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목숨 99개-143화 (143/203)

143화

“흐어어어어어억!”

가쁜 숨을 몰아쉰 나는 발작하듯 몸을 일으켰다.

펄떡거리며 나대는 거친 심장의 두근거림.

혈관을 태우던 끔찍한 고통은 더 이상 느낄 수 없었고, 나의 눈앞엔 오랜만에 보는 숫자가 덩그러니 떠올라 있었다.

[93]

말이 씨가 된다고, 고작 하루 전에 나눴던 죽음에 관한 얘기는 이렇게 실체가 되어 내 앞에 들이닥쳤다.

예언이라도 한 건가.

아니면 이거야 말로 언령?

너무 황당하고 어이없어 화조차 나지 않지만, 일단 지독하게 운이 없었다고 치자.

여전히 나에겐 93번의 기회가 있으니 일주일 전 모습 그대로 다시 같은 삶을 반복하면 된다.

그런데.

왜 죽었는지는 알아야 그러려니 하고 살아갈 것 아닌가?

죽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 어떤 지점을 살펴봐도 합당한 이유가 없다.

새벽녘에 일어나 훈련을 해서?

마구 공방에 들렸기 때문에?

이딴 걸 이유라고 갖다 붙이면 인간의 대부분은 돌연사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 구간은 통과.

이후의 시간으로 넘어간다 해도 딱히 걸리는 부분이 없었다.

마법 수련장에 가서 마나 다루는 수련을 했고, 부족장과 술을 만나 방으로 들어왔다.

그게 전부다.

방으로 들어와 물 한잔을 나눠 마셨을 뿐이다.

그랬을 뿐인데.

‘왜 죽었냐고?’

영문도 모른 채 여섯 번째 회귀를 맞이했다.

하여 곁에 있는 베르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급사에 대해 좀 아세요?”

“네?”

“급사요. 갑자기 콱 죽는 거.”

“글쎄요? 사람 죽는 데 정해진 공식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 똑똑한 베르도 이 문제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때가 되니 죽는다는 것뿐.

이러니 태어난 순서는 있어도 가는 순서는 없다고 하는 것이다.

하여간 이대로는 안 된다.

원인을 밝혀내지 못한다면 또다시 반복될 상황에 대처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갑자기 급사는 왜요?”

“덧없는 삶에 대한 고찰이라고 해 두죠.”

한마디로 개죽음의 끝은 어딘가.

인간이 얼마나 황당하게 죽을 수 있는지 고민하는 것이었다.

“어려운 문제군요.”

의미 없는 답을 남긴 베르는 멈췄던 책 넘김을 다시 이어 갔다.

무관심하다고 서운해할 것도 없다.

죽음이란 게 원래 이런 거니까.

내 주변에 들이닥치기 전까진 영원히 상관없는 얘기처럼 들리는 것이 바로 죽음이란 놈이다.

하지만 나는 벌써 여섯 번째.

심지어 이번엔 죽었다 살아난 보람조차 없었다.

그래서 이유를 모르겠는 거다.

이제껏 경험한 시스템의 특성상, 이런 무의미한 죽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두들겨 맞았더니 충격 내성이 생겼고, 불에 타들어 갈 땐 화염 내성이 생겼었다.

한데 이번엔 왜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걸까.

너무 순식간에 죽어서?

시스템이 적응할 시간조차 없었다는 건가.

의문만 가득 남은 나의 시선은 바삐 움직이는 겨울에게로 향했다.

작은 손으로 나르고 있는 것들은 사라센의 종교 지도자들에 관한 서적들.

“그거 백날 찾아봐야 안 나와.”

퉁명스레 말을 꺼낸 나는 드넓은 도서관 어딘가를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다.

잠시 후.

나는 두 권의 책을 들고와 책상 위에 올려놨다.

서적의 제목은 잊혀진 고대 왕국의 서사와 대륙의 소국.

촤르르… 책장을 넘기던 베르는 움직임을 멈추고 소리 내어 책을 읽었다.

“메드바 유적지에 속한 산샤크의 고대 지명으로, 은둔자의 협곡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아호멧 왕조의 수도였다…….”

일주일 전 내가 했던 말과 똑같은 얘기를.

그사이 나는 다른 책을 펼쳐 겨울에게 내밀었다.

“아호멧 왕국을 가리켜 금역의 수호자라고 불렀데요. 세상에… 이거 느낌 빡 오지 않아요? 이름부터가 찐인데.”

그리고 겨울은 토끼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할 말이 있으나 참는 모습.

여섯 번째 회귀의 첫날은 그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 * *

“부르셨습니까, 로이드님.”

문을 열고 들어온 갈색 로브의 사내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흠칫거렸다.

내가 지금 무얼 본 걸까.

걸음을 멈춘 사내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의자에 기댄 로이드를 바라보았다.

웃고 있다니.

그의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지금보이는 저 표정은 분명히 미소였다.

“좋은 일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갈색 로브의 사내는 조심스레 로이드의 기분을 물었다.

돌아온 반응은 역시나 낯설기만 한 푸근한 분위기.

“나쁜 것 같진 않구나.”

그에 로이드는 느긋한 말투로 사내의 말에 대답했다.

사실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 웃는 건 아니었다.

그저 리의 능력을 훔쳐 간 놈의 존재가 다시 확인된 것뿐.

‘녀석이 돌아왔다.’

한동안 일어나지 않았던 회귀가 오늘 다시 일어난 것이다.

“에비오에게 연락해라.”

“뭐라고 전할까요?”

“놈을 죽이지 말라고.”

내용을 전한 로이드는 의자에 기대 눈을 감았다.

녀석이 회귀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혹시 카이 형제에게?

에비오에게 소식을 전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놈을 데려와야 써먹을 수 있으니까.

만약 카이 형제에게 당한 것이라면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알겠습니다.”

갈색 로브의 사내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문밖으로 나섰다.

* * *

황제의 대답을 기다리며 3일이 지나고, 아케른까지 또다시 3일.

[시스템 재설정 76%…….]

아케른 성이 멀리 보이기 시작할 무렵엔 시스템의 변화가 30% 가량 증가했다.

이런 속도라면 앞으로 5일 정도 걸리려나.

새로운 힘에 대한 기대와 함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나의 죽음.

“아저씨.”

“어?”

“최근에 회귀한 것 맞죠?”

무엇을 근거로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겨울은 놀랍게도 나의 변화를 눈치챘다.

“뭐야, 그걸 어떻게 알았어?”

“도서관에서요.”

“거기서 왜…….”

“그냥요. 책에 관심 없다고 했던 사람이 갑자기 필요한 것만 쏙 골라 오니까 의심했죠.”

갑작스런 겨울의 지적에 남아 있는 숫자 93을 바라보았다.

“죽는다는 건 어떤 느낌이에요?”

그리고 겨울은 회귀 전과 똑같은 질문을 나에게 했다.

“글쎄? 한마디로 말하자면 어이없다?”

죽음에 대한 나의 감정은 또 한 번의 회귀를 통해 다르게 변했다.

“하지만 나에겐 다시 기회가 주어지니까. 복수를 할 수도 있고, 원인을 찾아 나설 수도 있겠지.”

또한 이어진 다음 얘기도 이전과는 달랐다.

사람이란 경험을 통해 변해 가는 것이니까.

“역시 그럴 일 없도록 사는 게 가장 좋겠네요.”

“맞아.”

회귀 전과 같은 겨울의 대답을 끝으로 나의 시선은 눈앞에 다가온 아케른 성으로 향했다.

서서히 내려오는 거대한 도개교.

하지만 이번엔 뭔가 그림이 달랐다.

뭐가 달라진 거지?

막연한 이질감을 느끼며 도개교를 넘기 시작했다.

하나 그 순간.

“어디 가요?”

펜리르에서 내린 나는 도개교 끝으로 다가가 성문 아래를 바라보았다.

“두 명이 부족해…….”

회귀 전과 달라진 부분.

하수구 주위에 매달려 있던 인부들의 숫자가 줄어들었다.

이런 적이 있었나.

이제껏 반복됐던 시간 중에 달라진 모습을 마주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의도적으로 회귀 전과 다르게 움직인 게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사라졌다.

사라진 하수구 인부들과 나 사이에 접점이 있었던 걸까?

같은 시간이 반복되고 있는데 누군가가 다른 행동을 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고, 회귀한 이후 돌아오는 6일간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었다는 것이다.

‘뭔가 있는데…….’

막연한 의심을 품은 나는 똑같은 모습으로 회의장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곳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켄드릭의 작전도 일치했고, 마법구에 관한 클레어의 설명도 다르지 않았다.

변한 것은 오직 나 하나뿐.

조용히 앉아 있던 나는 아무런 질문도 없이 각인된 마법에 대한 주의 사항을 듣기만 했다.

늦은 밤까지 회의는 이어졌고, 다음날 일찍 연병장에 내려가 똑같은 수련을 했다.

다를 것 없는 기본기 훈련.

“벌써 마치는 건가.”

“어, 오전에 맡길 일이 좀 있어서.”

부족장과 나는 같은 말을 주고받으며 연병장을 벗어났다.

그리고 나는.

핵핵핵―

꼬릴 흔드는 펜리르를 데리고 마구 공방으로 향했다.

아직까지 상황은 그대로다.

마구 공방에 도착한 나는 2인용 안장을 주문했고.

“2인용을 말하는 겁니까?”

“네. 두 사람이 앉을 수 있는 크기면 됩니다.”

회귀 전과 같은 문답을 나누며 마구를 의뢰했다.

돌아온 반응도 틀리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마구 장인은 곁에 있는 펜리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 나는 부분 마갑을 주문했다.

달리 설명할 것도 없는 동일한 모습.

펜리르의 치수를 잰 마구 장인은 넓은 종이에 마구를 그려 나에게 보여 줬다.

“어떠십니까?”

“좋은데요. 이대로 만들어 주세요.”

도안을 살펴본 나는 회귀 전과 같은 내용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기까지도 딱히 문제될 것이 없었다.

마구 공방을 나온 나는 펜리르와 함께 마법 수련장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역시…….”

그 남자는 없었다.

멋쩍게 머리를 긁으며 고개를 숙였던 선한 인상의 남자.

선하지만 선하지 않은 표정을 가지고 있던 남자는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지금까지 되돌린 상황 중에 어긋나는 건 단 두 가지.

성문 아래에 매달려 있었던 하수구 노동자와 이곳에 있었어야 할 남자가 사라졌다.

하나 이것만으로 나의 죽음을 속단할 순 없다.

아직 그 어떤 연결 고리도 발견되지 않았으니까.

걸음을 옮긴 나는 마법 수련장으로 향했고, 찾아온 이유를 묻는 테오의 말에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특이한 성분을 감지하는 마법 도구가 있나요? 아니면 마법이라도.”

“그게 무슨 말입니까?”

“예를 들어… 독이라든가, 이상한 그런 거요.”

그에 테오는 눈살을 찌푸리며 한걸음 물러섰다.

“그거야 감응석이라는 것도 있고, 정화라는 마법도 있죠. 치유사들이 사용하는 마법인데…….”

“고마워요!”

수련장을 돌아 나온 나는 펜리를 마구간에 맡기고 그레이시를 찾아 나섰다.

특별한 일이 없으니 빅터와 함께 있을 터.

빅터가 있는 집무실을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정화 마법? 있지. 한데 그건 왜…….”

“일단 저와 함께 가 주세요.”

집무실에 들어간 나는 어리둥절한 그레이시를 붙잡고 침실로 향했다.

마치 납치라고 하듯이 말이다.

내성 오른쪽 입구에서 내려온 나는 왼쪽 입구를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때마침 연병장을 가로질러 오는 부족장. 녀석의 뒤로 어슬렁거리며 걷고 있는 술의 모습도 함께 보였다.

“어딜 가는 건가.”

바뀐 장소에서 마주친 부족장은 나를 바라보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어, 볼 일 있어 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중이지.”

“흠, 혹시 지금…….”

“시간 있냐고? 방으로 가서 얘기하자.”

“어? 그걸… 크흠, 알겠다.”

당황하는 부족장을 뒤로하고 나는 숙소를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이제 검증을 위한 마지막 단계.

“음, 이 방은 전망이 좋군.”

방문을 열고 들어온 술은 창밖을 보며 동일한 소감을 전했다.

달리 대꾸하지 않았다.

나의 시선은 녀석의 곁에 있는 물병으로 향했으니까.

“펜리르가 보면 환장하겠군.”

창가에서 돌아선 술은 테이블로 다가가 물병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나는 녀석의 손을 붙잡아 물병을 빼앗았다.

“엥? 뭐하는 건가. 치사하게 물 가지고 유세 떠는 건가?!”

“시끄러.”

호들갑 떠는 술을 놔두고 그레이시에게 물병을 내밀었다.

“이걸 확인할 수 있을까요.”

“어떤 걸 말하는 거지?”

“독이나, 뭐 다른 것들이요.”

물병을 받아든 그레이시는 병뚜껑을 열어 내부를 바라보았다.

“흠… 갑자기 독이라니.”

그러고는 손바닥을 들어 물병을 향해 녹색 광을 뿜어냈다.

물병을 감싸며 사라지는 마법.

“여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구나.”

그레이시는 물병을 돌려주며 덤덤하게 말했다.

‘물이 아니라고?’

사실 가장 의심스러웠던 게 물이었다.

술이 따라 준 물을 마시고 쓰러졌으니까.

다만 의아했던 건, 나보다 먼저 마셨던 술은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물은 아닌 걸로 확인됐고.

‘술과 나의 차이가 뭐였지?’

둘 사이 공통점인 물을 지워냈다.

그러자 드러나는 유일한 차이점.

“이 물 컵도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테이블에 있던 컵을 들어 그레이시에게 내밀었다.

내 목숨 99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