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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99개-144화 (144/203)

144화

“여기도 특별한 반응은 없는 것 같구나.”

“아무것도요?”

“그래, 딱히 이상한 점은 안 보인다. 한데 무엇 때문에 이 소란을 피우는 거냐?”

물컵을 건네던 그레이시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대답하지 못했다.

나도 궁금하니까.

물컵을 받아든 나는 난감한 얼굴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러고는 홀로 중얼거리며 컵 안을 살펴 보았다.

분명히 이 컵에 든 물을 마시고 쓰러졌는데… 이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이유로 죽었던 걸까.

“물이 없어서 그런가?”

컵 안을 들여다 보던 나는 잔이 비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졸졸졸…….

다시 물을 채운 컵을 들어 그레이시에게 내밀었다.

말없이 바라보는 그레이시.

내 얼굴과 컵을 번갈아 보던 그는 조용히 손을 들어 녹색 광원을 뿜어냈다.

“…….”

결과는 이전과 똑같은 무반응.

“안 마실거면 그만 내놔라.”

술은 멍하게 서 있는 나의 손에서 물컵을 가져갔다.

그러고는 단숨에 들이켠 뒤 빈 컵을 내려놓았다.

“괜찮아?”

“미지근해서 기분 나쁘다.”

툴툴거리던 녀석은 물병을 들어 남은 물마저 컵에 담았다.

그대로 잔을 들어 마시려는 찰나.

“잠깐.”

술의 동작을 멈춰 세운 나는 컵을 뺏어와 한참을 노려보았다.

왜 이게 멀쩡한 걸까.

상황이 이렇다는 건 회귀 후 누군가가 과거와 다른 행동을 했다는 것이 된다.

그 말인 즉, 나처럼 되돌린 시간을 알고 있다는 것.

그게 아니라면 회귀 후 달라진 이 상황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누군가가…….’

회귀를 알고 있다.

겨울처럼 눈치챈 것이 아닌, 완벽하게 기억하는 것으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누군가가 행동을 바꿨고, 그로 인해 결과가 변했다.

유력한 용의자는 그놈.

선한 얼굴로 사악한 미소를 짓던 남자와 사라진 하수구 노동자였다.

그렇다면 다음 목적지는 이미 정해진 것이 아니겠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따 저녁 식사 때 뵐게요.”

그레이시에게 인사를 전한 나는 방문을 열고 복도를 달려갔다.

“어딜 가는 건가?!”

“관리인 숙소.”

뒤를 따라붙는 두 녀석은 덤.

내성을 빠져나온 나는 외성으로 향했다.

* * *

“아, 영감쟁이 진짜 짜증나게 하네. 저 녀석을 어떻게 생포해. 동생아 그게 가능하겠냐?”

“음, 큰 소란 피워도 상관없다면 가능하겠지.”

“내 말이 그 말이야. 조용히 생포할 환경이 안 되잖아. 늘 옆에 사람들이 있는데 그게 되겠냐고.”

로우의 말을 이어받은 레이는 얼굴을 구기며 투덜거렸다.

차라리 죽이라면 쉬울 텐데.

그가 보유한 시독이라면, 이반이 아닌 빅터라도 손쉽게 보낼 수 있을 터였다.

빅터는 상황이 좀 다른가.

오러를 사용하는 몸이니 아무래도 독을 밀어내는 저항은 있을 것이다.

그래 봐야 고통스런 시간만 늘어날 뿐이지만.

8성이건 뭐건, 죽는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어쩌겠어. 또 이렇게 말하는 거 보면 확실히 뭔가 있는 것 아닐까? 일단은 로이드 님 지시를 따르는 게 맞는 것 같은데.”

구시렁대는 레이를 달래며 에비오는 창밖을 내다봤다.

청명한 하늘 아래 펼쳐진 푸른 대지, 그 위에 자리한 아케른 성을 보며 에비오는 뒷말을 이어 갔다.

“일단 기다려 보자. 아케른 성의 분위기가 어수선하다고 하잖아.”

들려오는 소문 뿐 아니라 실제로 성 주변은 부산했다.

오가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고, 특히 식량과 각종 비품의 반입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이반은 그렇다 치고, 빅터는? 그 영감은 죽여도 되는 거 아니야?”

로우였다.

좀처럼 입을 열지 않던 로우가 오래간만에 먼저 말을 꺼냈다.

그에 레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고.

“어, 그렇네? 빅터는 죽여도 되잖아. 사랑하는 내 동생 얼굴 가죽을 벗겨 죽인 아주 흉악한 영감이라고. 나도 아직까지 그런 짓은 안 해 봤는데!”

선하게 생긴 얼굴로 레이는 살인을 입에 담았다.

“좋아 빅터라는 영감을 죽일 수 있다면 죽여. 그거야 너희들에게 맡길게. 하지만 이반은 로이드의 지시에 따르자.”

그에 에비오는 거래를 하듯 빅터와 이반의 목숨을 교환했다.

뭔가 능숙해진 느낌이랄까.

“흠, 그건 별론데.”

“로이드에게 너무 의지 하지 말라는 너의 말도 맞는데… 일단은 그렇게 하자. 정말 중요한 일인 것 같으니까. 너희 형제나 나에게도 뭔가 이득이 있을 거야.”

어떻게 해야 저 형제를 다룰 수 있는지 조금씩 깨우치고 있는 모습이었다.

“뭐, 죽이는 건 언제든 가능하니 안 될 건 없지. 하지만 무리라고 판단되면 생포는 포기한다.”

“그래, 방법이 없으면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때는 내가 로이드 님께 다시 얘기해 볼게.”

하지만 레이의 고집 역시 만만치 않은 건 사실.

“로이드가 계속 무리한 요구를 한다면 그땐 우리끼리 행동할 거다. 너는 알아서 해.”

타이르는 에비오의 말을 흘리며 레이는 본심을 끄집어냈다.

뭐라고 답해야 하나.

이어진 레이의 마지막 말에 에비오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어… 그래.”

이렇듯 주저하며 웅얼거릴 뿐.

알아서 하라는 말속에 담긴 속뜻을 에비오는 본능으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녀석들과 함께하거나.

녀석들 손에 죽거나.

“그럼 나가서 좀 살펴보고 올까?”

자리에서 일어난 레이는 기지개를 켜며 방안을 가로질렀다.

* * *

“최근에 변동된 인원은 없다는 얘기죠?”

“네, 구인 공고를 내긴 했는데 아직 새로 들어온 사람들은 없습니다.”

하수구 인부 현황을 묻는 나의 말에 관리자는 변동사항이 없다고 대답했다.

결론은 바로 여기.

회귀 전과 달라진 장소는 이곳이었고, 내 목숨을 노린 녀석들은 여기를 통해 성으로 들어왔다.

그 말인즉 암살이라는 건데.

‘…왜?’

딱히 원한 살만한 일을 한 기억이 없는 게 문제였다.

굳이 악감정을 떠올리자면 노이 정도일까.

하지만 그 정도 관계로 암살자를 보낸다는 건 너무 과한 상상이 아닌가 싶다.

목숨을 주고받은 것도 아니니까.

좌우지간 어떤 연유로 인해 놈들은 잠입을 포기했다.

다름 아닌 나의 회귀 때문에.

하지만 꼬리를 무는 상상은 여기에서 멈춰졌다.

뭔가를 떠올리고 싶어도 연결시킬 단서가 없는 탓이다.

“찝찝하게…….”

인부 숙소를 나온 나는 다시 내성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음 날 아침.

밤새 창의적인 악연을 떠올려 봤으나 끝내 용의자를 추려 내지 못했다.

노이는 억지스러웠고, 카리프는 말이 안 됐다.

그 정도 실력자가 암살 따위를 시도할 리 없잖은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나는 퀭해진 눈을 비비며 느지막이 연병장으로 나섰다.

제4 흑마탑이 위치한 곳.

오늘은 빅터의 부대가 수비드를 향해 출발하는 날이었다.

“어이쿠, 밤새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먼저 나와 준비 중인 베르는 부스스한 나를 보며 놀리듯 말을 걸었다.

그 정도로 이상했나.

“스승님은요?”

“이제 내려오실 겁니다.”

머리를 긁적이는 나의 질문에 베르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왜 안 그렇겠나.

이제 곳 본격적인 전쟁을 향해갈 텐데…….

“그나저나 또 지긋지긋하게 이동하겠네요.”

“그렇죠. 가서 싸우는 것보다 이동하다가 지치겠어요. 하하하.”

여전히 베르는 건조하게 웃으며 나의 말에 답했다.

대략 7일이라고 했었나.

아케른에서 출발해 서북 방향으로 달리면 해안 도시인 수비드가 나온다.

스벤이 약속한 출정까지 남은 날짜는 4일.

제국군과 시간을 맞추려면 오늘 출발해야 일정이 들어맞는다.

물론 도중에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다는 전제가 필요하지만.

워낙 시간을 다투는 일이다 보니, 이렇듯 무리해서라도 선공을 취하려 했다.

“출정만 해도 한참 걸리겠네요.”

“아무래도 그렇겠죠. 10명씩 틈을 두고 출발해야 할 테니까요.”

200명으로 이루어진 선발대엔 켄드릭과 베르, 그리고 에스카가 부관으로 참여한다.

병력의 비율은 정예병 190명에 마법사 10명.

오늘 빅터가 출발하고 나면, 내일은 나의 부대가 출발한다.

구성 인원은 빅터의 부대와 같은 200명으로, 다른 점은 전원 모두가 정예병이었다.

그 이유는 바로 이 녀석 때문.

“좋은 아침입니다, 이반 공.”

뜬금없이 합류를 자처한 테오 때문이었다.

― 아무래도 이반 공과 저희 마법사는 좀 서먹하잖습니까. 차라리 제가 대신 동행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이건 무슨 똥 씹는 소리인 건지.

녀석은 나를 핑계로 대며 은근슬쩍 선발대에 합류했다.

다른 마법사를 대신해서 말이다.

뭐, 나름 일당백이라 이건데.

“클레어 님 혼자 상관없나요?”

“남은 마법사와 정예병을 다 끌고 갈 건데요. 뭐, 그리고 클레어 스승님 부대가 병력은 제일 많을 걸요.”

테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나의 물음에 대답했다.

하기야 클레어가 전담한 제3흑마탑은 제나르라는 도시에 있었다.

국경을 맞댄 시에라를 지나 하루거리니, 사실 전면전과 다름없는 방식으로 작전에 임할 예정이었다.

반면 나의 목표로 지정된 지역은 알함브라.

제2흑마탑이 있는 알함브라는 수드라와 바빌리안 사이에 있는 거대한 오아시스 도시다.

도착까지 예정되는 시간은 6일 정도로.

특이점이라면 황궁 도서관에서 읽었던 왕의 대로가 이곳에 존재했다.

서적에 적힌 고대의 길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면 메드바 유적지가 나오고, 잊어진 고대의 왕국 아호멧의 수도인 파사테, 지금은 산샤크라고 불리는 지역으로 이어지게 된다.

일정상 그곳을 들리는 건 전쟁이 끝난 이후에나 가능할 테지만.

어쨌거나 내일이면 나도 전쟁이란 것을 치르러 국경을 넘게 된다.

그저 그런 패싸움 수준이 아닌 진짜 전쟁 말이다.

“정렬!”

잠시 상념에 빠져 있던 나의 생각은 켄드릭의 외침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소리와 함께 등장하는 빅터.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등장에 연병장은 돌연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저들의 대부분은 전쟁이 처음일 터.

“간밤에 좋은 꿈을 꾸었는가.”

“네!”

가볍게 건넨 빅터의 인사에 병사들은 군기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부터 우리는 10인대로 나뉘어 수비드로 향한다. 이동 경로는 총 4군데. 중간에 발각될 경우 교전 수칙은 두 가지다.”

본격적인 내용으로 넘어가자 여기저기서 마른침을 삼켜 댔다.

저 내용에 따라 그들의 미래가 바뀔 테니까.

“퇴각이 불가능할 경우 현장에서 자결한다. 죽음에 이르는 방식은 그대들에게 맞기겠다. 만약 퇴각에 성공한다면 추적과 상관없이 수비드로 집결한다.”

요점은 그곳에서 최후의 일전을 벌이겠다는 말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빅터의 죽음이 그려지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1조와 2조부터 시작해 30분 간격으로 출발한다.”

빅터의 신호와 함께 선발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순간.

“카렌에 적습!”

전서구 담당 병사의 외침이 연병장 가득 울려 퍼졌다.

“그게 무슨 소린가?”

“사라센 병력이 카렌을 침공했다고 합니다!”

“규모는?!”

“추정되는 적 병력은 8천! 적의 공성 마법에 수성 마법으로 버티고 있으나 전황은 밝지 않다고 합니다!”

결국 우려했던 사라센의 선제공격이 시작된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의 작전도 전면적인 수정이 불가피한 상황.

“번츠에 적습!”

하지만 숨 돌릴 틈도 없이 또 다른 소식이 전해졌다.

이번에 들려온 소식의 근원지는 번츠.

아케른과 카렌 사이에 있는 작은 요새 도시였다.

“적의 추정 병력은 6천! 중규모의 병력이나 공성 마법이 너무 강해 위태롭다고 합니다!”

“번슈타인에 적습!”

연이어 들려오는 사라센의 침공 소식은 아케른의 오른편인 번슈타인까지 이어졌다.

그야말로 국경 전체에 걸친 전면전의 상황.

“침공한 적 병력의 추정치는 1만 2천! 개전과 동시에 외성이 무너졌다고 합니다! 깊은 해자로 인해 버티고 있으나 전황은 나쁘다고 합니다!”

정신없이 들려오는 병사의 보고에 빅터의 얼굴이 험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내 냉정한 얼굴로 돌아와 신속하게 작전을 지시했으니.

“작전을 취소하고 각성으로 지원을 보낸다! 켄드릭은 3천의 부대를 편성해 번슈타인. 이반은 2천의 부대를 끌고 카렌을 지원한다!”

태세를 바꾼 빅터는 전면전으로 계획을 바꿨다.

“저는 번츠를 지원하러 가겠습니다. 혹시 모르니 고모님께서는 아케른을…….”

그러나 빅터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고.

“시에라 평원에 대량의 적 출현! 추정 병력 1만 8천 이상!”

요란히 울려 퍼지는 병사의 외침은 아케른 성으로 향하는 적의 출현을 다급하게 알리고 있었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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