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보호 마법진 대형으로!”
클레어의 외침에 따라 지정된 마법사들이 일사분란하게 대형을 갖췄다.
지체 없이 이어지는 술식과 주문.
10여 분의 시간이 지나자, 푸른빛을 내는 거대한 반구가 아케른 성을 감쌌다.
“적의 공성 마법이 강하다는데, 마법사 지원이 더욱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지원 병력을 갖추던 켄드릭은 빅터를 찾아와 의견을 물었다.
적이 침입할 틈을 만들지 않는 것. 성벽을 지키는 보호 마법이야말로 수성의 기본인 탓이었다.
“하나 그렇게 되면 이곳의 방어에 문제가 생깁니다. 수성 마법은 마력의 총합이 절대적으로 우선시되니까요. 정예로 승부 본다는 건 통하지 않습니다.”
그에 베르는 문제점을 제시했다.
지원을 빌미로 아케른이 위험에 빠진다면 전황은 더욱 나빠질 테니까.
요충지인 아케른이 건재할 수 있던 이유 중엔 탄탄한 마법 부대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한데 그 병력을 나눠야 한다?
보호 마법이 뚫리는 순간, 아케른 성은 쏟아지는 마법에 의해 초토화가 될 것이다.
이것은 오롯이 마법사의 역량에 달린 일.
성내에 빅터와 동급인 실력자가 바글바글하다고 한들 어쩌지 못할 영역이었다.
“마력이 문제라면 해결 방법은 있어요.”
하지만 나는 지켜보던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러고는 의아해하는 베르를 향해 태연하게 대답했다.
“에르텔이 있잖아요.”
이럴 때 쓰려고 챙겨 온 귀한 물건이 아니던가.
국가급 마법을 시전할 만큼, 에르텔에는 풍부한 마력이 잠재돼 있다.
“아! 그것이 있었네요. 잊고 있었습니다!”
그제야 베르는 표정을 바꾸며 빅터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된다면 마법사들의 지원도 수월해질 터.
하여 아케른에 있는 마법사들은 균등하게 나뉘어 지원에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이끌게 될 2천의 병력 역시 준비를 마쳤다.
달라진 점이라면 병법을 숙지한 전문적인 부관이 포함됐다는 것.
천 단위의 병력이라는 건 개인의 무력만으로 통솔될 영역이 아닌 까닭이었다.
하여 나의 부대에 편성된 부관은 두 명. 또한 테오가 이끄는 마법사 스무 명이 대열에 합류했다.
“겨울이 너는…….”
“아뇨. 저도 갈게요. 제가 있어야 아저씨들도 더 힘을 내죠.”
걱정스런 마음에 겨울을 두고 가려 했으나 녀석은 완강했다.
하기야 사기 마법 3종 세트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하니까.
비록 여섯 명이라는 인원 제한이 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다.
승패를 가르는 건 결국 고위급 병력의 유무인 것, 팽팽한 전력에서 여섯 명의 우위란 생각보다 가볍지 않은 무게일 것이다.
“출정 준비 완료됐습니다, 이반 공.”
편성을 마친 부관의 말에 겨울과의 실랑이를 접었다.
전력이 되는 건 분명하니까.
나는 공이라는 호칭에 머쓱함을 느끼며 도열한 병력 앞에 마주섰다.
“출발 전에 한마디 해 주시죠.”
출정사를 말하는 건가?
생각지 못한 부관의 제안에 나는 눈썹을 문지르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한마디라니.
출정식 자체가 처음인데 무슨 말을 하라는 건지 모르겠다.
그렇게 망설이며 할 말을 찾던 나는 도열한 사람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필승!”
달리 할 말이 뭐 있겠나.
초간단한 출정사를 남기고 펜리르에게 다가갔다.
어깨에서 등으로 이어지는 유려한 안장과 부분 갑주.
이마와 턱 주변을 감싼 투구를 보며 멋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야말로 신수의 풍모랄까.
뿌듯함마저 드는 녀석을 보며 새로 장착한 안장에 올라탔다.
이 착 달라붙는 느낌이라니.
탑승자인 나와 겨울에게 맞춰진 등자는 완벽하게 몸의 중심을 잡아 주었다.
이 정도라면 마음 놓고 날뛰어도 될 터.
“다 좋은데 필승이 뭐예요, 필승이……. 거수경례까지 하면 군 입대 다큐 찍는 줄 알겠네.”
겨울은 고개를 저으며 앞자리에 올라탔다.
거수경례?
무엇을 뜻하는 건지 몰라도 느낌상 핀잔이라는 건 알 것 같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라던가,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뭐, 이런 멋진 말 같은 거 있잖아요.”
거기에 뭔가 거창한 한마디까지.
열두 척의 배가 갑자기 왜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겨울은 긴 한숨을 내쉬며 안타까워했다.
“아무튼 가요. 가서 다 발라 버리자고요.”
게다가 또 뭘 바르자는 말까지.
“고고!”
기세를 올리는 겨울의 신호에 따라 나는 손을 들어 출격을 알렸다.
* * *
함께 이동하던 빅터의 부대가 번츠 성으로 향했고, 우리는 방향을 틀어 카렌으로 내달렸다.
이제 도착까지 대략 2∼30분 남짓.
카렌 성을 앞둔 고갯마루에서 나는 부대의 행군을 멈춰 세웠다.
이곳에서 병력을 나눠 적의 후방을 기습하기 위함이었다.
“마상 전투에 능한 정예 기병 200기만 추려 내 주세요.”
명을 받은 부관은 신속하게 움직이며 병력을 선별했다.
목표는 최후방에 있는 마법 부대.
“사라센의 마법 부대가 원래 강하긴 했지만 이 정도까지 차이 날 줄은 몰랐네요.”
근심 어린 표정을 짓는 테오의 말에 나는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결국 사라센의 전력이 예상을 웃돌았다는 말일 터.
이유를 떠올리자면 역시 강화 인간뿐이었다.
기사만 강화되라는 법은 없잖은가.
마나를 흡수해 변경하는 건 같은 원리이니, 아직 마주하지 못했을 뿐 마법사라고 해서 불가능할 이유는 없었다.
“정예 기병 200기, 선별 완료했습니다.”
이어진 부관의 보고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작전을 설명했다.
“테오 님은 이대로 성으로 들어가 수성 마법을 지원해 주세요. 그사이 저를 포함한 기병은 적 후방을 습격할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이후 적의 공성 마법이 사라지면, 수성을 중지하고 공격 마법으로 전환해 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한데 200기로 후방을 뚫을 수 있겠습니까?”
작전을 확인한 테오는 무거운 얼굴로 우려를 표했다.
왜 안 그렇겠나.
아무리 후방이라고 한들, 마법사 주위엔 호위 부대가 반드시 포진해 있을 터였다.
그것을 최단 시간에 뚫어야 성공할 수 있는 작전.
이 무모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는 이유는 펜리르의 엄청난 기동력과 먼저 기습을 해 온 측이 사라센이기 때문이다.
“기습을 성공한 놈들이 취할 다음 작전이 뭘까요?”
“기세를 몰아 수성 마법을 깨고 성문을 넘으려 하겠죠.”
“네. 그래서 저는 뒤를 치려는 것입니다.”
적들의 주력은 카렌 성에 집중하고 있을 테니까.
대형을 갖춘 부대의 방향 전환은 생각보다 빠르지 않고, 나는 그 틈을 노리는 것이다.
적들의 시선이 오로지 전방으로 향해 있는 이때에.
본인들이 승리하고 있다고 믿는 그 순간에.
나와 펜리르가 최후방을 흔들어놓으면, 뒤따르는 기병이 흩어진 마법사를 처치하는 작전이었다.
“지금부터 20분 뒤, 최대한 요란하게 카렌 성으로 들어가세요.”
“시선을 끌란 말씀이십니까?”
“네.”
“맡겨 주십시오.”
내 의도를 파악한 부관은 가슴을 두드리며 성공을 자신했다.
“너는 테오 님과 함께 성으로 들어가 있어. 여기서부터는 나 혼자 움직여야 편해.”
“알겠어요. 조심하세요.”
상황을 파악한 겨울은 달리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그 대신 조용히 손을 들어 올렸고.
“프로텍션.”
“스트렝스.”
“헤이스트.”
나를 비롯한 반투족 삼인에게 같은 마법을 걸어 주었다.
그리고 또 다른 존재에게도.
“어… 사람이 아니어도 가능해?”
“네.”
겨울은 펜리르에게 사기 마법 3종 세트를 시전했다.
부르르 떨기 시작하는 펜리르.
푸르게 빛나던 녀석의 안광은 더욱 짙게 반짝이며 사납게 요동쳤다.
“먼저 출발하겠습니다.”
펜리르에 올라탄 나는 짧은 말을 건네곤 적의 후방을 향해 달려갔다.
* * *
높은 지대에 위치한 카렌 성의 일대는 상대적으로 낮은 구릉이 넓게 분포되어 있었다.
따라서 후방으로 잠입하려는 나에겐 최적의 지형.
일부러 내려와 살피지 않는 이상 이동 중인 우리의 모습이 발각될 위험은 극히 적었다.
더군다나 현재 상황은 놈들이 우세한 상황이 아니던가.
국경 전역에 걸쳐 기습을 성공했으니, 사주 경계 따윈 신경 쓰지 않고 있을 확률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 나의 예상은 적중했다.
“후방은 아예 텅 비었더군.”
적진을 살피러간 술은 자신이 본 내용을 낱낱이 설명했다.
“마법사들이 있는 최후방엔 500명 정도의 보병이 지키고 있다. 그리고 공성을 준비 중인 본대와는 200m 이상 벌어져 있더군. 카렌 성의 보호 마법이 약해진 걸 보고 돌입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절호의 찬스.
본대와의 거리부터 놈들이 집중하는 상황까지, 모든 게 우리의 기습을 위해 완벽하게 움직여 주고 있었다.
이제 슬슬 테오의 부대가 성으로 향하고 있을 터.
놈들의 시선은 더욱 카렌 성에 묶이게 될 시점이었다.
“다 발라 버려!”
펜리르에 올라탄 나는 적 후방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 나갔다.
이제까지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속도.
예상을 벗어난 펜리르의 질주는 주위의 풍경을 일직선으로 변화시켜 버렸다.
보이는 건 오로지 눈앞에 있는 하나의 점뿐.
발굽 소리조차 없는 펜리르의 질주에 놈들은 등 뒤로 다가오는 사신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 대가는 참혹한 죽음일지니.
“크아악!”
펜리르의 갑주에 부딪친 사라센의 보명은 단말마와 함께 허공으로 날아갔다.
반응할 틈이라도 있었을까.
놈들이 뒤를 돌아보는 사이, 나와 펜리르는 이미 전열의 중앙을 돌파하고 있었다.
“마, 막아라!”
뒤늦게 방패를 들어 보지만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어차피 자살을 선택했다면 차라리 창끝을 내미는 것이 나았을 것을.
콰가가각!
늘어선 보병들의 방패는 덧없이 무너지며 넓은 대로를 만들었다.
마침내 눈앞에 다가온 마법 부대.
거대한 마법진을 두고 일렬로 늘어선 마법사들은 들이닥치는 펜리르를 보며 이렇다 할 반응조차 보이지 못했다.
그저 얼어붙었다고나 할까.
두 팔을 하늘로 들어 올린 채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서 있을 뿐이었다.
쓸어버리기 딱 좋은 모습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곳에도 복병은 있었다.
탁한 오러를 뿜어내며 달려드는 네 명의 남자들.
익숙한 놈들의 기운은 강화 인간이 틀림없었다.
하나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겨울의 마법을 받은 지금 내 상태는 빅터가 아니면 상대할 수 없는 절정에 이르렀다.
“다 물어 죽여!”
큰소리로 외친 나는 펜리르에서 뛰어내려 강화 인간에게 달려들었다.
콰직!
들어 올린 칼과 함께 우그러드는 놈의 머리통.
사라져 버린 남자의 머리 너머로 사납게 날뛰는 펜리르의 모습이 보였다.
양 무리에 뛰어든 늑대다.
크르르륵!
처참하게 물어뜯기는 마법사들을 보며 나의 해머도 춤을 추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앙!
앞을 가로막는 방패를 때려 부수고.
콰지직!
무표정한 놈의 얼굴을 뭉개 버렸다.
이성이 없다는 건 참으로 두려울 수 있겠지만.
부아악― 콰앙!
보다 강한 내 입장에선 편한 상대였다.
전술이 없으니까.
강해진 육체의 능력만 있을 뿐 상대를 속이려는 움직임도 없고, 현혹하는 공격도 없다.
정직하고 단순한 몸놀림.
놈들보다 빠르고 강한 나에겐 의미 없는 동작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숫자는 의미 없다.
퍼어억!
달려든 강화 인간들은 삽시간에 정리되었다.
그리고 나의 몸은.
슈아아아악―
빛살처럼 쇄도하며 마법사 무리로 파고들었다.
이처럼 쉬운 상대가 또 어디 있을까.
다닥다닥 뒤엉켜 있는 공성 마법사들은 경악스런 표정을 지으며 황망히 몸을 피했다.
하지만 놈들의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으니.
“뼈를 발라 주마!”
뒤를 따라온 반투족 삼인방과 200의 기병들이 서슬파란 칼을 앞세우며 질풍처럼 들이닥치고 있었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