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사람을 잘못 봤다던 젊은 남자는 허리를 꾸벅 숙여 사과를 전했다.
어찌 저리도 선하게 생겼을까.
덩달아 고개를 숙인 나는 내심 감탄하며 가던 걸음을 계속했다.
전쟁을 앞두고 있는 흉흉한 상황이건만, 저 남자의 얼굴은 홀로 평안했다.
마치 다른 세상의 사람처럼 말이다.
“흠…….”
한데 묘하게 거슬리는 게 있었다.
어색하다고 해야 하나.
뭐라고 콕 집어 말하긴 어렵지만, 입안에 겉도는 이물질처럼 불편한 느낌으로 신경 쓰였다.
분명히 선한데 선하지 않은 표정, 또는 다른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은 이질감.
근원을 알 수 없는 이상한 기분에 다시 한번 뒤돌아 멀어지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험악한 녀석들만 보다 갑자기 순한 얼굴을 마주한 탓일지도 모르겠다.
고개를 돌린 나는 마법 수련장을 향해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조용하네.’
연병장 반대편에 위치한 마법 수련장은 분위기 자체가 아예 달랐다.
아무래도 육체의 사용 빈도가 적다보니 기합을 지를 일도 없는 것이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괴성이라 해봐야 클레어의 잔소리뿐.
확실히 이곳은 겉보기엔 차분했다.
콰아아아앙!
물론 마법이 터질 땐 달라지지만.
수련장을 둘러보던 나는 클레어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이곳엔 어쩐 일로 오셨나요.”
하나 그런 나의 계획은 갑자기 등장한 불청객으로 인해 틀어지고 말았다.
“볼일이 있어서 왔죠.”
테오였다.
적당히 대답하고 넘어가려던 찰나, 다가온 녀석은 뜬금없는 소리로 나의 걸음을 붙잡아 세웠다.
“별…….”
이렇게 말이다.
말끝을 흐리고 있지만, 녀석은 분명 별의 이름을 말했다.
“그 녀석은 왜요.”
되묻는 나의 말에 테오는 얼굴을 붉히며 딴청을 부렸다.
이게 어떤 분위기라는 건 알겠는데.
“할 얘기 없으면 갑니다.”
뭉그적거리는 꼴이 보기 싫어 테오의 곁을 지나쳤다.
하나 그 순간.
“그, 그녀는 어떤 남자를 좋아합니까?!”
녀석은 난데없이 별의 이상형을 캐물었다.
“…….”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붉어진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보니 꽤나 귀엽게 생긴 얼굴이다.
응석받이처럼 생긴 것이, 귀한 집 막내 도련님이라는 느낌을 폴폴 풍기고 있었다.
어쨌거나 들어온 질문이 있으니 나가야 할 대답도 필요할 터.
“음… 별은 강하고 큰 남자를 좋아하죠.”
나는 진지한 얼굴로 녀석의 물음에 답했다.
“강하고 큰 걸…….”
한데 왜 저렇게 부끄러워하는 걸까.
안 그래도 붉었던 녀석의 얼굴이 더욱 붉게 상기되었다.
저러다 터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이 자식이.’
뭔가 엉뚱한 상상을 하는 것 같아 바로 내용을 정정했다.
“자기보다 체격이 크고 강한 남자를 좋아한다는 거니까 이상한 상상하지 마요.”
“아… 다행.”
“뭐라고요?”
“어억! 아니, 저도 그런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흐음?”
“흐음이라뇨! 당연히 키 크고 남자다운 그런 사람! 맞아요. 저도 별 님이 그렇게 생각했을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뭐, 더 이상 들어보나 마나였다.
결론은 별에게 반했다는 얘기일 테니까.
“저도 이미 들어 알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별 님은 당신 정도는 돼야 한다고 말했었죠.”
“그런데 왜 또 물어봐요?”
“혹시나 싶어서요. 귀찮아서 대충 얼버무린 게 아닐까 해서…….”
테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나름의 상상을 펼치고 있었던 모양이다.
냉정한 한마디가 필요한 상황.
남의 짝사랑에 소금 뿌리는 것 같아 찝찝하지만, 현실 정도는 알려 줘야 정신을 차리지 않겠나.
“반투족 자체가 그래요. 남녀할 것 없이 강자를 최우선하는 문화라 약자에게 관심이 없어요.”
“그렇군요…….”
그에 테오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하나 그것도 잠시.
“만약 제가 이반 공을 이긴다면요?”
“글쎄요, 그렇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건 없을 것 같은데.”
“왜 그렇죠? 별 님이 강하다고 인정한 이반 공을 이기면 기준을 충족시키는 것 아닙니까? 한데 왜…….”
녀석은 어떻게든 접점을 찾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물론 최후의 승자가 가장 강한 건 맞는 말이지만.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는데, 반투족은 오러와 마법 둘 다 싫어합니다.”
어떻게 노력한다고 해도 별과의 연애는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럴 수가…….”
“뭐, 그렇게까지 비관할 필요는 없고요. 싫어하긴 해도 강함 자체를 부정하는 건 아니니까요.”
낙심하는 녀석을 보며 위로 아닌 위로의 말을 전했다.
하지만 괜한 소리였나 보다.
“재대결을 요청합니다!”
“갑자기요?”
녀석은 이상한 의욕을 보이며 희망의 불씨를 피워 올렸다.
“지난번엔 제가 실수했지만 이젠 다를 겁니다. 오늘 7서클로 승급할 예정이거든요. 안정화까지 마치고 나면 출정 전에 시간이 있을 겁니다.”
그런 테오의 자신감엔 나름의 이유가 있던 것이었다.
“원하신다면 저야 언제든지.”
녀석의 말에 답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거절할 이유가 없잖나.
이 모든 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중요한 경험이니, 내 입장에선 허락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럼 그때 보는 걸로 하죠.”
가볍게 눈인사를 건넨 나는 뒤돌아 클레어에게 향했다.
* * *
암회색 벽돌로 만들어진 복도.
조심스레 지나던 두 남자는 한 지점에 멈춰 주위를 살폈다.
“이 안에 없는 거 맞아?”
“어, 조금 전에 다른 곳으로 가는 걸 봤어.”
불안해하는 에비오를 안심시키며 레이는 적갈색 문 앞에 다가섰다.
꿀꺽…….
그대로 서서 마른침을 삼키고는, 청동으로 만든 손잡이를 잡아 오른쪽으로 비틀었다.
달깍.
선명하게 울리는 장치의 소리.
“오, 이 자식 문도 안 잠갔네?”
활짝 열리는 방문을 보며 레이는 쾌재를 불렀다.
“이거 갑자기 일이 너무 쉽게 풀리네. 그치? 완전 싱겁게 됐잖아.”
“시끄러. 여기서 떠들지 말고 빨리 들어가.”
긴장한 에비오는 히죽거리는 레이를 밀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침실 내부는 단출했다.
싱글 침대와 작은 테이블 하나, 딱히 살펴볼 것도 없는 조촐한 방이었다.
“사실 이런 건 내 스타일이 아니야. 직접 목을 따는 게 내 스타일이라고.”
“그럼 붙잡아 죽이지 그랬어.”
“큭, 나도 그러고 싶었지. 그런데 놈이 싸우는 걸 보니까 이건 아니다 싶데? 솔직히 조용히 이기긴 힘들겠더라고. 그래서 방법을 바꿨지.”
에비오의 핀잔을 흘리며 레이는 길게 중얼거렸다.
마치 비 맞은 개처럼.
“난 그렇게 막 고집스런 사람은 아니거든. 나름 합리적인 사람이란 말이야.”
방 안 곳곳을 둘러보던 레이는 흥분되는 마음을 담아 홀로 떠들어 댔다.
“사람들이 그러잖아, 강약약강이 비겁하다고. 근데 그게 뭐 어때서? 강한 사람과 정면으로 싸우는 건 무식한 짓이야. 그러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처맞는다?”
“비슷해. 하지만 운이 존나 없다면 전생의 나처럼 뒈진다고. 대가리가 퍽! 하고 터져서 말이야.”
그에 에비오는 고개를 돌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일리 있는 소리를 하고 있는데 표정이 이상한 탓이다.
자신의 죽음을 이토록 신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애초에 그럴 기회를 가진 사람 자체가 없겠지만, 그래도 이 녀석은 정말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그러니 쌈닭처럼 덤비는 게 다는 아니라는 거야. 강한 자에겐 엎드리고, 기회가 왔을 때 이렇게 해치우면 되잖아. 내 말이 틀려?”
“아니,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에비오는 등을 돌린 채 레이의 말에 대답했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니까.
괜한 자존심에 객사하느니, 레이의 말처럼 움직이는 게 백번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사이 스트레스는 받겠지. 하지만 그거야 약한 놈들 괴롭히면서 풀면 되잖아. 세상이 그래. 뭐든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거라고.”
너무도 현실적인 레이의 말에 에비오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살아오던 세상 또한 그랬으니까.
사장이 부장에게 화를 내면 부장은 팀장에게 그 화를 전달한다.
그 화는 또 다른 관리자에게 전이되고, 돌고 돌던 사장의 질책은 여러 사람의 분노가 뒤섞여 말단인 자신에게 쏟아졌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엿 같은 세상.
색안경을 끼고 봐서 그렇지, 레이의 시선이야말로 자신이 생각했던 세상의 모습과 많은 것이 일치했다.
“어떻게 해야 괴롭게 죽일 수 있을까. 침대에 독을 발라서 온몸이 녹아내리게 만들까? 아니면 손잡이 발라서 손끝부터 천천히?”
하지만 저런 모습은 역시나 적응되지 않았다.
아직 내 자신의 인간성이 온전히 남아 있다는 유일한 증거일 터.
“겉에서 녹아들어 가는 것도 좋지만, 역시 독은 안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정석이지.”
히죽거리는 레이의 모습에 오소소 돋아 오르는 소름을 느꼈다.
“안에서부터 녹이려면 결국 이게 최고 아니겠어?”
서성거리던 레이는 테이블로 다가와 물병을 집어 들었다.
들어 있는 물에 시독을 풀 생각인 걸까.
“하지만 물에다 독을 타는 건 하수들의 수법이지.”
물병을 내려놓은 레이는 컵을 들어 에비오에게 보여 줬다.
그렇게 입술 한쪽을 삐쭉 끌어올려 피식 웃고는.
“이런 데 발라야 눈치를 못 챈다고.”
물컵 안쪽을 향해 무색무취의 시독을 뿜어냈다.
* * *
클레어의 도움으로 마나 수련은 더욱 큰 진전을 보였다.
매끄러운 마나 운용은 기본이요. 한 지점에 모아 압축시키는 것도 이젠 제법 봐줄 만했다.
그에 클레어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니.
“마법적 재능도 쓸 만하구나.”
뭘 해도 면박인 빅터에 비하면 배울 맛이 나는 수련이었다.
그러니 발전 속도도 빠를 수밖에.
[시스템 재설정 46%…….]
수련을 마치고 돌아가던 나는 덩달아 속도가 오른 시스템을 보며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얼마 남지 않았다.
저 숫자가 100으로 바뀌는 순간, 나에겐 새로운 세상이 열릴 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 될 것이다.
이제껏 경험한 시스템이라면, 나에게 해가 될 행동을 할 리 없기 때문이다.
“어딜 가는 건가.”
그런 나의 고민은 부족장의 목소리와 함께 슬그머니 사라졌다.
“어, 방에. 이제 좀 들어가서 쉬려고.”
“흠, 특별한 일이 없다면 상의할 게 있네만.”
“그래? 그럼 방으로 가서 얘기하자.”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지만, 부족장과 나는 일단 방으로 이동했다.
뒤늦게 따라온 술을 포함해서.
“음, 이 방은 전망이 좋군.”
방문을 열고 들어온 술은 창밖을 보며 소감을 전했다.
나도 그랬다.
이곳에서 바라본 시에라의 평원은, 국경 너머라는 게 아쉬울 만큼 장대하고 아름다웠다.
“신이 밤마다 내려와서 돌보는 땅이래.”
오죽하면 이런 말을 하겠나.
이상하리만큼 평탄한 시애라의 땅은 인공의 느낌마저 들만큼 신비로운 평원이었다.
“펜리르가 보면 환장하겠군.”
창가에서 돌아선 술은 테이블로 다가가 물병을 손에 쥐었다.
설마 저대로 마시는 건 아니겠지 싶던 순간.
“야! 입 대고 마시면 어떻게 해. 나도 마시려고 했는데!”
녀석은 손에든 물병을 들어 병나발을 불었다.
“유난 떨지 마라. 침만 안 섞이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컵을 들어 물을 채웠다.
“이거 마지막 잔인데 마실 텐가? 안 마실거면 내가 마시겠다.”
“줘. 마실 거야.”
물컵을 받아 든 나는 단숨에 들이켰다.
욕심이 아니라 정말 목이 마른 탓이었다.
“아침 수련을 끝낸 이후로 계속 물을 못 마셨다고.”
툴툴거리며 컵을 내려놓은 나는 의자에 앉아 부족장을 바라보았다.
“그래, 상의할 게 뭔데?”
“아, 다른 게 아니라 힘을 집중하는 법을 알고 싶다. 별 그 녀석, 단순히 힘만 세진 게 아니더군.”
“그럴 거야. 최근 별의 실력이 부쩍 늘었거든.”
“그대의 말이 맞다. 오늘 아침에 대련해 보고 정말 많이 놀랐다.”
역시나 반투족.
부족장은 달라진 별의 모습에 호기심과 호승심을 동시에 느낀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질투가 아닌 전사로서의 투쟁 본능.
강한 것을 동경하는 전투 민족의 본능이라 할 수 있었다.
분명히 그런 것이었는데…….
‘뭐야.’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명치를 뚫고 올라온 날카로운 통증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비명조차 막혀 버린 뜬금없는 고통.
경험한적 없던 생소한 감각은 혈관을 따라 폭발하듯 번져 나가고 있었다.
“그사이 별은 힘을 집중해 증폭시키는 방법을 깨달은 모양이더군…….
멀어지는 나의 의식은 더 이상 부족장의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시선은 빠르게 좁아지며 검게 물들기 시작했고.
“이반? 왜 그러나? 이바아아아안!”
가슴을 움켜쥔 나는 이렇다 할 반응도 못한 채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