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아케른으로 돌아온 당일 저녁.
몇 시간의 휴식을 마친 빅터는 부관 및 핵심 인물들을 회의실에 모았다.
요점은 사라센 흑마탑 점령.
“사라센의 흑마탑의 위치는 총 네 곳으로, 제1흑마탑인 바빌리안과 제2흑마탑이 있는 알함브라, 그리고 제나르와 수비드에 각각 제3, 제4흑마탑이 있습니다. 이중에 저희가 공략할 곳은 세 군데.”
말을 멈춘 켄드릭은 벽에 걸린 지도로 다가가 지휘봉을 들었다.
“우리는 바빌리안을 제외한 나머지 세 곳을 공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고는 아케른과 가까운 순서대로 위치를 짚어 나갔다.
그 첫 번째 대상이 된 곳은 아케른과 국경을 맞댄 시에라 인근의 제나르.
시에라 절반 크기의 작은 도시로 별다른 특이점이 없는 지역이었다.
“이곳에 있는 제3흑마탑은 클레어 경께 지휘를 맡기겠습니다.”
간단하게 책임자를 밝힌 켄드릭은 두 번째 지역을 찾아 지휘봉을 가리켰다.
“다음 지역은 제4흑마탑이 있는 수비드입니다.”
켄드릭이 지목한 수비드는 제나르에서 서북 방향 끝에 위치한 대표적인 해안 도시였다.
도착까지 예상되는 시간은 대략 7일 거리로, 이곳을 담당하는 지휘관은 빅터였다.
“마지막 세 번째 지역은 알함브라, 이곳은 이반 공께 지휘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에 나의 시선은 켄드릭의 지휘봉을 따라 지도 위로 향했다.
위치는 사라센의 정중앙쯤일까.
수드라와 바빌리안 사이에 위치한 이곳은 어림잡아 6일 정도의 시간이 소요됐다.
“우리의 목적은 흑마탑의 기능 정지와 인근 부대를 급습, 스벤 총사령관의 본대가 사라센을 점령할 수 있도록 강화 인간의 투입을 최대한 저지하는 것입니다.”
켄드릭의 설명이 이어지며 회의장의 분위기는 급속도로 무거워졌다.
말이야 쉽게 하지만, 사실상 무모하기 짝이 없는 위험한 작전인 탓이었다.
“각 부대는 100인으로 구성되며, 목표 현장에서 집결합니다.”
관건은 철저한 기습이었고, 그러기 위해선 소수의 인원으로 분산해 잠입해야 했다.
따라서 전투가 확장될 경우 패배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큰 상황.
“싸우는 것은 흑마탑으로 제한하며, 적의 군대는 함정과 매복으로 진군을 저지합니다.”
전투 지침을 설명한 켄드릭은 문 앞에 있는 병사에게 신호를 보냈다.
병사는 작은 상자를 들어 켄드릭 앞에 내려놓았다.
“매복지에 매설할 마법구입니다. 각인될 마법은 플레임 쓰나미로 클레어 경께서 수고해 주실 예정입니다.”
몇몇 모르는 말들이 나왔으나 일단 무시하고 경청했다.
결론은 마법 도구의 일종일 테니까.
“준비된 물량이 많으면 좋겠습니다만, 주재료인 부여석이 워낙 희귀한 탓에 완성된 것은 다섯 개가 전부입니다.”
다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귀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적은 숫자는 아닙니다. 구할 수 있는 건 다 긁어모은 것이니까요.”
왜 아니겠나.
있는 대로 다 모은 게 다섯 개라면, 개수를 가지고 실망할 일은 아닌 듯했다.
“그러나 매복으로 선제 타격을 가한다면 큰 성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각인 마법에 대한 지식은 필수인 바. 이에 대해선 클레어 경께서 설명해 주시겠습니다.”
30대같은 99세의 노파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보고 또 봐도 믿을 수 없는 저 부조리한 외모라니…….
“플레임 쓰나미. 말 그대로 화염으로 이루어진 해일을 말하는 게다. 따라서 마법의 진행 방향이 매우 중요하지.”
앞으로 나선 클레어는 최대의 효과를 뽑아내기 위한 설명을 이어 갔다.
쉽게 말해 화염의 파도를 어느 쪽으로 보낼 것인가.
관건은 마법구의 설치 방향이었다.
“마법구의 특성상 제어 수준은 최하에 가깝지. 그러니 엉뚱한 곳으로 보내면 애먼 숲만 태우다 돌아오게 될 게다.”
닿는 모든 것들을 무차별적으로 태워 버리는 상급 마법이지만, 통제할 수 없는 게 치명적인 단점.
“그러니 설치 방향은 행렬과 수평을 이뤄야 한다. 가로지르면 망하는 게지. 하나 설치만 정확하게 한다면 일대를 초토화하고도 남을 게다.”
그 모든 단점을 상쇄할 만큼 화력 하나는 끝내준다는 얘기였다.
그렇다고 하니 궁금할 수밖에.
“화조의 백염보다 뜨겁나요?”
하여 나는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최강의 불꽃과 비교했다.
“본신의 힘이라면 비슷하겠지만, 마법구니 그보단 약할 것 같구나.”
돌아온 대답은 조금 부족하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딱 좋다.
적들은 견뎌 낼 재간이 없고, 나는 움직일 수 있는 까닭이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서 퇴로를 막는다면…….’
상황은 더욱 완벽하게 마무리 될 터였다.
“파도의 진행 속도가 빠른 편은 아니니 매복지 선정을 잘해야 할 게다.”
이후로 클레어의 설명은 불꽃의 초당 이동속도 및 확산되는 범위의 각도로 발전되었다.
결론은 외통수를 노리라는 것.
흥미진진한 사라센 공략 작전은 밤늦도록 계속되었다.
* * *
“넌 어땠어? 소득이 좀 있었나?”
“아니, 내성에 있는 출입구 세 개 중에 왼쪽이라는 것만 알아냈어.”
“오, 그것만 해도 크네. 난 내성 근처도 못 갔다고.”
에비오가 알아낸 정보를 들으며 레이는 엄지를 치켜들어 칭찬을 보냈다.
저게 뭐 그리 대단할까 싶지만, 이반과 빅터의 침실을 알아내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탓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이것도 물어물어서 겨우 알아냈어.”
허탕 쳤다는 레이의 말에 에비오는 푸념하듯 대답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물어볼 대상이라 해 봐야 같은 하수구 노동자인데, 그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내성에 들어간다고 해도 일하는 곳의 위치가 다른 까닭이었다.
따라서 병사들에게 물어보았으나 돌아오는 건 의아한 표정들 뿐.
‘벌써 이상한 놈으로 찍힌 것 같은데.’
특히나 마지막에 대답해 준 녀석은 대놓고 이상하단 표정을 지었다.
하수구 관리 노동자가 궁금해하기엔 질문의 내용과 대상이 너무 생뚱맞기 때문이었다.
“일단 내성 왼쪽이란 걸 알았으니까 절반은 성공한 거지. 어렵겠다 싶으면 그쪽에 사는 놈들 다 죽여 버리자고.”
저런 살벌한 얘기를 웃으며 하다니.
반드시 침실의 위치를 찾겠노라 다짐하는 에비오였다.
“내가 이반을 마주치기만 하면 간단한데 말이야.”
레이는 푸념하듯 중얼거리며 혀를 찼다.
시작점을 놓친 탓이다.
형상을 쫓아 추적을 하려면 장소를 지정해 흔적을 찾아 나서야 하는데, 문제는 성에 들어온 순간부터 놈의 흔적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행동이 자유롭다면 이곳저곳 다 따라다녀 보겠지만, 지금은 엄연한 하수구 관리 노동자가 아닌가.
그러니 그 많은 흔적을 따라 마음 놓고 돌아다닌다는 건 예상 밖으로 힘든 문제였다.
“이렇게 바쁜 일인 줄 몰랐지.”
들어오기만 하면 손쉬울 줄 알았던 추적은 바쁘다는 의외의 복병을 만나 정체되고 있었다.
어쨌거나 내성 왼쪽 출입구라는 것을 알았으니 거기서부터 살피면 간단하게 해결될 터.
“젠장.”
짜증 가득한 목소리와 함께 숙소의 문이 활짝 열렸다.
로우였다.
야근에 불려 간 녀석은 이제야 고된 일과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었다.
“와, 사람 잡네 잡아. 이 시간까지 계속 일을 시킨 거야?”
“후…….”
호들갑스런 레이의 질문에 로우는 긴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게 사람은 줄을 잘 서야 한다니까? 내가 그랬잖아, 그 자식 느낌 안 좋다고. 하는 꼬라지가 영 삐딱했어.”
일과 시작할 때의 일이었다.
지원자를 찾는 관리자의 말에 로우는 무심코 손을 들어 버린 것이다.
아무도 들지 않아서 대신 들었다나.
“확 죽여 버리려다가 겨우 참았네.”
“진짜? 네가 참았다고? 솔직히 말해 봐. 죽이고 온 거지?”
“안 죽였어.”
“아닌데, 이미 죽인 거 같은데.”
“아직 안 죽였다고.”
생각 없이 들어 올린 손 하나로 로우는 이 시간까지 시달리다 돌아왔다.
눈에 살기를 가득 품은 채 쾌쾌한 냄새를 풍기며 말이다.
“일단 빅터 껍질부터 다 벗겨 내고 나면 그때 죽여야지. 뒈질 때까지 하수구 물을 처먹여서.”
부들거리는 로우의 등에 레이의 손이 가볍게 올라갔다.
위로하듯 작게 다독이고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거 재밌겠네.”
* * *
아케른 성의 아침은 요란스럽다.
뿌연 새벽안개를 뚫고 기합 소리가 울리기 시작하니, 늦잠 같은 건 꿈조차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훈련에 참여하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
연병장으로 내려간 나는 두 시간가량 삼신기 수련을 진행했다.
“벌써 마치는 건가?”
“어, 오전에 맡길 일이 좀 있어서.”
훈련을 끝낸 나는 부족장을 뒤로 하고 펜리르를 찾아 나섰다.
목적은 마구 제작자를 만나 녀석의 안장을 만들려는 것이다.
선택이 아닌 필수랄까.
보다 빠르고 안정적인 움직임을 위해선 펜리르의 몸에 맞춘 전용 안장이 절실한 상태였다.
‘어제는 좀 위험했어.’
돌아오는 길에 겨울은 펜리르의 등에서 떨어질 뻔했다.
나름 등자를 채웠지만, 크기가 맞지 않다 보니 일어난 어쩔 수 없는 사고였다.
딱 맞는 안장만 있었어도.
잡다한 아쉬움을 삼키며 펜리르 전용 마구간에 도착했다.
그래 봤자 기존의 말들을 쫓아낸 것뿐이지만.
아우우우우우―
어쨌거나 녀석은 하울링을 하며 다가온 주인을 환영했다.
발라당 누워 배를 드러내는 건 기본이요, 혓바닥을 길게 내밀고 헐떡이는 모습은 덩치에 안 맞게 상당히 귀여웠다.
“가자.”
마구간에 도착한 나는 반갑게 꼬릴 흔드는 펜리르를 데리고 마구 공방으로 향했다.
잠시 후.
“2인용을 말하는 겁니까?”
“네. 두 사람이 앉을 수 있는 크기면 됩니다.”
마구 공방에 도착한 나는 앞뒤 자르고 2인용 안장을 주문했다.
돌아온 대답이야 말해 뭐하겠나.
기이한 나의 주문에 마구 제작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나 곁에 있는 펜리르를 본 남자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만한 크기라면 2인용이 아니라 그 이상도 충분한 탓이었다.
“혹시 마갑도 만드나요?”
“네, 당연히 만들죠. 저 녀석 몸을 덮으시려고요?”
“그 정도까진 아니고, 마구 연결 부위만이라도 신경 썼으면 해서요. 가죽 끈으로 대충 연결해 놓은 건 보기 그럴 것 같거든요.”
나는 펜리르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요구 사항을 전했다.
외관상 보이는 멋짐도 중요했지만, 적당한 보호구가 동반된다면 더욱 좋지 않겠나.
전장을 함께할 이 녀석에겐 그에 걸맞는 장비가 필요하다고 생각됐다.
“부분 마갑이라…….”
잠시 고민하던 장인은 펜리르의 곁으로 다가섰다.
잠시 주춤거리며 망설이는가 싶더니만, 이윽고 줄자를 꺼내 각 부위의 치수를 재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넓은 종이를 펼쳐 예상되는 마구를 그려 넣었다.
“어떠십니까?”
“좋은데요. 과하지 않으면서도 필요한 부분은 보호해 주고 있네요. 이대로 만들어 주세요.”
의견을 묻는 남자의 말에 나는 크게 끄덕이며 제작을 의뢰했다.
더하고 뺄 것 없이 딱 적당한 구성이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틀 뒤에 오시면 될 것 같습니다.”
완성 날짜를 확인한 나는 마구 공방을 나와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투명했던 아침 햇살은 어느새 머리 위로 향하고 있었다.
“마나 수련이나 하러 갈까.”
어정쩡한 시간을 확인한 나는 목적지를 마법 수련장으로 정했다.
점심까진 시간이 남고, 그냥 쉬자니 아까웠던 탓이다.
하나 잰걸음을 내딛던 나의 두 발은 가던 걸음을 멈춰야 했다.
“저기요.”
등 뒤의 부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죠?”
돌아선 나는 소리의 주인을 찾아 짤막하게 질문했다.
순하게 생긴 얼굴에 생글거리는 미소.
“아, 죄송합니다. 사람을 착각했네요.”
선한 인상의 낯선 남자는 멋쩍게 머리를 긁으며 고개를 숙였다.
내 목숨 99개