간에 화염 폭발을 일으키곤 한순간에 뒤로 사라져 빙판을 만들었다.
콰당탕!
폭염을 뚫고 나온 놈들은 속절없이 넘어졌다.
“아이스 보우.”
그 위로 쏟아지는 얼음 화살의 향연.
잘 훈련된 배틀 메이지는 보병들의 천적이었다.
빠른 이동 마법을 통해 적의 공격을 피하고, 범위 마법과 대인 마법으로 철저하게 섬멸한다.
다수와 대인의 전투가 가능한 마법사.
배틀 메이지야 말로 전장의 사신이었다.
“아이스 월!”
밀려드는 적을 차단시킨 테오는 이동 마법으로 자리를 이탈했다.
그렇게 솟아오른 얼음 벽 너머엔.
콰지직!
사납게 날아간 나의 해머가 놈들의 뒤통수를 뭉개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군의 피해는 여전히 심각했다.
상대를 유린할 수 있는 건 나와 테오뿐이니까.
그 외에 적을 밀어내는 건 반투족 3인과 소수의 카렌 정예병이었다.
나머지 인원들은 목숨으로 목숨을 빼앗는 치열한 소모전을 이어 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닌 상황이 될 터.
“부족장!”
반투족을 불러들인 나는 삼각 대형을 갖춰 다시 놈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목표는 최대한 빠르게 길을 만드는 것.
촘촘한 놈들의 진영을 양쪽으로 쪼개 아군이 파고들 공간을 계속해서 늘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부아아악― 콰직!
마무리를 반투족에게 맡긴 채 무작정 해머를 휘둘러 놈들을 갈라놓았다.
그 와중에 죽는 놈도 적지 않았지만, 간혹 공격을 피해 방어를 취하는 놈들에겐 날아든 별의 대검이 목숨을 거두었다.
행여 별의 공격을 견뎌 내면 부족장의 창이, 운 좋게 살아난 놈의 머리엔 술의 쌍도끼가 내리꽂혔다.
실로 완벽한 연계 공격.
무거운 나의 해머를 받아 낸 놈들은 이어진 별의 대검에 대부분 무기를 떨어뜨렸다.
저게 어디 보통 대검이던가.
수드라 유적에서 얻은 별의 대검은 맞닿은 상대에게 충격 파장을 전달한다.
“어찌 이리 실력이 늘었단 말인가! 나에게도 비법을 알려다오!”
하나 내용을 모르는 부족장은 그저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심지어 눈앞의 적에겐 관심조차 없을 만큼.
회귀 전에 나눴던 부족장의 얘기는 아마도 이것 때문이었나 보다.
힘을 모으고 어쩌고 했던 것 말이다.
하지만 별은 턱 끝을 치켜들며 콧방귀를 뀌었다.
“흥, 너희 같은 둔한 놈들은 10년이 지나도 배울 수 없다.”
그러고는 거대한 대검을 휘둘러 적의 장검을 날려 버렸다.
그 모습에 경악하는 부족장.
“제발! 시키는 건 무엇이든 하겠다!”
그에 별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또 다른 적을 향해 대검을 치켜들었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